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영화에서 멋진 주인공이 바에 들어선다. 한 무리의 험상궂은 왈패들이 그를 노려본다. 바 너머 주인은 눈치를 보느라 허둥댄다. 우리의 주인공, 낮은 목소리로 주문한다. “위스키 한 잔.”
샷잔을 털어넣는 장면 뒤에 안주 먹는 모습이 나오는 법이 없다. 서양 사람에게 위스키는 식후주라 대개 안주가 없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바에서도 독주를 마실 때 대부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천생 술꾼이 못 되는지 안주가 없으면 술을 못 마신다. 요즘 인기 있는 몰트바니 칵테일바니 하는 곳도 안주를 잘 구비한다. 코스트코 같은 곳에서 대낮에 장 볼 때 다른 사람들 카트를 보면 직업이 대충 나온다. 견과류와 치즈, 육포 같은 걸 잔뜩 사면 대개 카페나 바 사장님이다. 옛날에는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그런 안주를 샀다. 미군부대 유출품이 많았다. 이제는 온라인이나 대형할인점에서 장을 본다. 몰트바에서 한잔 마시는 선수들은 대부분 그냥 술만 시킨다. 안주는 보통 딸려 나온다. 그래서 술값이 비싼지도 모르겠다. 단골이 중요한 장사라 술만 시킨다고 안주를 안 낼 수 없다. 기본 한 잔에는 간단한 견과류, 추가 주문이 나오면 육포며 진귀한 과자며 올리브와 살라미들, 과일과 치즈가 곁들여진다. 그 귀하다는 샤인 머스캣과 겨울 멜론을 내는 집도 있다. 술값 센 집이겠지. 그래도 치즈 안주가 인기가 제일 좋은 것 같다. 독주에는 기름진 안주가 잘 어울린다. 짠맛이 술을 부른다.
옛날에 서울 청담동에서 요리사 노릇 할 때 일이다. 와인 붐이 일어서 난리가 났다. 문제는 한국인의 특징. 안주 없이는 술 안 마신다! 순대볶음과 떡볶이 내는 집도 생겼다. 그래도 기본은 치즈다. 좋은 치즈도 별로 없었고, 비쌌다. 요새 치즈가 그 옛날, 그러니까 20년도 넘은 그 시절보다 더 싸졌다. 더 많이 소비하고, 관세 인하 효과가 생겨서 그럴 것이다. 와인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지 오래고, 치즈가 대중음식이 되었는데 좋은 치즈는 여전히 많이 팔리지 않는다. 프로세스치즈라고, 입에 맞게 적절히 조절된 공장 생산 치즈가 대세다. 훈제 안 한 것도 훈제치즈라고 팔리고, 오리지널 치즈 흉내만 낸 유사품이 훨씬 많이 돌아다닌다. 카망베르나 브리(두 치즈는 형제다)도 진품보다 카피 제품이 더 많다. 제대로 된 건 숙성해서 먹으면 참 맛있다. 녹아서 줄줄 흐를 때까지 숙성하면 기막히다.
문제는 치즈는 유제품이라 법적으로 당연히 냉장 보관해야 한다는 점이다. 온도가 너무 낮아서 숙성이 잘 안된다. 온도가 냉장고보다 높은 와인 저장고에서 숙성하면 괜찮은데, 이게 법으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카망베르 하나를 사서 라벨을 보니 0~8도 사이 냉장고에서 보관하라고 되어 있다. 정부 규정일 거다. 어쨌든 라벨에 지시된 걸 지켜라. 가능한 한 유통기한까지 버텨라. 치즈 맛이 더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 부드러워지고 풍미가 강해진다. 고르곤졸라 같은 것도 그렇다. 법 규정대로 가열 처리된 치즈라 숙성해봐야 차이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해보면 대개는 숙성이 올라온다. 최소한 풍미는 크게 나아지지 않더라도 부드러워진다. 입안에서 녹는 밀도가 좋아진다. 시중에서 파는 카망베르 하나 사서 씹어보라. 마치 마분지 씹는 것 같은 제품도 많다. 저가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익지’ 않아서 그런 거다. 뭐 여기까지.
80년대의 일이다. ‘박통’이 시바스 리갈을 마셨다고 알려지면서 전국의 도깨비시장에서는 물건이 없다고 난리가 났다. 그 전에는 조니워커 블랙라벨이 최고였지만 자리를 내줬다. 알다시피 한국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전세계 고가 위스키의 격전장이 됐다. 한국 수출 전용 제품도 나왔다. 초빅히트작 밸런타인은 한국이 최대 소비처이기도 했다고 한다(룸살롱이 한몫했을 거다). 외국여행과 출장이 흔해지면서 면세품으로 많이 사 왔다. 선물용으로 압도적인 인기였다. 싱글몰트의 인기는 몇 해 전부터다. ‘선수’들끼리 구하기 쉬운 글렌피딕을 마시던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이름도 모르는 스카치와 아이리시 싱글몰트가 팔리는 시대다. 하여튼 그렇다는 얘기다. 양주를 잘 마시지 않지만, 간혹 마실 때는 값싼 버번이 좋다. 싸구려 버터 맛이 확 올라오는 제품이 ‘땡긴’다. 혹시 버터 스카치라는 사탕 좋아하시는지. 버번에는 이 사탕을 안주로 마시면 꽤 어울린다. 옛날식 땅콩 캐러멜도 잘 맞는다.
술을 한 모금 입에 물고 넘기고 그 여운이 끝날 즈음 버터 스카치 사탕이나 땅콩 캐러멜 한 알을 입에 넣어 녹인다. 세상에서 제일 싸고 간편한 안주다. 술이 시원찮을수록 빛난다. 고급주에는 먹지 마시길. 술맛 버린다. 여기서 비장의 안주. 버터로 안주를 하는 거다. 외국에 이런 게 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내가 발명한 거다. 일회용 평범한 버터를 준비한다. 냉동고에 얼려둔다. 포장지 떼고 버터만 꺼내서 내열 접시에 올린다. 흑설탕이나 황설탕, 그것도 없으면 백설탕을 한 스푼 떠서 버터 위에 뿌린다. 토치로 지진다. 일종의 ‘크렘 브륄레’ 기법이다. 버터가 녹지 않느냐고. 천만에. 얼린 것이라 견딘다. 그걸 다시 냉장실에 넣어서 식힌다. 불에 지져서 녹은 설탕이 굳을 정도로 10분 이상 넣어두면 된다. 위스키 한 잔에 한 입 베어 먹는다. 기막히다. 같은 방법으로 카망베르치즈 위에 얹어도 된다. 불에 지진 다음 냉장고에 두었다가 먹는다. 치즈는 흔히 꿀을 뿌려 먹기도 하는데, 단맛과 짠 치즈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슈퍼에서 파는 흔한 체더치즈에 해도 되느냐고? 물론 된다. 체더치즈를 냉동실에 넣어 살짝 얼린다. 설탕을 대충 두껍게 뿌린다. 토치로 지진다. 냉장고에서 식힌다. 누가 먹어보더니 뽑기 맛이라고 하더라. 근데 정말 맛있다. 보증한다. 설탕 크러스트가 바삭하게 부서지면서 단짠과 알코올 기운이 함께 어우러진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