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이촌동 생선씨. 실소를 자아내는 네이밍도 재미있지만 스타일리시하게 해산물을 다루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임지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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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는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녀본 적이 없다. 지금처럼 공간에 대해 글을 쓸 것이라곤 생각 못할 정도로, 살던 도시를 벗어난 적도 많지 않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대구에 유명한 바닷가는 어딘지 대학 친구에게 물어볼 정도였다.(알다시피 대구에는 바다가 없다.) 20대에 들어와서는 그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아주 신발이 닳도록 여행을 다녔다. 큰 도시부터 작은 도시까지. 그렇게 지방 소도시에 가면 의식처럼 하는 나만의 습관이 있다. 동네 슈퍼에 가서 지역 막걸리와 지역 특산물을 사는 거다. 지역술, 특히 막걸리는 좀처럼 전국 유통이 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어디서도 사 먹기 어려운 막걸리를 딱 그 동네 슈퍼에서만 살 수 있게 된다. 인스타그램에 이 술과 안주를 올리는 날엔 디엠(DM·개인 메시지)이 쏟아진다. 무슨 맛인지, 어디서 났는지, 어떻게 샀는지. 희소성과 화제성이 있다. 나만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판이 깔린다. 각자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은 지역 브랜드들이 모여 있는 곳, 이제는 서울에서도 이처럼 개성 있는 ‘우리 동네 슈퍼’가 조용히 주목을 받고 있다. 요즘 로컬 힙스터들은 이곳으로 간다.
이촌동 생선씨. 생선을 구워 팔기도 한다. 임지선 제공
그로서리 스토어(Grocery Store). 최근 들어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잡화점을 의미하는 그로서리 스토어는 농수산물부터 간단한 공산품, 생활잡화를 취급하는 곳으로, 쉽게 말하자면 우리 동네 슈퍼다. 그로서리 스토어의 특별함은 브랜드 큐레이션과 로컬 라이프스타일에 있다. 처음 보는 신생 브랜드, 현지에서 바로 올라오는 로컬 식자재 등 늘 어제와 다른 오늘의 무언가 있다. 잡화점마다 가진 서로 다른 큐레이션 스타일은 내가 사는 동네의 개성을 말해주곤 한다. 대형 유통사가 아닌 직거래 유통 방식의 유행도 이를 가속화했다. 확연히 뚜렷해지고 있는 브랜드 취향의 다양화는 이처럼 ‘남과 같은 것’을 아는 것보다 ‘남이 모르는 것’을 아는 데에 집중한다.
흠마켓(hmm market)은 해방촌 좁은 언덕에 위치한 그로서리 스토어이자 카페로, “못생긴 게 흠인가요?”라고 우리에게 물으며 ‘흠’ 있는 농산물을 판다. 벌써부터 스토리가 흥미롭다. 들어가면서부터 마주하는 나무 바구니 안 농산물, 무심하지만 멋스러운 네임태그, 이를 활용한 메뉴 리스트가 예사롭지 않다. 필터 커피 하나와 비건 샌드위치를 시키고 가게를 둘러보면 공간의 디자인 또한 어딘가 힙하다. 무심한 듯 시크한 돌 테이블, 각자 다른 의자와 스툴, 천장까지 자라고 있는 식물들, 초록색 두루마리 화장지까지. 흠마켓은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판매가 어렵거나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채소를 소개하고 그 채소로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는 푸드 리퍼브 마켓으로 의미 있는 가치 소비를 하면서도 반려동물과 같이 들어올 수 있거나, 비건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등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충분히 배려받게 된다.
생선씨는 이촌동의 생선가게다. 매일 삼천포에서 조업해 올라오는 해산물을 손질해 진공포장한 뒤 판다. 실소를 자아내는 네이밍도 재미있지만 스타일리시하게 해산물을 다루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백합탕, 감바스 등 와인과 어울릴 법한 밀키트를 만들고, 와인과 치즈, 후토마키(두꺼운 일본식 김밥)와 생굴을 옆 칸에서 판다. 생선을 사면 바로 구워주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두 평 남짓한 공간에 싱싱한 에너지와 신선한 볼거리가 밀도 있게 차 있다. 여의도 유명 일식당 ‘쿠마’와 협업한 1인 모둠 숙성회, 초밥이 멋스럽게 진열되어 있고, 국물을 낼 수 있는 멸치나 작은 건해산물도 마치 과자처럼 포장되어 있다. 해산물은 어쩐지 멋지고 힙한 것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여겼는데, 오늘 저녁엔 어렵게만 느껴지던 생선요리도 도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해방촌 흠마켓의 커피와 샌드위치. 임지선 제공
해방촌 흠마켓. 나무 바구니 안 농산물, 무심하지만 멋스러운 네임태그, 이를 활용한 메뉴 리스트가 예사롭지 않다. 임지선 제공
“없는 것 빼고 다 있다”가 아니라 “없는 것들만 있다”. 요즘의 그로서리 스토어를 표현하기엔 이 말이 더 적절하겠다. 공산품, 대형 제조사에서 일괄적으로 생산된 제품, 대기업의 브랜드 상품은 없다. 대신 대형마트에서 만나볼 수 있는 안전한 선택을 떠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지역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은 브랜드, 특이하고 개성 있는 나만 아는 브랜드, 문자 그대로 신선한 브랜드들이 모여 ‘우리 동네 슈퍼’가 된 것이다. 식자재 쇼핑까지 남과 차별화를 두고 싶어하는 엠제트(MZ) 세대에게 작고(Small) 지역적인(Local) 그로서리 스토어가 인기를 끄는 까닭이다.
임지선 브랜드 디렉터
*리퍼브: 판매장에 전시되었거나 반품한 것을 다시 손질하여 정품보다 싸게 파는 일, 또는 상품. 리퍼비시(refurbish)의 줄임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