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양한 프리미엄 막걸리가 출시돼 젊은층 사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지금은 막걸리 시대.’
막걸리가 변하고 있다. 과거 중장년 남성 위주로 선호하던 술에서, 이제는 엠제트(MZ) 세대 사이에선 없어서 못 먹는 술이 됐다. 2000년대 중후반 한때 일본에서 시작된 막걸리 열풍이 한국에 불어닥친 적이 있다. 잠깐 대박을 친 막걸리는 곧바로 인기가 시들해졌다. 다양한 제품군이 개발되지 않아 소비자를 유인할 매력이 부족했던 것. 그나마 고사 직전이었던 지역 양조장이 살아난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시장에서 인기 있는 술은 아니었다.
몇년 전부터 양상이 바뀌었다. 막걸리 시장에 뛰어든 젊은 창업자들은 서울막걸리로 대변되던 천편일률적인 막걸리에서 탈피해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막걸리를 내놓고 있다. 지금 가장 젊은 술이 막걸리라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포장지만 봐도 ‘이게 막걸리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막걸리가 주류 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또 어떤 매력이 있을까.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 막걸리를 만드는 수강생들. 백문영 객원기자
의류 회사에 다니는 배수현(29)씨의 요즘 취미는 ‘막걸리 수집’이다. 마트에서 살 수 있는 그저 그런 흔한 막걸리가 아닌, 에스엔에스(SNS)에서 예약을 통해 살 수 있는 ‘한정판 막걸리’부터 다양한 부재료를 넣은 프리미엄 막걸리까지, 고르고 골라 구매해 한잔씩 마시는 것이 요즘의 낙이다. 배씨는 “예전엔 맛이 다양하지 않고 아저씨 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최근엔 포장도 예쁘고 맛도 다양해져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먹은 다음날 머리가 아프지도 않고 좋은 술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실제 막걸리는 시장에서 점차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한국가양주연구소에 따르면 2020년 막걸리 생산량은 37만9992㎘다. 2011년 45만8198㎘로 정점을 찍은 뒤 지속해서 감소 추세였으나 2019년 소비량 37만500㎘보다 9400㎘ 늘면서 반전에 성공했다.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추세를 돌렸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막걸리는 단순한 술이라기보다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됐다. ‘백 스피릿’ ‘한국인의 술상’과 같은 한국 술을 소개하는 케이(K) 콘텐츠 역시 이러한 현상에 힘을 실어줬다. ‘막걸리 만드는 법’ ‘막걸리 먹는 법’ ‘막걸리 비교 시음’ 등을 검색창에 넣으면 수만개에 이르는 콘텐츠가 검색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양조장의 제품을 구매하고 에스엔에스에 올리며 팬덤을 형성하는 것이 요즘 세대의 막걸리 문화”라고 김다슬 전통주 소믈리에는 설명했다. 막걸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나의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는 얘기였다.
막걸리를 단순히 구매해서 마시는 단순 소비자에서 진화한 ‘막걸리 덕후’도 늘었다. 전통주 전문 교육 기관인 한국가양주연구소의 전통주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문전성시다. 현재 대기 인원만 해도 300여명에 이른다. 마시는 거로 모자라, 직접 만들어 먹겠다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수강생 대부분은 젊은층이다.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은 “2010년 연구소 창립 뒤 지금이 가장 젊은 교육생이 많다”며 “전에는 주로 40대 이상이 교육을 들었다면, 최근에는 20~30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열정적이고 학구적인 2030세대가 유입되며 자연적으로 막걸리 업계가 젊어지고 있다는 것. 류 소장은 “젊어진다는 것은 기반을 튼튼하게 구축한다는 의미가 되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더욱 안정적인 구조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소비자가 젊어지는 추세와 맞물려 막걸리를 빚는 양조장도 젊어지고 있다. ‘네이버 광고 막걸리’ ‘힙한 막걸리’로 명성 높은 한강주조가 대표적인 예다. “전통적인 막걸리도 충분히 젊고 힙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막걸리 사업에 뛰어든 고성용 대표는 “막걸리 문화를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멋지게 표현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한강주조는 시그니처 제품인 ‘나루 생막걸리’를 비롯해 남성 패션 잡지 <지큐>(GQ)와 협업한 ‘직휴 막걸리’, 대한제분 곰표 밀가루와 함께한 ‘표문 막걸리’ 등을 개발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있다. 양조자 7명의 평균 연령은 30대,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한강주조의 성공에 힘입어 젊은 양조인들이 뛰어든 소규모 양조장도 늘었다. 특히 인터넷 판매가 가능한 전통주라는 점이 젊은 창업자들을 유인하고 있다. 류인수 소장은 “초기에 큰 비용이 들지 않아 비교적 경제력이 약한 젊은층의 부담이 적은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말했다. 소규모 주류 제조가 가능해지며 양조장 창업의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는 것.
젊어진 막걸리답게 소비도 젊게 한다. 가장 큰 창구는 에스엔에스다. 서울 마포구 구름아 양조장에서 지난해 9월 첫선을 보인 ‘유자가’ 막걸리는 3만원이라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출시와 동시에 매진을 기록했다. 200병 한정 수량, 에스엔에스 메시지를 통해서만 살 수 있는 불편함이 오히려 특별한 마케팅 전략이 됐다. 지난해 에스엔에스에서 가장 ‘핫한 막걸리’로 떠오른 이유다. 구매층 대부분은 20~30대 여성으로, 재구매율도 80% 이상이라고 소지섭 양조사는 말했다.
에스엔에스는 가장 중요한 소통 도구이자 사업 수단이다. 생산자, 소비자가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다. 전통주 생산업체인 술아원의 강혁 본부장은 “세련된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막걸리 사진을 찍어 인증샷을 남기는 젊은 고객의 피드백을 보면서 막걸리의 소비층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김다슬 소믈리에는 “엠제트 세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소통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요즘 새로 생기는 젊은 양조장은 에스엔에스를 통한 소통에 아주 능숙하다. 에스엔에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소비자와 직접 만난다. 지금 막걸리 시장이 젊어진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막걸리를 찾는 젊은층에게 막걸리는 더 이상 싼 술이 아니다. 같이양조장의 막걸리 ‘서머 딜라이트’와 ‘윈터 딜라이트’는 출고가 4만5천원, 매장에서는 8만~9만원대의 높은 가격인데도 불구하고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다. “윈터 딜라이트의 주 고객층은 30대 여성이었고, ‘막걸리계의 디올’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에스엔에스에서 화제가 됐다. 2030 소비자들은 오히려 지갑을 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막걸리 한병에 2만원 이상을 지불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막걸리는 싼 술이어야 한다는 편견이 없기 때문이다.” 대동여주도 이지민 대표의 분석이다.
다양한 종류의 막걸리를 판매하는 전통주점이 속속 늘어난 것도 막걸리의 인기에 한몫했다. 몇년 전부터 젊은층을 겨냥한 세련된 전통주점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이에 맞춰 프리미엄 막걸리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커졌다. 한동안 사라졌던 전통주점이 서울 강남, 마포, 성수, 신촌 등 번화가에서 새롭게 둥지를 튼 이유기도 하다. 20~30여종의 다양한 막걸리를 가져다 놓고 판매하는 전문적인 ‘막걸리 바’도 생겨났다. 창업자의 입장에선 일반적인 소주·맥주보다 마진이 큰 매력도 작용한다. 강혁 본부장은 “프리미엄 막걸리인 술아 핸드메이드 막걸리의 주 납품처는 이른바 서울 핫플레이스에 위치한 주점”이라고 말했다.
백문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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