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군에 있는 와이너리 불휘농장에서 포도 따기 체험 중인 관광객이 환하게 웃고 있다. 불휘농장 제공
1년에 한번씩은 꼭 국외 와이너리 투어를 다녔던 김도현(40)·한성실(36) 부부는 최근 한국 와이너리에 시선을 돌렸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와이너리에 방문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국내에서 풀고 있다. 한국에도 갈 만한 와이너리가 꽤 많이 늘어난 것 같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 부부처럼 국내 와이너리를 찾아다니는 관광객이 늘자, 와이너리들이 이들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쏟고 있다. 차별화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놓아 와인 투어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한국에서 와인을 만든다고? ‘마주앙’ 말고?”
취재 기간 내내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놀라지 마시라.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와이너리만 해도 무려 200여곳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와인 강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제한된 면적에 와이너리가 200여곳 있다는 사실은 꽤 놀라운 일이다.
200곳의 와이너리가 생기는 동안 우리는 왜 모르고 있었을까. 정보와 홍보의 부족 탓이다. “정부 차원에서 한국 와인 현황을 조사한 적도 없는데다, 한국 와인이 성장하기 시작한 것도 불과 10여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소비자에게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기 어려웠다”고 최정욱와인연구소 최정욱 소장은 설명했다.
한국 와이너리의 강점은 무엇일까. 적극적인 체험이 가능하다는 점이 우선 거론된다. 최 소장은 “와인 메이커가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와인을 만드는 ‘농가형 와이너리’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수확 철에 방문하면 직접 과실을 따고 와인을 만드는 과정을 관람할 수 있다”며 “외국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와이너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 한국 와이너리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여러 지역 가운데 특히 충청북도 영동군이 한국 와인의 성지로 부각 중이다. 영동군의 대표 상품이 포도인데, 청포도부터 머루 포도, 우리가 가장 흔하게 접하는 캠벨 포도까지 생산되는 포도의 종류도, 규모도 국내 최대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포도 중 15%가량이 영동군에서 생산될 정도다. 영동군에 있는 와이너리만 40여곳에 이른다니 ‘성지’라는 단어가 지나치지 않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 기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영동군은 구석구석 와이너리가 포진해 있어 마음먹고 몰아서 와이너리 탐방을 하기에 제격이다. ‘한국의 보르도’라 불리는 영동군의 대표적인 와이너리 2곳을 돌아보았다.
소개한 와이너리 외에도 한국에는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와이너리가 있다. 집콕도 호캉스도 질렸다면 이제는 조심히 떠나볼 때다. 유럽 식탁에서는 유럽 와인이 빛을 발하듯, 한식 밥상에는 역시 한국 와인이 가장 잘 어울린다. 선선한 가을 자락, 여유롭게 와인 투어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불휘농장에서 와인 족욕을 즐기는 관광객. 불휘농장 제공
2011년부터 영동에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한 불휘농장은 화이트 와인과 로제 와인, 레드 와인, 증류주까지 생산하는 대규모 와이너리다. 제품명 ‘시나브로’로 더욱 유명해, ‘시나브로 와이너리’라고도 불린다. 최근에는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하는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되어 방문객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와이너리로 들어서자마자 ‘시나브로’를 형상화한 알록달록한 의자 겸 조형물이 눈에 띈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의 공식 포토존”이라고 이근용 대표는 설명했다.
이 대표는 와인 메이커이자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을 직접 맞는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국내 여행이 늘어나면서 “확실히 방문객 수가 늘어났다”고 한다. 주말을 이용해 금강 둘레길을 따라 사이클 여행을 오는 사이클족부터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오는 가족 단위 관광객까지 다양한 이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이들을 겨냥해, 와인을 양조하고 남은 앙금을 이용해서 쿠키를 만들고, 직접 농장에서 딴 포도로 나만의 와인을 담그는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특히 와인 족욕과 청포도 청 만들기가 인기다. 족욕을 하며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체험은 미리 예약을 해야 할 만큼 입소문이 났다고 이 대표는 귀띔했다.
