옛날에 고정○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이 양반 별명이 고정팔이다. 그때(라떼시절인데, 한 30년 전을 말한다)는 이름 끝에 ‘팔’을 붙이는 게 유행이었다. 나는 박찬팔이었고.
하여튼 고정팔 형은 이름 그대로 술자리에 앉으면 고정이었다.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앉아서 계속 마셨다. 나는 선술집을 바 호핑(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마시기) 하는 쪽이어서 한자리에 오래 못 붙어 있는 버릇이 있었다. 이 때문에 고정팔 형이 떴다 하면 피해 다녔다. 주저앉아야 하는 자취방 같은 데서 허리도 아파 죽겠는데, 별 화제가 아닌 시시껄렁한 주제를 안주로 밤을 지새우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나. 내가 지금 파셋증후군(척추 질환의 하나)에 허리디스크까지 앓고 있는 건 순전히 그때 고정팔 때문이다.
그는 어지간하면 취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내가 곯아떨어져서 쓰러졌다가 새벽에 일어나면 전사자들 사이에서 그가 보였다. 새벽 달빛이 들어오는 자취방 창을 등지고 앉아 혼자서 통음하고 있는 고정팔! 깬 걸 들키면 곧바로 대작해야 했으므로 자는 척하며 실눈을 뜨고 그를 관찰하곤 했는데, 붉은 얼굴로 면벽 수도하는 표정에다가 시선은 약 15도 위를 바라보며(무슨 스쾃 기본자세냐) 천천히 술잔을 입술로 옮기는 게 그의 술버릇이었다.
그래도 젊음을 안주로 통음하는 고정팔이었는데, 어느 날은 똑같이 새벽에 깨어 그의 간헐적인 오른팔 운동을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대작을 한 날이 있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와 술상을 마주한 건 순전히 딱 하나의 이유였다. 쓰린 새벽에도 내 후각을 흔들던, 갓 담근 게 분명한 총각김치 냄새 때문이었다. 짓찧어서 향이 뿜어져 나오던 싱싱한 마늘과 고춧가루의 향이, 발치에 쓰러져 있는 전사자(내지는 가짜 전사자)들이 내뿜는 아세트알데히드 냄새와 뒤섞여 좁은 방이 그야말로 향의 대폭발을 빚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냄새들을 누르고 지휘하던 건 오직 꼿꼿한 고정팔과 총각김치였다.
공부하라고 어머니가 담가 보내주신 총각김치는 그렇게 고정팔과 나의 새벽 음주용 안주로 사라졌다. 채 익지도 않은 총각김치라 매운맛이 났지만, 어디서 그런 알타리를 구하셨는지 씹을 때 아삭거림은 지금도 이빨이 기억을 하고 있다. 버석 아삭, 그렇게 씹어서 먹는 총각김치의 진수는 정작 무보다 푸른 줄기 청이었다고 생각한다. 베어 먹은 이빨 자국이 남아 있는 하얀 무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푸른 청.
무에 배어들라고 뿌린 양념은 딱딱한 표면이 튕겨내고, 대개 청에 몰리게 마련이라 짜고 진했다. 짜니까 이빨로 물어뜯어서 대략 서너번에 줄기를 나눠 먹게 되는데 그때마다 입안을 쏘듯이 채우던 마늘과 고추, 더러 씹혀서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하던 생강과 멸치젓의 고릿한 뒷맛까지 총각김치는 걸물 중의 걸물 김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 익으면 물론 더 맛있지만, 덜 익어도 그 알타리의 풋내와 양념의 신접살림이 또 좋아서 일부러 찾는 사람도 있다. 나는 뭐든 좋다. 다 익으면 술안주 만들 생각이 더 난다는 게 좀 다를 뿐.
줄기도 당연히 버리지 않고 토막을 치는데, 대개는 헹구지 않는다. 무르익어서 좀 맛이 저물었다 싶으면 헹구는 경우가 있다. 나는 어느 쪽이든 좋지만 안 헹군 것이 총각김치가 주는 최후의 선물을 알뜰하게 먹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잘라서 들기름과 국 멸치에 설탕 치고 달달 볶아서 막걸리를 마시면 끝내준다. 소주도 물론 좋다. 위스키는 곁들여보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요새 깍두기 볶음밥이 뜬다는데, 익은 총각김치 볶음밥이 들으면 속상해할 것 같다. 볶음밥에는 들기름이 아니라 참기름이 역시 제격이다. 시장에서 갈색으로 진하게 짠 참기름과 식용유를 섞어 볶아서 찬밥을 넣고 한번 더 볶듯이 버무리면 된다. 취향껏 고추장을 한 숟갈 넣어도 맛있고, 밥 안주로 훌륭하다. 냉동고를 뒤져서 어묵이 나오거든 같이 넣어서 볶아보라. 진짜 맛있다.
음식을 맛있게 잔뜩 먹고 나서 느끼는 포만감도 종류가 있다. 짜장면과 김치찌개 먹은 포만감이 다르다. 나는 총각김치 볶음밥을 먹고, 매워서 벌겋게 부르튼 입술에 참기름기가 번들거리게 앉아서 느끼는 포만감이 세상 한심하고 그래서 더 끝내주는 자학의 포만감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을이니 얼른 총각김치부터 담가야지. 밥집 술집에서는 웬만해서 총각김치를 주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물론 서울 기준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원가도 비싸고 아마도 헤퍼서 그럴 텐데, 총각김치만 주면 돈 내고 먹을 의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맛은 그렇다 치고 이 김치를 베어 물 때 식감은 정말 세계 10대 식감에 넣어도 되지 않는가.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