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팸 한 덩어리를 샀다. ‘한 캔’도 아니고 한 개도 아니고. 덩어리라는 말이 부피감을 준다. 스팸 ‘중짜’는 그런 무게감이다. 고기는 덩어리가 딱 맞지 않나. 옛날 사냥하던 원시인이 배당받은 고깃덩어리를, 가족이 사는 전세 동굴로 가져갈 때 기분이 들었다. 묵직함, 기대되는 만복감 같은 거. 캔을 열어서 칼로 썰 때의 기대감. 기름이 사악 칼에 묻으면서 찐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있다. 흥분된다. 뱃살에 분명 치명타가 올 것이다. 그래도 유혹을 견딜 수 없다. 스팸(또는 유사한 여러 제품. 여기서는 퉁쳐서 다 스팸이다)이 몸에 좋니 어쩌니, 스팸메일 같은 것이니 하는 얘기는 하지 말자. 굳이 스팸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면 이거다. 요즘 스팸 값이 장난 아니다. “값 좀 내려라!”
스팸은 단독생활자(독신이란 말이 싫어)의 훌륭한 친구다. 그냥 까서 먹어도 되고, 신 김치만 있어도 좋다. 팬을 달구고 구워서 후추만 뿌려도 굿. 케첩이나 마요네즈 간장이나 뭐 그런 조합이면 더 훌륭하다. 몸에 나쁘다고? 더러 한 캔씩 한다고 뭐 엄청난 영향을 주겠습니까. 삼겹살이나 스팸이나 사실 별 차이가 있나.
스팸을 몸에 ‘덜’ 나쁘게 먹자고, 뜨거운 물에 데치는 경우도 있는데, 난 반대다. 씻겨 내려간 게 맛있는 지방이다. 스팸은 사실, 지방 맛이다. 지방에 양념이 엉기고 녹아 있다. 팬에 기름 두르고 살살 지질 때, 스팸의 표면이 반짝거린다. 그게 지방 녹는 장면이다.
홍대 앞에 혼술집이 하나 있었다. 세게 미는 안주가 스팸이었다. 그래서 ‘스팸집’이라고 불렀다. 스팸을 어떻게 주느냐. 스팸을 썰어서 느릿하게 팬에 굽는다. 계란 프라이를 부친다. 접시에 같이 담고, 케첩을 뿌려주는 게 전부였다. 요리랄 것도 없는 이 안주가 꽤 인기였다. 스팸 갖고 뭘 자꾸 만드느니, 그냥 주는 게 낫다, 이런 확신이 있는 주인이었을 것이다.
스팸의 최고 강점 중 하나는, 간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다 되어 있다. 좀 짜긴 짜다. 그래서 나온 게 저염 제품이다. 요리 솜씨 따위, 다 소용없는 멋진 제품 아닌가.
스팸에 김을 싸서 먹기도 한다. 양념 김도, 맨김도 다 좋다. 있는 대로 쓴다. 맨김(전문용어로 전장 무조미 김이라고도 한다)을 가스에 훌훌 구워서 대충 찢은 후 스팸을 싸보라. 거기에 케첩을 찍어보라.
예전 동네에 손님이 줄을 서는 밥집이 있었다. 놀랍게도 늘 스팸 반찬을 내줬다. 버글거리는 동네 아저씨, 근처 작은 회사 사람들이 아주 찍어놓고 이 집을 다녔다. 어느 날 손님이 줄었다. 스팸을 더 이상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슬쩍 물어봤다. 스팸 값이 너무 올랐단다. 고기 값은 다 떨어지는데 왜 스팸은 오를까.
역시 잘나가던 부대찌개집이 있었다. 손님이 확 줄었다. 단골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스팸 맛이 달라졌단다. 식당업자들이 다니는 재료상에 가보면 안다. 가격이 몇 배씩 차이 난다.
재료상 스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부대찌개집에서는 캔에 들어간 제품을 거의 안 쓴다. 얇게 슬라이스 되어 있다. 그냥 ‘부대찌개햄’이라고 해서 5㎏짜리 포장을 판다. 물론 전문점에서는 이런 게 6개씩, 12개씩 포장된 걸 사서 쓴다. 음, 그러니까 한번에 부대찌개햄을 30㎏씩도 산다는 얘기다. 많이 사야 싸니까.
캔에 들어간 게 대체로 맛있고, 비싸다. 브랜드도 많다. 맛 차이가 난다. 큰 캔은 1.8㎏짜리도 있다. 자취꾼들도 돈 아끼려면 이런 ‘대짜’가 좋다. 캔을 열어서 요리해 먹고 남은 건 적당한 크기로 5~6개 분할한다. 비닐봉지로 잘 싸서 냉동한다. 어차피 익힌 것이라 해동해도 맛 차이가 없다.
부대찌개나 스팸김치찌개의 국물 맛은 햄이 만든다. 햄을 반듯하게 썰어 넣는 것보다 숟갈로 푹푹 떠서, 부정형으로 넣는 걸 추천한다. 두꺼운 부분과 얇은 부분이 혀에 닿을 때 맛이 달라진다. 얇은 부위는 지방과 양념이 더 많이 녹아서 국물 맛을 기차게 바꾼다. 입에 들어와서 씹히는 맛도 다르다. 부정형의 다채로운 예각이 식감을 다채롭게 만드는 것이다. 아, 묵은지에 딱 스팸 작은 거 하나 넣고 파나 좀 썰어 넣고 팔팔 끓여 먹고 싶다. 몸에 죄책감 같은 게 들더라도.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