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지리산>을 도운 실제 레인저들. (왼쪽부터) 서상원, 김효정, 권욱영, 이윤수, 김영준.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현조(주지훈)는 이강(전지현)이 “말끝마다 산이 싫다면서도 왜 계속 레인저를 하는지”가 궁금하다. 이강은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라며 즉답을 피한다. 일곱살 때 처음 천왕봉에 오르고, 아홉살 때 종주를 시작한 어린 시절 사진 속에 답이 있다. “산이 좋아서 못 떠난 거네.”(현조) 좋아하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다. 지리산을 지키는 레인저들의 삶을 보여주는 드라마 <지리산>(티브이엔) 속 현조와 이강은 산을 사랑해서, 산을 지키려고, 그렇게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현실 속 현조와 이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9일 서울 중구 국립공원공단 사무실에서 만난 다섯 레인저도 “그저 산이 좋아서” 산 지킴이로 살고 있다.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 출신인 김효정은 “고등학생 때부터 산악부를 했다. 자연에서 힐링을 많이 했으니 이젠 자연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서 레인저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암벽을 타고 구조하는 일을 전담하는, 북한산에만 있는 특수구조대원이다. 지리산 멸종위기종복원센터 등에서 근무한 이윤수는 2002년 반달곰관리팀에 합류하며 지리산과 인연을 맺었다. “야생동물을 좋아하고 연구하고 싶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생태복원센터 연구원으로 나오는 윤수진(김국희)을 떠올리면 된다. 설악산·대둔산 등 여러 산의 암벽을 타고, 급류 구조, 응급처치법 등 산악안전교육도 하는 김영준, 드라마에 많은 경험담을 제공한 서상원, 드라마 속 조대진(성동일) 같은 존재이자 레인저들의 고참인 권욱영 단장(이하 권욱영)까지. 현실의 이강과 현조들은 “<지리산>으로 레인저라는 직업이 알려진 것이 가장 기쁘다”고 했다.
지리산은 그 자체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티브이엔 제공
드라마에서 지리산은 이야기의 무대이자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산이 배경인 드라마는 1997년 <산>과 1989년 <지리산>이 있었지만, 각각 산악인 집안의 가족사와 6·25 전쟁이 낳은 이념 갈등을 그렸다. 2021년 <지리산>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섬겨왔던 산이다. 오랫동안 신앙의 대상이 됐다는 건 그저 미신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기운이 있다”는 솔(이가섭)의 대사처럼, 지리산 자체가 갖는 특유의 묘한 분위기를 십분 활용했다. 현조에게 사람이 죽기 전의 모습이 보이는 등 극에서 벌어지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게 한다. 드라마는 아예 지리산을 이렇게 규정해버린다.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희망의 땅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한 맺힌 죽음의 땅, 지리산은 이승과 저승의 사이, 그 경계에 있는 땅입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기울기를 바꾸려고 애쓰는 이들이 레인저인 것이다. 전국 국립공원에는 약 2500명의 레인저가 있다. 드라마는 레인저의 인명 구조 활동에 초점을 맞췄지만, 실제로는 순찰, 대피소 시설 관리, 해설, 멸종위기종 복원, 쓰레기 관리 등 국립공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책임진다. 권욱영은 “산을 훼손하는 일은 모두 막고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했다. 외부 업무를 하지 않을 때는 행정 업무도 본다. 1998년 수해사건 이후 레인저들도 특별사법경찰에 포함돼 증거를 조사해 경찰에 고발할 수 있다. 물론 과태료도 부과한다. “탐방객들은 싫어하시지만요.”(김효정)
북한산처럼 암석이 많은 곳은 암벽을 타고 구조하는 특수구조대원이 있지만, 지리산은 흙산이어서 암벽을 타고 내려올 일은 없다. 드라마 1회에서 이강과 동료가 로프를 이용해 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은 극적 장치로 삽입했다. 실제 암벽 장면은 대둔산에서 촬영했다. 김효정과 김영준이 돕고 출연했다. 지리산에는 암벽을 전문으로 타는 특수구조대원은 없지만, 레인저 중에 암벽 구조를 따로 교육받은 이들은 있다. 그러니까 극 중 이강은 교육을 받아서 암벽도 탈 수 있는 지리산 레인저다. “대신 지리산에는 탈진하거나 다치는 이들이 많아 레인저들은 최대한 현장에 가깝게 가 있어야 해요. 주말에는 거점근무 계획표를 짜서 산속에서 사람들이 다니는 주요 거점을 종일 순찰하며 상주하죠. 그래서 업고 내려오는 경우가 많아요.” 이윤수의 말에, 암벽 구조가 정말 힘들겠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2018년 해동분소와 비담대피소는 남원 지리산 흥부골 자연휴양림에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로또가 날아가던 곳, 굿을 하던 곳 등 다른 산에서 촬영한 장면도 있지만, 풍광은 최대한 지리산을 담았다. 2020년 해동분소는 현재 지리산 앞에 있는 뱀사골분소다. 레인저들의 일상은 수기집과 드라마를 위해 따로 모집한 경험담이 바탕이 되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라는 말처럼 지리산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산길을 꿰뚫고 있는 레인저들도 길을 잃을 때가 있다. 이윤수는 “지피에스를 보며 가다가도 같은 자리를 뱅뱅 도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드라마에서는 연쇄살인이지만, 실제로 지리산에는 살인인지 자살인지 원인 모를 주검이 발견된단다. “주로 비법정 탐방로(샛길)에서 발견되죠. 경찰이 올 때까지 주검을 지키면서 기다려야 해요.”(서상원) 김영준은 “처음에는 놀라지만 나중에는 무덤덤해진다. 경찰 기다리면서 말을 걸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만두는 레인저들도 있다”(김영준)니, 지금껏 레인저의 세계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3회에서 나온 내림굿 장면도 실제 비일비재하다. 레인저들은 내림굿을 할 때 가장 골치가 아프다. 서상원은 “못 하게 말리면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고 하고, 권욱영은 “돼지머리를 집어던지며 ‘3대를 멸한다’고도 했다” 한다. 김영준은 “돼지머리도 그대로 두고 가는데, 이 모든 것들이 자연을 훼손한다는 걸 모른다”고 말했다. 이강과 현조가 연구용인 구렁이를 찾으러 건강원에 간 극 중 사건은 서상원이 월악산에서 직접 겪은 일이다. 서상원이 극 중 이강이었던 셈이다. 소나무를 베어 간 사건도 서상원과 동료들이 며칠간 잠복근무까지 하면서 잡아냈다. 이 정도면 레인저는 경찰이나 다름없다.
