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과거 서구 식민지였던 어느 지역이나 메스티소라 불리는 혼혈이 있다. 세계화가 가속화된 현재는 아무 의미 없는 구분이지만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한 제국주의 시대에는 이를 반드시 구분했다.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경우에는 메스티소, 카스티소, 물라토 등 이름도 다양했고 이 이름은 차별의 낙인 같은 구실을 했지만 동남아는 이와 상황이 달랐다. 중남미는 백인과 현지인의 혼혈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에 비해 동남아는 아시아인끼리의 혼혈이 많았다. 유럽의 제국들이 인도, 동남아를 적은 인원으로 지배했던 탓인지 몰라도 오랜 기간 동남아로 이주한 역사를 지닌 중국인과 동남아 사람들의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다. 따라서 똑같은 식민지의 역사적 경험이 있다고 해도 혼혈인종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동남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싱가포르 아시아문명박물관에 진열된 혼례복. 강희정 제공
현지에서 태어난 혼혈들을 동남아에서는 페라나칸(프라나칸)이라 불렀다. 물론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는 메스티소란 말이 쓰이긴 했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과 원주민의 결합으로 인한 혼혈을 메스티소라 부르는 중남미와 달리 중국인과 현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도 메스티소라 부른다. 그러므로 메스티소와 페라나칸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보아야 한다. 페라나칸 역시 부모의 혈통에 따라 중국계는 페라나칸 치나, 일본계는 페라나칸 제팡이라 부르며 말레이시아에서는 바바뇨냐라고도 한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중남미와는 다른 양상이었음은 분명하다. 또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고수해온 사람들의 융합으로 그들의 문화 역시 자연스럽게 섞였다. 혼례 풍습도 그중 하나다.
서양식 자유주의가 확산되고, 새로운 바람이 불던 1930년대 이전 동남아의 젊은이들은 자유롭게 배우자를 정할 수 없었다. 이미 17세기부터 중국 남성들이 대거 이주했던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혼인적령기에 있는 젊은 남녀를 적절히 맺어줄 매파는 전근대 동남아에서도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혼사를 성공시키려는 매파의 청이 솔깃하게 여겨지면 남자 쪽 집안에서 아가씨 집으로 사람을 보낸다. 아가씨 집에서는 손님을 맞아 빈랑(야자나무과 식물), 즉 베텔을 씹게끔 틈팟 시리(tempat sirih)라는 접대용 그릇을 내놓는다. 한쪽에는 베텔후추 잎인 시리가, 다른 한쪽에는 잘게 썬 베텔넛(빈랑자), 석회, 갬비어, 자바 담배가 담겨 있다. 베텔은 환담을 끌어내는 중요한 접대품이다. 혼담의 주인공인 예비 신부는 예비 신랑 집안사람들에게 차와 다과를 대접한다. 신랑 집안사람들은 직접 신붓감을 살피며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공손한지, 차와 떡을 내놓는 모양이 다소곳한지, 걸음걸이와 옷차림은 또 어떠한지 꼼꼼하게 볼 기회를 갖는다. 말하자면 어른들이 선을 보는 셈이다.
현재는 베텔을 씹는 것이 금지된 나라도 있지만 인도에서 시작된 베텔 씹기는 동남아의 관습이자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말레이시아 관습법에서는 베텔을 씹지 않는 사람이라도 베텔 접대를 받으면, 접대하는 이의 환대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최소한 손대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사실 베텔을 왜 씹는지는 우리 같은 이방인들은 절대 이해 못 한다. 들큼한 맛이 나면 주전부리라고나 하겠지만 베텔 잎에 조개껍데기로 만든 석회를 얹어 쌈처럼 베텔을 싸서 씹는 게 무슨 맛이 있을까? 후추나무과에 속하니 알싸하게 침샘을 자극해서 입안에 침이 고이는 효과는 있겠다. 일각에서는 베텔이 일종의 마약성 최음제 구실을 한다는 말도 있지만 베텔을 씹다 보면 이가 검붉게 물들고, 검어진 치아가 구강 건강에도 좋을 리 없다. 그뿐인가? 씹고 난 찌꺼기를 아무 데나 퉤퉤 뱉으니 길거리 미화 차원에서라도 금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베텔 씹기는 관습이자, 필수적인 선의의 접대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동남아를 식민 지배했던 유럽인들에게도 퍼졌던 문화이니 굉장히 유혹적인 풍습이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 보니 호화찬란한 베텔 그릇들이 만들어졌다. 금은은 물론이고 값비싼 중국 도자기로 베텔을 뱉는 그릇까지 주문해다가 수입했을 정도다. 호사스럽게 차려입은 귀부인들이 질겅질겅 베텔을 씹다가 핑크빛 도자기에 뱉는 모습은 상상이 잘 가지 않지만 말이다.
