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의 정릉천 모습. 가물지 않은 한여름에는 성인 남성 허리까지 물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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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여행은 행복이 아니라 쾌락에 불과하다”고 했다. 1년 중 한 번 정도 떠나는 장거리 여행에서 비롯되는 감정은 행복이 아니라 쾌락이라는 것. 그렇다면 대형 이벤트가 아닌 경우라면? 오랜 기다림과 큰 비용을 들이는 ‘큰 여행’이 아니라 아주 잠깐의 시간과 적은 비용으로 충분한 ‘작은 여행’을 통해 여행은 일상이 되고 행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졌다.
그런 이유로 1박 2일 여행지로 서울 정릉을 낙점했다. 금요일이었던 지난달 26일 퇴근 뒤 버스를 타고 이른 저녁 정릉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시장의 복닥거림을 뒤로 한 채 두 갈래로 얇게 나뉜 골목에 들어서자, 눈높이 정도의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 좁은 길의 끝, 초록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이너시티’로 숙박부터 대관까지 도시인의 휴식을 책임지는 공간이다. 사실 정릉 여행을 제안한 건 이곳의 최재원 대표였다. 며칠 전 인터뷰이로 만났던 그는 정릉시장을 함께 돌며 이 동네를 소개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정릉시장의 정겨움과 매력에 반해 이 여행을 기획했다.
초록 대문을 열자, 인도네시아 발리를 연상케 하는 향이 가장 먼저 후각을 자극했다. 그리곤 태국 치앙마이에서 매일 아침 찾았던 요가원이 생각나는 거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너시티가 들어선 주택은 일본의 적산가옥과 한옥이 혼합된 건축 양식으로, 약 100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낯선 느낌을 주기 위해 이국적인 인테리어 공간을 꾸몄지만, 천장의 서까래를 드러내 이 집의 정체성도 잊지 않았다.
최재원 대표가 리모델링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제로 웨이스트 공법으로 공사하는 업체와 함께 철거 과정에서 발생한 쓰레기를 최대한 재활용했다. 재사용할 수 있는 자재를 골라 다시 벽을 세웠고 멀쩡한 나무 조각으로는 조명과 작은 소품을 만들었다. 건축주가 집이 천천히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제로 웨이스트 공사의 또다른 장점. 오래오래 함께할 이 집을 깊이 이해하고 잘 관리하는 것도 건축주의 역할이 아닐까. 이런 생각과 실천이 모여 완성된 이너시티에서는 쓰레기를 계속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숙소에 구비된 다회용기에 포장 음식을 담아보고, 여과지 없이 내린 핸드 드립 커피를 즐겼다.
배를 채우기 위해 정릉시장으로 향했다. 정릉천을 따라 이어진 노포 거리가 눈길을 끌었다. 이른바 ‘정릉의 카오산 로드’다. 초여름의 금요일 밤, 인근 대학교 학생들과 주민들로 북적거리는 시장 안쪽을 향했다. 정릉시장의 수많은 매력 중 하나는 시장의 활기를 책임지는 젊은 상인이 많다는 것. 수제 소시지 전문점 도이칠란드박 역시 젊은 사장님이 운영하는 공간이다. 정릉시장 정육점의 신선한 고기로 건강하고 맛있는 가공육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다. 한옥을 개조한 내부, 수제 소시지와 시원한 맥주를 즐길 수 있는 테라스 덕에 동네 주민뿐만 아니라 외지인에게도 인기 있다. 정릉에서 나고 자란 박준영 대표는 이 동네가 다른 한옥마을 못지 않게 서민의 역사와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라고 자부했다. 육즙이 팡팡 터지는 킬바사 소시지와 트러플 소금을 간간이 뿌린 감자칩, 시나몬 가루와 흑설탕이 풍미를 더하는 흑맥주로 정릉의 밤을 밝게 채웠다.
이튿날 아침엔 비가 내렸다. 이너시티 뒤편에 흐르는 정릉천을 걸었다. 정릉천은 북한산에서 시작하는 도심 하천으로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 1급수에만 서식한다는 버들치, 철새로 와서 텃새가 된 청둥오리, 벌을 불러 모으는 식물 호장근 등이 정릉천에 터전을 두고 살아간다. 이 하천에 기대어 사는 건 마을 주민들도 마찬가지. 정릉천을 중심으로 자연환경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생태학적으로 ‘버들치 마을’이라 부르며, 삶의 흔적과 세월이 녹아 있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슬로카페달팽이의 정원. 마을 활동을 기록하면서 건강한 먹거리를 알리는 공간이다.
그 중심에는 천변에 자리한 슬로카페달팽이의 최영미 대표가 있다. 기자 출신인 그는 카페 정원 한 켠에서 자라고 있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와 정릉천에 반해 마을 주민이자 카페 운영자가 되었다. 그가 발행하고 무료로 배포하는 마을 매거진 <비 스토리(B story)>에는 상인들의 이야기부터 정릉천 생태계 기록, 하천과 공존하기 위해 해야 할 실천까지 정릉에 대한 모든 것이 적혀 있다. 최영미 대표는 정릉에 사는 예술가들과 함께 연극·음악회·전시회 등을 열어 마을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는 정릉골(정릉3동 일대)이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돼 곧 고급 빌라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했다. 비싸고 매끈한 빌라가 언제고 시장 안쪽으로 침투할지 모를 일이다. 이를 막기 위해 최영미 대표를 비롯한 버들치 마을 주민들은 역사와 세월이 묻은 마을의 정겨운 모습을 지켜야 마을이 지속 가능하다고 힘주어 외치는 중이다.
나는 이곳에서 이틀 동안 외지인이었지만 같은 주민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도시의 출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영영 이방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외로울 때도 있지만 정릉을 다녀온 후에야 구원처럼 느껴졌다. 이 도시에서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여행자가 될 수 있으니까.
서울 정릉의 지속 가능한 포인트
-슬로카페달팽이에서는 댕유자차와 밀랍떡 와플을 주문해보자. 댕유자는 우리나라 토종 유자, 밀랍떡은 꿀을 내리고 모아둔 밀랍을 이용해 떡을 보관하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음식이다.
-정릉시장 안에서 꼭 한가지 메뉴만 먹어야 한다면 기차순대국을 추천한다. 피 대신 두부와 부추로 채운 순대의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정릉에 얽힌 저마다의 추억을 담은 연극 <정릉사색>이 6월13일부터 18일까지 정릉동 공백공유에서 열린다. 공연 예약은 네이버에서 가능하다.
글·사진 박진명 <피치 바이 매거진> 에디터
※참고 도서 <작은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지속 가능한 여행 매거진을 만든다. 현지에서 만든 음식을 맛보며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하는 여행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