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에는 한때 ‘고대의 조각과 현대의 근육으로 빚어진 남자’라 불린 영국인이 있었다. 1951년 당시 스무살이었던 그는 한 부호의 집에서 고대 크메르 조각상을 보고 전율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캄보디아의 국보급 조각을 각별히 애정하고 수집하는 남자가 됐다. 그를 매료시킨 크메르 조각이 지닌 인체의 완벽함 때문이었을까, 그 남자는 동남아 사람들이 몸만들기에 좋은 체격을 타고났다며 보디빌딩 전도사를 자처했다. 훗날 타이 보디빌딩협회 명예회장과 동남아시아보디빌딩연맹 회장까지 맡았다. 1968년에는 마침내 타이 시민이 된 성공한 사업가이자 크메르 고미술 전문가, 그리고 동남아 보디빌딩의 대부인 더글러스 래치퍼드(1931~2020) 이야기다.
하지만 그의 사망을 접한 미국과 유럽 신문들의 부고 기사는 신랄했다. 크메르 고미술과 보디빌딩을 사랑했던 래치퍼드의 말년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그가 후원한 근육 사랑이 아니라 조각 사랑이 문제였다. 2019년 미국 뉴욕 검찰이 래치퍼드를 문화재 밀반출과 불법거래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그의 고미술 컬렉션은 크메르 고대 조각상이 중심이었다. 타이에서 약품 무역업과 부동산 개발로 거부가 된 그에게 고미술을 수집할 재력은 차고 넘쳤다. 여기에 관해 래치퍼드는 타이의 농부들에게서 구입했을 뿐이고, 캄보디아 내전으로 버려지고 파괴되는 문화재를 보호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보존 상태가 아주 좋은, 높은 수준의 고대 크메르 조각과 보석들을 수집한 경로와 방법은 의심받을 만했다. 래치퍼드는 특히 크메르루주의 ‘킬링 필드’ 시기에 약탈당하고 해외로 빼돌려진 캄보디아의 국보급 유물을 청소기처럼 빨아들였다고 한다.
보디빌더의 대부로 포장한 래치퍼드는 사실 당대 제일의 크메르 문화재 거간꾼이었던 셈이다. 1970년대에 수집한 캄보디아의 문화재들을 자기 컬렉션으로 세탁한 뒤, 미국과 유럽의 유명 미술관·박물관에 팔아넘긴 것이다. 여기에는 문화재 구매의 도덕성이나 국외 반출의 윤리가 확립되지 못했던 당대 사정도 한몫했다. 그의 사후, 래치퍼드의 유산을 상속한 그의 딸이 캄보디아에 무상으로 반환한 조각만 125점에 이른다. 경매 감정 가격으로 환산하면 5천만달러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다가 아니다. 래치퍼드 생전에 영국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에 판매한 문화재가 남아 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비롯한 유명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그가 구매에 개입한 크메르 미술품을 27점 이상 소장하고 있다. 약탈 문화재 반환 여론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들 유명 미술관이 대부분 발뺌하는 가운데, 미국의 덴버미술관만이 크메르 문화재 4점을 캄보디아에 반환하는 결단을 내렸다. 물론 캄보디아 정부의 요구와 미국 언론의 압박에 따른 결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고대 조각과 현대 근육을 동시에 사랑한 남자라던 래치퍼드가 에마 벙커 등의 학자들과 공동으로 출간한 크메르 미술 관련 서적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자충수가 되었다. 점잖은 영국 신사로, 정글 깊이 사원을 누비는 탐험가로, 품격 있는 미술품 애호가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문적인 식견을 내세우고 싶었던 욕심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2008년 캄보디아 왕실이 수여한 모니사라폰 훈장에 만족했더라면 문화재 밀반출 거간꾼으로 부관참시까지 당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동남아 문화재 수난사에서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는 그가 처음이 아니다.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말로(1901~1976)도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캄보디아의 문화재를 탐했다는 데 있다. 1923년 프랑스 고고학조사단을 따라 시엠레아프(시엠립)를 탐사한 말로는 인근 반테아이스레이 사원의 여신상을 본국 골동품상에게 갖다 팔려고 반출하다 프랑스 식민당국에 적발됐다. 사당 입구에 조각된 여신 데바타 부조가 잘 떼어지지 않자 불까지 질렀다. 그의 나이 22살 때의 일이다. 젊은이의 치기라고 보기엔 질이 좋지 않았다. 프놈펜으로 압송된 말로는 상습 도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수감됐지만, 캄보디아에 동행했던 연인 클라라와 그의 재주를 아끼던 이들의 구명운동으로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났다. 이때의 경험을 살린 소설이 <왕도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왕도’는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를 말한다.
도굴 사건은 말로에겐 생애의 분수령이었다. 이전의 말로는 술과 오락을 즐기다 주인 없는 문화재에 손을 댄 제국주의 프랑스의 삼류 왈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프놈펜 감옥에서 겪은 프랑스 식민당국의 처우에 분노하여 철저한 반식민주의자로 돌아섰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반식민 사회변혁운동에 뛰어들어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의 전신인 안남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신문 <결박된 인도차이나>도 창간했다. 드골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까지 지낸 말로가 지닌 도굴꾼과 대문호의 두 얼굴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었을까.