혼인이 결정되면 예비 신랑이 붉은색 청첩장을 붉은 봉투에 넣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혼례를 알린다. 청첩장을 돌릴 때, 맨손으로 다니면 안 된다. 웨딩 플래너 노릇을 하는 남자 친지가 청첩장과 함께 ‘꿰’(쿠이·쿠에)를 나눠준다. 꿰는 과자의 호키엔(복건) 방언으로 일종의 떡이다. 중국에서 대보름에 먹는 찹쌀떡 탕위안(탕원)이 꿰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청첩장을 돌리는 날은 붉은색과 흰색으로 달곰하게 만든 새알심 같은 꿰를 대접하는 날이다. 붉은 꿰는 복을, 하얀 꿰는 순결을 뜻하고, 단맛은 신랑·신부의 달곰한 결합을 뜻한다. 만일 혼례에 초대할 사람이 여성이면 양가의 신랑·신부 어머니가 청첩과 별개로 이들을 따로 부른다. 어머니들은 여성 친지와 함께 이들의 집을 방문해 한타르 시리(hantar sirih)를 한다. 한타르 시리는 시리를 나른다는 뜻이다. 얇게 썬 베텔넛을 넣어 삼각형으로 싼 베텔후추 잎, 즉 시리를 작은 은제 그릇에 담아 비단 보자기에 싸서 건네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양가의 어머니들이 집집마다 시리를 건네며 따로 초청하는 것이다. 여성 친지들에게 베텔을 주며 초청하는 것은 말레이식이고, 신랑 집안에서 꿰를 돌리는 관습은 중국식 절차에서 비롯됐다.
최소 12일이 걸리는 길고 복잡한 혼례식 전전날에는 약혼식이 열린다. 이날은 혼수를 교환하고 두 집안 어머니와 여자 친척들이 모여서 같이 나시르막(nasi lemak)을 먹는다. 나시르막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먹는 쌀밥이다. 나시는 쌀밥이고, 르막은 기름, 지방을 뜻하는데 원래 코코넛밀크를 넣어 지은 밥이라 좀 더 기름지고 부드러운 까닭에 나시르막이라고 불렀다. 요즘은 보통 쌀밥과 별다를 바도 없지만 원래 나시르막은 잘 짓기가 어렵다. 우리 쌀밥 짓듯 하는 게 아니고, 바나나잎을 깐 나무 찜통에 쌀을 넣고 찐 밥이기 때문이다. 숙련된 솜씨를 지닌 전문가라야 제대로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쌀이 잘 익어야 하고, 쌀알에 코코넛의 풍미가 잘 배어 있게 찌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이 과정을 여러번 반복해야 코코넛 향이 잘 배어든 나시르막을 지을 수 있다. 더욱이 일생의 중요한 혼례를 약속하는 날 여성 친지들이 모여 먹는 밥이니만치 밥 짓는 전문가가 동원된다. 비비 나시르막, 즉 나시르막 아줌마이다. 우리도 예전에 밥모니 찬모니 하는 분들이 있었던 것과 같다.