이곳의 대표 와인은 토착 청포도 품종인 ‘청수’로 만든 ‘시나브로 화이트’. 청포도 특유의 달큰하고 새콤한 향에 비해 입안에서는 다소 드라이하게 느껴지는 화이트 와인이다. “관광 체험형 와이너리를 만들겠다는 얘기를 했을 때 주변에서는 다들 엉뚱하다고 했다”고 말한 이 대표는 “와이너리 대표이기 전에 농민이기 때문에 직접 생산한 제품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이 목표였다.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은 그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소비자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와이너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깨달았다고 한다.
실내 한쪽에는 널찍한 테이스팅 바도 있어 국외 와이너리 못지않은 고즈넉한 정취를 누릴 수 있다. 체험 프로그램은 방문하기 1~2주 전에 예약하는 것이 좋지만, 전화 문의 후 당일 방문도 가능하다. 불휘농장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약목2길 26, 043-742-5275.
여포와인농장의 여인성 와인메이커. 백문영 제공
불휘농장에서 차로 15분 정도 달리면, 여포와인농장이 나온다. 와이너리에 들어서자마자 푸릇푸릇한 포도밭이 가장 먼저 보였다. “일단 포도밭부터 보고 시작하자”는 여인성 메이커의 말에 따라 포도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직 수확하지 않은 검붉은 적포도가 가지에 가득 달려 있었다. “이렇게 알맹이가 크고 무거운 포도가 이토록 가느다란 가지에 매달려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크고 싱싱한 포도였다.
보통 여름철에 즐겨 먹는 캠벨 포도보다 알도 굵고 껍질도 더욱 두꺼웠다. 여 메이커는 “여포의 꿈 레드 드라이와 레드 스위트를 만드는 ‘머스캣 베일리 에이’(MBA) 품종”이라고 했다. 한국 와인에 익숙한 이라면 들어봤을 품종이라지만, 역시나 낯설고 생소한 포도였다. “직접 한 송이 따서 먹어보라”는 여 메이커의 말이 반가웠다. 나무에서 갓 따서 씻지도 않은 채로 먹은 포도의 맛과 향은 이전의 알던 포도와 완전히 달랐다. 장미를 연상시키는 우아하고 은은한 향, 새콤하지만 시지 않은 산도와 끝 맛의 달콤함까지. ‘이래서 직접 포도밭으로 오는구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리를 옮겨 양조장으로 향했다. 일회용 방역 가운과 모자, 신발까지 착용하고 마스크를 낀 채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레드 와인의 진하고 묵직한 향기가 코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지금 막 수확해서 숙성 중인 2021 빈티지 와인을 시음해보라”며 그는 스테인리스 숙성 통에서 와인을 뽑아 건넸다. 맛을 떠나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기회란 생각에 단숨에 와인을 들이켰다. 양조장을 나와 도착한 숙성고에는 그간 생산한 와인들이 병에 담겨 숙성되고 있었다. 그 웅장한 자태가 그간 여 메이커의 피땀, 눈물을 짐작게 했다. “직접 와서 경험해본 개개인이 모두 홍보대사”라고 생각한다는 여 메이커는 “생산자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소비자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야말로 와이너리 투어의 매력이자 정수”라고 강조했다. 와인이 고급문화라는 편견을 없애고 소비자와 소통할 때 더욱 좋은 와인이 탄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가족 단위로 방문해 포도밭을 구경하고 와인을 시음하는 방문객도 늘어나는 중이다. 포도밭 체험과 양조장 투어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는데, 영동 중심가의 식당에 여포와인농장의 와인을 가져가면 따로 금액을 내지 않는 ‘코르키지 프리’ 특전도 제공한다. 여포와인농장 충청북도 영동군 양강면 유점지촌길 75, 043-744-7702.
영동/백문영 객원기자
moonyoungbai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