네덜란드가 반환한 인도네시아 반야바라밀보살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캄보디아에서 태어난 최초의 유럽인 조르주 그롤리에(오른쪽). 에스패츠 온라인 캄보디아 갈무리.
동남아시아에서 주인 없는 식민지 문화재의 약탈과 밀반출이 성행했으리라는 것은 미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독립 이후에도 폭력으로 점철된 내전과 정쟁으로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이뤄진 밀반출 역시 막대했다. 하지만 말로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인도차이나 문화재가 보호를 받았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문화재에 관한 식민주의의 두 얼굴이다. 앙드레 말로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말로와 다른 두 얼굴의 남자가 있다. 캄보디아에서 태어난 최초의 유럽인이라고 알려진 조르주 그롤리에(1887~1945)다. 말로를 좀도둑이라고 격렬히 비난하며 체포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롤리에는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누구보다도 캄보디아 문화를 사랑했다. 크메르어에 능통했고 〈앙코르의 그림자: 고대 캄보디아 미지의 사원에 대한 인상〉이란 애정 가득한 책도 썼다. 캄보디아 국립박물관을 세우고, 캄보디아 예술학교를 창설했으며, 제국의 왈패에게 파괴될 위험에 처한 캄보디아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일본군정기에 끝까지 캄보디아에 남아 있다가 반일세력으로 의심받아 일본군 헌병의 고문으로 사망했다. 캄보디아를 식민지배한 프랑스인이자 캄보디아 문화재 지킴이였던 프랑스인이 그롤리에의 두 얼굴이었다. 제국과 식민,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에 기반을 둔 식민 담론으론 설명하기도, 재단하기도 힘든 인물이다. 캄보디아에서 태어나고, 캄보디아에서 죽은 그롤리에를 제국의 아들로 볼 수 있을까? 식민주의의 거대 서사, 혹은 담론에서 개인은 소거된다. 양가성을 지닌 식민지 공간은 항상 변화하는 혼종적인 상태라는 호미 바바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캄보디아 문화재를 둘러싼 말로와 그롤리에, 이 두 프랑스인의 상반된 태도는 오늘날 유랑하는 캄보디아 문화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캄보디아는 프랑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제국주의 시대에 밀반출된 문화재를 돌려받고 있다. 근대 이래 약소국가로서 영토와 문화재를 지키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이지만 캄보디아 정부와 국민의 지속적인 노력, 문화재 반환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과 위니드루아 협약(UNIDROIT·1995년 제정) 같은 기본 원칙들이 문화재 반환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프놈펜 국립박물관은 래치퍼드의 소장품과 최근 반환받은 문화재를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캄보디아만이 아니다. 오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도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점령지를 확장해가면서 각 지역을 지배하던 술탄에게 받은 선물이나 양도품, 때로는 약탈한 전리품들을 대거 네덜란드로 실어갔다. 그중에는 보로부두르 사원이 있는 자바의 고대 신전이나 사원에 안치됐던 조각을 포함해 상당한 유물들이 약탈에 준하는 방식으로 반출되었다. 고향에서는 신으로 모셔졌지만 타향 네덜란드에서는 미술품으로 전시되는 운명에 처한 문화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인 반야바라밀보살상도 귀환 문화재다. 고혹적인 자태로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이 보살상은 1978년에 반환되었다. 1820년에 가져갔으니 150여년 만의 귀향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3세기 자바 사람들이 추구한 이상적인 미를 보여주는 이 반야바라밀상이 당시 동부 자바에 있던 마자파힛 왕국의 첫번째 왕비 가야트리 라자파트니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보살상을 돌려받았을 때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감정은 남달랐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반대가 심했지만 문화재 반환을 통해 자신들의 도덕적, 문화적 우위를 드러내려 했던 네덜란드 외교부는 마침 중도좌파 연합 정권의 탄생을 계기로 반환을 실행에 옮겼다. 네덜란드 당국은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도로 반환했지만, 반환이 경제적 이해를 노린 신식민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 또한 문화재 반환의 두 얼굴이다. 그런데도 무단반출 문화재 반환을 통해 원산국과 소장국의 상호 협력과 이해의 길을 넓힐 수 있음은 분명하다.
캄보디아 반테아이스레이 사원의 데바타 여신상. 강희정 제공
타이는 서구 식민지가 아니었지만 동남아의 숙명 같은 문화재 도굴과 반출을 피해갈 수 없었다.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한 지리적 환경이 타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근대에 그어진 국경선은 주민들의 왕래를 막지 못했다. 시장 거래가 어려웠던 각국의 도굴, 약탈 문화재가 타이를 통해 빠져나가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타이 유물의 밀반출도 빈번했다. 타이 정부는 2018년 770점에 이르는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 저명 미술관의 환수 대상 유물 목록을 만들고, 이들이 불법 반출됐다는 증거를 제시하며 반출 문화재 환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간 반출 문화재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해온 타이의 변화는 당시 문화부 장관 위라 롯포짜나랏의 강력한 환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잦은 정쟁과 공권력 미비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동남아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유럽, 미국, 일본으로 팔려나갔다. 제국과 식민지, 부국과 빈국의 위계에서 벗어난 동남아 여러 나라는 적극적으로 자국의 문화재를 반환하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가나 시민단체가 양심적인 외국 인사들과 연대하여 문화재 귀향을 추진하는 가운데 서서히 그 성과가 드러나는 중이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국력이 약해서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