레인저들은 구조 요청이 들어오면 바로 출동해야 한다. 김영준은 “퇴근했다가도 호우주의보가 내리면 바로 달려가야 한다”고 했다. 극 중에서 이강은 첫사랑을 앞에 두고도 구조하러 산으로 뛰어갔다. 분소에서는 구조 신호가 오면 바로 뛰어갈 수 있게 배낭도 준비돼 있다. 보통 10㎏ 안팎으로 자동심장충격기, 응급처치 세트, 무전기 등이 들어 있다. “하루에 서너번 출동하면 다리가 후들거린다”(김효정)고 할 정도로, 레인저들은 관절이 좋지 않고 근골격계 질환이란 직업병도 갖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보험 들기도 힘들어요.”(권욱영)
등산화만큼은 가장 좋은 것을 사서 신는데, 레인저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나름의 방법이다. 우리가 들떠서 산을 찾는 1월1일은 레인저들한테는 가장 긴장되는 날이다. 사람들을 지키고 산을 보호하느라 일출 한번 맘 편하게 보지 못한다. 권욱영은 “예전에는 주말에 거점근무를 하느라 친구들 결혼식에도 제대로 못 갔다”는데, 그러면서도 이들은 산을 떠나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이강의 마음과 같으니까. “산이 좋아서.”
<지리산>은 레인저들한테 고마운 작품이다. <지리산> 덕분에 탐방객들이 레인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김효정은 “예전에는 저희들과 마주치면 슬쩍 보고 가시곤 했는데, 요즘은 ‘전지현이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드라마의 영향이 엄청나다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서상원은 “탐방객들도 친절하게 대해주니 우리도 더 잘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윤수는 “아이들이 친구들한테 ‘우리 아빠 레인저’라며 자랑하고 다닌다”며 뿌듯해했다. 권욱영은 “전국의 레인저들한테 시청 소감을 받고 있는데, 가족들이 ‘아빠가 이렇게 고생하는지 몰랐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소감이 많았다”고 한다.
시청자들한테도 레인저라는 직업을 제대로 알렸다. “산에서 다친 사람은 무조건 119가 다 구하는 줄 알았다”는 댓글이 많다. 김효정은 “모든 레인저가 이 부분을 가장 고마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발목 골절을 당한 경우 저희가 가서 기본적인 처리를 해놓고 헬기가 오기까지 기다리죠. 그러고 나서 119구조대한테 넘겨줘요. 어느 날은 혼자 내려오는데 허무할 때도 있어요. 저 혼자 오늘 또 한 사람을 도왔다며 자축하곤 하죠. 지금은 그래도 <지리산> 드라마 덕분에 우리가 하는 일을 알아주시니까 기분 좋죠.” 6회를 보면 119 대원들과 레인저들이 협심해서 구조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김영준은 “지리산은 기상이변이 워낙 많아 헬기가 못 뜨는 경우도 잦다. 그러면 한 사람씩 번갈아 구조할 사람을 업고 500m를 뛴다. 119 대원을 만나면 같이 번갈아 뛰기도 한다”며 협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로 죽일 것처럼 감정싸움을 하다가도 출동만 하면 협력은 잘돼요.”(김효정) 산은 보호해야 한다, 사람은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까.
뭐니 뭐니 해도 드라마를 통해 지리산의 매력이 널리 알려진 것은 좋은 일이다. 1회부터 이강과 현조가 조난자를 수색하는 장면에서 천왕봉이 나오는 등 지리산 속 명소가 자주 등장한다. 국립공원 차량이 산길을 질주하는 장면에서 노고단 일대와 지리산 능선의 풍광도 펼쳐진다. 쉽게 볼 수 없는 지리산 이끼폭포를 드라마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것도 값지다. 1회 정구영(오정세)과 이다원(고민시)이 백골 주검을 발견한 개암폭포는 실제로는 지리산 이끼폭포다. 특별보호구역으로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지리산>이 방영되면서 명소와 등산로를 언급한 게시물이 자주 올라오는 등 지리산 자체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권욱영은 “드라마에 나온 등산로 중에는 중산리~제석봉~천왕봉 코스가 가장 무난할 것”이라고 추천했다. 제석봉과 천왕봉까지는 이강이 능선을 따라 걷던 장면에 등장한다.
김효정은 “순찰하다가 저 끝을 바라보면 내 인생에서 언제 이런 시간이 있을까 매일매일 고마운 생각이 든다”고 한다. 권욱영은 과거 힘들었던 경험담을 꺼내며 “이제는 모든 레인저가 사명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드러냈다. 드라마 <지리산>이 큰 힘이 됐다. 문득 이들도 현조처럼 누군가 죽는 신호가 보인다면, 영혼까지 산으로 향할까. 김효정이 대표로 말했다. “당연하죠. 생명을 구조하는 일에 한번 미쳐보는 거죠.”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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