약혼날 나시르막은 24가지 반찬과 함께 제공된다. 이를 삼발 스룬딩(sambal serunding)이라 이르는데, 신랑과 신부 양가의 여성 친지 대표들이 모여 혼인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의례가 된다. 스룬딩은 말레이어로 협상을 뜻하는 룬딩(runding)에서 왔다. 양가가 혼인을 승인하기로 최종 합의했다는 의미로 신랑 집에서 제공하는 나시르막을 같이 먹는다. 여기에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양념, 삼발이 곁들여진다. 혹시 동남아를 가본 분들은 기억날 것이다. 고추장도 아니고 고추도 아닌, 맵고도 걸쭉한 삼발을. 혼례식에 앞서 양가에서 나시르막을 함께 먹는 특별한 날을 위해 20종이 넘는 다양한 삼발을 만든다. 혼례 절차는 중국식을 많이 따랐지만 세부적으로는 현지 말레이인 관습과 이슬람의 관습이 섞여 있는데 삼발도 그중 하나다. 중국 사람들은 그다지 매운 음식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고추, 마늘, 양파 등을 이용해 만드는 삼발은 현지 음식 문화가 뿌리 깊이 섞였다는 것을 뜻한다.
나시르막만이 아니고 약혼날은 꿰를 잔뜩 만들기도 한다. 어쩐지 우리네 잔칫날 떡과 다식을 만들던 풍경이 떠오른다. 꿰는 주로 말레이계 여성을 지칭하는 뇨냐란 말을 써서 뇨냐 케이크라고도 한다. 우리도 백설기, 가래떡, 증편 등 떡의 종류가 많듯이 꿰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다과 전통에다 말레이의 맛과 재료를 혼합했으니 그 종류는 아주 많다. 거기에 열대과일 파인애플, 바나나에 코코넛까지 현지 재료까지 확장해서 다양한 꿰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파인애플 과자인 꿰 타르를 비롯해 쌀가루에 코코넛밀크와 야자 시럽, 바나나 조각을 넣은 아폼 브르쿠아 등이 다 현지화된 떡이다. 순 쌀이나 찹쌀로 떡을 만드는 우리와 달리 꿰는 녹말과 고구마류인 얌을 섞어 반죽하기도 한다. 그래서 식감은 우리네 떡과 약간 다르다. 신방을 이미 차린 뒤에 약혼으로 양가의 최종 합의를 확인하는 것이라 혼례식은 이를 공식화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말레이시아 국립박물관의 꿰를 만드는 틀. 강희정 제공
붉은 등이 걸렸다. 혼례의 신호다. 대문 앞에 건 붉은 등롱 왼쪽에는 가족의 성을 쓰고, 반대편에는 신화나 민담을 그렸다. 중국식 혼례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혈통만큼이나 복잡한 전통이 뒤섞였다. 처마에 걸어둔 등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잔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신랑 집에서 마련한 나시르막을 나눠 먹고 나면 신부는 녹색 예복으로 갈아입고 신랑 집으로 떠난다. 기쁨 반 슬픔 반으로 얼룩진 이별의 순간을 뒤로하고, 신랑 집에 도착한 신부는 시어른들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큰절을 올린다. 말레이어로 슴바(sembah)라고 한다. 우리나라 전통혼례처럼 주례가 주도하여 혼례 절차가 이뤄지니 그 골격은 중국식으로 보인다. 하지만 혼례식 3일 전에는 말레이 신부가 친구와 친지를 초대하고, 이들이 예비 신랑과 신부의 손가락에 헤나로 다양한 그림을 그리는 헤나 물들이기도 한다. 인도 힌두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슬람 율법에 따른 혼인이 현대식 결혼처럼 보호자, 증인, 혼인반지만 갖추면 그만인데 비이슬람 말레이인들의 혼례는 인도, 중국, 말레이의 문화와 전통을 받아들여 다중적이고 혼종적이었다. 최근 타이 푸껫 등지에서는 이런 페라나칸 전통혼례를 약식으로 치러주는 행사도 한다. 이미 결혼한 사람도 혼례를 다시 치를 수 있어서 나름으로 인기가 있다. 전통 복원이 목적이 아니라 관광이 목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