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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달걀은, 프라이보다 장조림이지!

등록 2021-12-31 10:48수정 2021-12-31 11:01

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
흔한 달걀프라이보다
장조림이 최고의 안주
한개면 소주 반병 뚝딱
달걀 장조림. 게티이미지뱅크
달걀 장조림. 게티이미지뱅크

한때 제일 이해할 수 없던 일이 짜장면 보통 시키는 애들이었다. 보통이라니. 왕곱빼기도 아니고 보통이라니. 곱빼기는 1.5배 정도이고, 왕곱빼기는 1.8배나 2배를 줬다. 오직 양이 모자라 쩔쩔매던 청춘들에게 제일 좋은 선택이었다. 그 옛날에는 볶음밥, 잡채밥, 짬뽕, 우동도 다 곱빼기 시키는 사람이 많았다. 기스면은 아니었다. 얇고 우아한 면발, 맑은 듯 시원한 국물의 기스면은 양보다 품위였다. 언젠가 한여름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마른 체구의 아저씨가 기스면을 작은 소리로 호록, 호록 드시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박혀 있다. 그것은 후에 면을 우아하게 먹는 장면의 상징이 되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먹어야지. 정작 어른이 되고 나서는 기스면이 중국집에서 없어졌다.

중국집 짜장면 왕곱빼기는, 목에 수건을 두른 시장 지게꾼 아저씨들, 아니면 그런 비슷한 노동을 하던 아저씨들과 나란히 앉아 먹었다. 하기야 30년, 40년 전 노동하는 이들은 씨름 선수처럼 먹었다. 그만큼 열량을 써야 일이 끝났으니까. 난 키가 컸다. 덩치도 좀 됐다. 군대에서 사역을 불려 나가도 두 짐을 졌다. 한번은 한포에 40㎏ 표준 정부미를 나르는데, 쌀 담당이 불러세웠다.

“야, 넌 두포씩 해라. 덩치도 큰 놈이 말이야.”

80㎏의 쌀을 지고 트럭에서 창고로 수십번 왕복했다. 내가 일찍 디스크를 앓게 된 건, 그러므로 정부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릎의 퇴행성 관절염도, 인대 손상도 말이지. 책임져라, 박정희! (그는 통일벼 개발 당시 대통령이다.)

밥도 나는 곱빼기로 먹었다. 좋아하는 달걀도 그랬다. 다른 건 곱빼기가 있어도 달걀은 곱빼기가 없었다. 달걀 두개를 달라고 하면 “그 비싼 달걀을!” 하는 소리가 나오기 딱 좋았다. 분식집 달걀 라면도 한알의 3분의 1이나 풀까 말까 했다. 소년이었던 우리는 그걸 ‘참새알 라면’이라 불렀다. 참새 알만큼 달걀이 조금 들었다는 뜻이었다. 현재 기록을 보면 1970년대에 이미 양계가 크게 성행했다고 하는데, 달걀값은 절대 싸지 않았다. 달걀판을 머리에 이고 동네 방문판매를 하는 아주머니는 한번에 열개 넘게 파는 적이 없었다. 아직 동네 가게에 몇개씩 짚으로 엮은 달걀이 팔리던 시절이었다.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앉은자리에서 달걀 두개를 먹을 수 있었다. 살림도 나아졌고, 아마도 양계산업도 커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달걀을 한판 들여놓고 작은 냉장고에 차곡차곡 채우면서 흐뭇해했다. 달걀 보관 칸은 스무개가 한계였다. 동네 사람들 들으라는 듯 어머니는 소리쳤다.

“아니, 달걀을 스무개밖에 못 넣게 냉장고를 만들면 어쩌란 걸까.”

집에서 라면을 끓이면 달걀 두개를 시차를 두고 넣었다. 하나는 완숙으로, 하나는 반숙으로, 냄비 뚜껑을 덮었다 열었다 하며 익힘을 조절했다. 그때 이미 요리사가 될 조짐이 있었나 보다. 프라이도 최소 두개였다. 최근의 일인데, 어떤 식당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

“달걀프라이 해드립니다. 무료.”

난 그 식당이 동네에 있었으면 매일 다니고 있을 것이다. 달걀프라이는 비싸서 그런 게 아니라, 바빠서 못 부친다. 손님이 띄엄띄엄 오는 대폿집에서나 나는 프라이 호사를 누리려고 든다. 프라이 두개를 부쳐주신다. 한쪽에는 케첩을 뿌리고 다른 쪽은 소금 맛으로 순수(?)하게 먹는다. 막 부쳤을 때는 뜨겁고 보드랍고 껍질은 바삭하다. 더러 왕소금이 씹힐 때가 있는데, 그건 그것대로 프라이의 맛을 올려준다. 식으면 식은 대로 최고다. 껍질은 질깃하고, 노른자는 굳어서 씹는 맛이 생긴다.

솔직히, 식은 프라이는 맛이 없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달걀이니까.

프라이는 언제든 요리할 수 있으므로 좋아하는데, 사실 달걀장조림이 최고봉의 안주가 아닐까. 안주가 하나도 없을 때, 달걀장조림 한개가 있으면 남은 소주 반병을 처치하는 데 무리 없다. 맥주라면 두병도 마실 수 있다. 달걀장조림을 만들면 흰자와 노른자의 경계선 가까이 간장이 파고든다. 노른자까지 간장이 들어가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달콤하고 쿰쿰한 간장을 흠뻑 빨아들인 흰자를 먼저 먹다가 소주 한잔 마시고는 노른자를 툭 친다. 완숙으로 익은 달걀은 부서져서 간장 양념에 우수수 쏟아진다. 간장을 흠뻑 적신다. 작은 숟가락으로 뜬다. 간이 깊게 배고, 노른자의 고소한 맛이 밀도 있게 퍼진다. 나이가 들면 달걀은 하루 허용량(?)이 두개라는데, 나는 세개도, 네개도 먹는다.

달걀장조림처럼 만들기 쉬운 안주도 드물다. 먼저 진간장과 청주를 끓인다. (소주나 맥주를 넣어도 좋고 물론 안 넣어도 된다.) 오래 끓일 필요 없다. 끓고 5~6분이면 족하다. 설탕을 약간 넣어서 녹인다. 소금을 치면 더 간간하게 만들 수 있다. 물을 조금 부어서 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게 전부다. 식혀서 삶은 달걀을 잠기게 넣고 냉장하면 다음날부터 먹을 수 있다.

좀 복잡한 방법도 있다. 삶은 달걀 열개라면 간장이 한컵, 물 한컵, 월계수잎 한장, 고수씨 간 것도 반의반 찻술, 통후추를 조금 넣고 끓인다. 설탕 한큰술로 마무리한 뒤 달걀을 넣어 맛을 들이면 된다. 카레를 한큰술 넣고 끓여서 색다른 맛을 낼 수도 있다. 달걀장조림은 다섯살짜리도 할 수 있는데, 맛은 미슐랭 셰프급이 되는 신비한 음식이다. 달걀의 미덕이 아닐까 싶다.

아내가 달걀을 한판 사 왔는데 냉장고에 넣을 공간이 모자란다. 그렇다. 장조림을 만들 기회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왜 오랫동안 냉장고 설계자는 달걀 한판을 다 넣을 수 있는 냉장고는 만들지 않았는지. 그는 달걀장조림 애호가였을 것이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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