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벌어지는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착각일지 모른다. 여러 변수에 떠밀려 그 선택을 강요받았을 뿐, 내가 온전히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 날이 있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날. 지난주 휴일이 그랬다. 버스에 탔는데 스마트폰이 먹통이었다. 배터리가 똑 떨어진 것. 그걸로 뭔 대수겠냐만, 지갑까지 없더라. 어어, 버스비를 어쩐담. 티머니도 신용카드도 없는데. 가방을 털어보니 5만원짜리 한장뿐이다. 5천원도 아닌 5만원짜리라. 곤혹스럽다. 고액권을 본 기사님이 한말씀 하신다. “요즘은 현금 결제들 안 하는데…. 잔돈 없어요?”
그때 들려오는 구원의 목소리. “제가 대신 (버스비) 드릴까요?”
오, 현현하는 테레사! 가브리엘 대천사 같은 분! 그는 앞자리 승객이었다. 놀랐다. 아직도 이렇게 온정적인 이웃이 있다니.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답했다. “초면에 실례가 많지만, 정말 감사합니…” 하다가 지폐를 세는 그를 보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염치가 없다는 자괴감이랄까. 갚을 방법도 없잖나. 애매하게 1300원 때문에 번호를 묻기도 뭐하고. 뱉은 말을 주워 담은 건 순식간이었다.
“선생님, 잠시만요. 호의는 너무 감사한데, 저 그냥 다음 정류장에 내려서 걸어갈게요.”
“아, 네. 뭐 그럼 그러세요.”
근데 뭐지, 이 싸한 느낌은? 그때야,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호의를 반려하고 나서야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해독하게 되었다. 아뿔싸, 저분이 버스비를 그냥 준다는 게 아니었구나. 잔돈을 고액권과 바꿔준다는 거였구나. 그가 손에 쥔 지폐 수와 단위를 일별해보니 그랬다. 혼자 김칫국 마신 꼴이 된 나는 낯이 화끈거렸다. 거기서 끝이면 좋았으련만, 다음에는 스턴트맨 뺨치는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허겁지겁 내리던 나는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보기 좋게 넘어지고 만 것이다.
자, 여기서 질문. 당신이 이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이라면 그러려니 넘기겠는가? 사소한 에피소드일 뿐이니 금세 털어버린다면 당신은 잘 자는 사람이다. 사소한 일이라면서도 곱씹고 되새김질하면 못 자는 사람이다. 나는 전자와 같은 부류가 못 된다. 자려고 누우면 한낮의 일이 생각나고, 그때부턴 이불킥이 시작된다.
왜 나는 “대신 드릴까요?”의 목적어를 ‘잔돈’ 아닌 ‘버스비’로 받아들였을까? 내 안에 나도 모르는 공짜 심보가 있나? 그 제안은 일종의 등가교환이었으니 감사함을 표하고 쿨하게 응하면 그만이었다. 왜 혼자 오버하고 난리였던가? 그러고 보면 요즘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같기도? 돌발성 난청인가? 못 알아먹어 놓고 대답을 바꿀 건 또 뭐람? 그래, 늘 체면치레가 말썽이지. 그 가브리엘 천사분이 머쓱하진 않았을까? 낯선 사람한테 호의를 베풀었다가 괜한 거절만 당한 거잖아. 그 순간 하필 넘어질 건 또 뭐야. 아, 돌겠네.
이런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가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생각을 곱씹는 수준이 유난스러운 건 알지만, 그걸 떨쳐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일평생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과 빚은 촌극도 이럴진대, 회사에서나 친구 간에 일어난 일은 오죽할까.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내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마라톤 주자로 등판한다. 오늘 내보낸 기사, 내일 있을 회의, 답장 못 한 이메일, 마뜩잖은 사람과 챙겨야 할 사람, 썰렁한 단톡방, 읽씹당한 개톡, 가족의 대소사…. 이 모든 의식의 흐름은 대체로 자책 아니면 합리화로 귀결된다. 겉으론 업무나 현상이라는 포장을 둘렀지만, 알맹이는 사람 스트레스로 가득 찬 꼬꼬무들이다.
밤마다 이 짓을 하게 되는 배경에는 내가 어떤 상황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온당한 믿음인가? 글쎄, 삶에서 벌어지는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착각일지 모른다. 여러 변수에 떠밀려 그 선택을 강요받았을 뿐, 내가 온전히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저자이자 슬로베니아 철학자인 레나타 살레츨이 말했듯 선택은 대부분 무의식이나 공동체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타인이 내 선택을 어떻게 생각할지 고려한 선택을 하거나, 타인이 선택하는 걸 선택하기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선택지를 고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가 체면치레를 이유로 그 승객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그렇다.
이미 일어난 일은 내가 선택한 것처럼 보일지언정 사실은 선택한 게 아닌 행위의 총합이다. 스마트폰 배터리부터 그 승객이 앞자리에 앉을 가능성, 이후에 벌어진 오해와 누락, 버스에서 넘어지기까지 수천번의 우연이 축적된 확률을 나는 결코 계산하거나 예측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진실을 망각할 때 떠안게 되는 증상이 바로 불면이다. 내가 뭐든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죄책감과 불안, 불면을 유발한다. 고로 나는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삶에서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 부분은 많지 않음을, 모든 걸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없음을 수용하면서 흘러간 건 흘러간 것대로 둬야 한다는 걸 말이다.
이번 일로 얻은 교훈들이 있다. 외출할 땐 스마트폰 배터리를 확인해야 한다. 현금은 이제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택시도 그렇다). 버스에서는 서두르면 안 된다. 이따금 오늘의 운세를 봐야 한다. 물론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점괘 따위는 존재할 리 없지만. 마지막으로,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좋은 이웃이 있다. 그날 740번 버스 승객분, 정말 고마웠어요.
△이주의 ‘불면 극복’ 솔루션
꼬꼬무 끊기. 꼬꼬무 중에서도 가장 해로운 꼬꼬무는 잠 못 들까 걱정하는 꼬꼬무다. ‘내가 잠을 못 자면 어쩌지? 8시간 이상 자야 하는데’ 하는 생각은 불면인에게 재앙이다. 그까짓 잠 좀 못 자도 잘 살아진다. 다음 연재는 이 주제로 쓸 예정이니 참고해주시라 ★★★★★
강나연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