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 할머니의 집. 우리 남매는 할머니의 장롱 속을 그렇게나 좋아했다. 전명희 제공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90년대만 해도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보다는 2대가 한집에 사는 핵가족이 좀 더 일반적인 가족 형태였다. 그런 시절에 우리 집은 한 지붕 아래 4대가 모여 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나름 특별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 같다. 살던 곳이 아파트여서 한 지붕 아래란 표현이 딱히 틀린 건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면 201호에 증조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202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셨다. 한 층에 똑같은 구조의 집 두 채가 나란히 붙어 있는 계단식 아파트라, 201호에서 202호로 건너가는 데는 1초가 채 걸리지 않았고 신발도 필요 없었다.
평일 저녁과 주말 두 끼는 항상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했는데, 평소에도 오빠와 나는 할아버지·할머니 댁을 내 집 드나들 듯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우리에게 202호의 현관문은 여느 방문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5층짜리 건물 여러 동으로 이루어진 작은 아파트단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보낸 나는 ‘유년 시절의 집’이라고 하면 강렬하게 혹은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세월의 더께도 지우지 못한 그런 기억의 편린들이 있다.
50년 된 구옥을 리모델링한 강릉 주택. 전명희 제공
추억팔이를 하려고 어릴 적 이야기를 소환한 건 아니다. ‘유년 시절의 집’에 대해 떠올리는 건 단순히 추억을 회상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정서, 감정, 성향, 취향 등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한 활동이다. 추억 속에는 그런 단서들이 녹아 있다. 누구에게나 유독 특별한 기억을 자아내는 집이 있다. 궁궐같이 화려하거나 근사한 집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건지 곰곰이 되새겨보면, 현재의 내가 살고 싶은 집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어릴 적 살던 집에서 가장 좋아했던 공간을 떠올려보자. 우리 남매는 할머니의 장롱 속을 그렇게나 좋아했다. 색동옷을 입은 두툼한 요와 이불이 산처럼 높이 쌓인 어둑한 장롱 속은 어린아이들에게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재미난 놀이터였다. 저녁 식사 후 가족이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리면 개구쟁이 남매는 <잭과 콩나무>의 잭으로 빙의해 콩나무를 타듯 아슬아슬하게 장롱 속 이불 위로 올랐다. 정상에서 희열 비스름한 감정을 잠시 느끼고는 이내 푹신한 이불 위에서 단잠에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 때문인지 모든 생물의 본능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침실에서만큼은 구석진 틈에 있을 때처럼 심리적으로 안정감과 평온함을 느끼길 원한다. 만약 내가 살 집의 침실을 설계할 수 있다면, 천장 높이를 낮추고 더블 크기의 침대와 약간의 통로를 확보한 정도의 면적으로 만들 거다. 창이 없으면 아쉬울 테니 하늘을 볼 수 있는 가로 띠창 하나 정도는 두고 말이다.
내가 할아버지·할머니 댁에서 좋아했던 공간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화장실이다. 우리 집과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구조였는데도 이상하게 할머니 댁 화장실에서 목욕하는 게 더 좋았다. 뭔가 더 깨끗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호텔 욕실 같은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두루마리 휴지만 있었던 우리 집 화장실과 달리 할머니의 화장실 변기 뚜껑 위엔 항상 크리넥스 화장지가 따로 놓여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참 멋져 보였다. 언제부터 시작된 습관일까. 나는 건물 답사를 가면 화장실을 꼭 둘러본다. 화장실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살펴보고 감히 그 건물이 잘 지은 건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곤 한다. 필요한 것들이 기능적으로 잘 갖춰져 있으면서도 머무르고 싶은 느낌을 주는 화장실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화장실 모습이다.
내가 살던 1동 바로 뒤편에 작은 언덕을 가진 녹지 공간이 있었는데, 겨울에는 그 언덕에서 친구들과 썰매를 탔다. 전명희 제공
이번에는 ‘기억의 집’에서 갖고 오고 싶은 공간이나 분위기, 물건 등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가능하다면 어린 시절 살았던 저층 아파트의 주거 공간을 그대로 가져오고 싶다. 내가 살던 1동 바로 뒤편에 낮은 언덕을 낀 녹지 공간이 있었는데, 겨울에는 그 언덕에서 친구들과 썰매를 탔고, 날이 좋은 주말 저녁이면 2층이었던 우리 집에서 전선을 끌어다 불을 밝혀가며 동네 사람들과 고기를 구워 먹었다. 또 1층 화단에서 누구야 하고 이름을 부르면 친구가 화답하듯 모습을 나타냈고, 숟가락 숫자까지는 아니지만 옆 동, 앞 동 사람들끼리 서로 잘 알아서 굳이 내가 뉘 집 자식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아파트는 엘리베이터만 타도 어색한 침묵에 숨이 턱 막힌다.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은 많아졌는데 심리적 공간은 더 줄어든 느낌이다. 커뮤니티의 측면에서 보면 유년 시절의 5층 아파트는 명칭만 아파트지 지금의 고층 아파트와는 또 다른 주거 형태였던 것 같다. 여러 이유로 주거 환경이 점점 고층화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5층 이하의 저층 아파트 단지가 줄지 않고 더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저층 주거 단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소개하는 일을 하고 싶다. 그 누가 알겠는가. 곧 저층 아파트 단지가 뉴트로 주거 공간으로 사랑받는 시대가 도래하게 될지.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기억을 조금 더 생생하게 잡아두고 싶다면, 정확하지 않아도 좋으니 종이에 어릴 때 살던 집의 구조나 동네 지도를 그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며 가족들 혹은 친구들과 집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나가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고, 더 풍부한 체험을 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 느낌과 체험이 우리 삶의 의미를 더욱 깊어지게 할 거라 확신한다. 자, 이제 우리의 의식 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기억이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해보자.
전명희 별집 대표
지은 지 43년 된 성수동1가의 신성연립. 전명희 제공
지은 지 50년 된 행촌동의 대성맨션 계단실. 전명희 제공
지은 지 50년 된 행촌동의 대성맨션 소화전함. 전명희 제공
지은 지 50년 된 행촌동의 대성맨션 옥상. 전명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