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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뜨거운 시칠리아가 만든 혁신적인 맛

등록 2022-04-15 11:57수정 2022-04-15 19:31

권은중의 화이트
플라네타 샤르도네, 염소젖 치즈 부드럽게 감싸주는 여운
플라네타 샤르도네. 권은중 제공
플라네타 샤르도네. 권은중 제공

치즈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하지만 미국 치즈의 상당 부분은 우유에 유화제 등을 첨가해 공장에서 대량생산된다. 이런 제조법은 2차 세계대전 때 치즈를 전략물자로 대량공급하기 위해 고안됐다.

‘치즈 대국’ 미국이 가장 많은 치즈를 수입하는 국가는 이탈리아다.(2020년 기준) 이탈리아는 파르미자노 레자노, 그라노 파다노, 모차렐라 등 생산하는 치즈의 40%를 수출한다. 이 치즈는 미국과 달리 대부분 장인들이 손으로 직접 만들고 길게는 몇년간을 숙성시킨다.

‘정통 치즈’의 천국인 이탈리아에는 수많은 치즈가 있다. 이 치즈 가운데 내 입맛을 자극한 것은 그라노 파다노처럼 우유로 만든 치즈가 아니라 양과 염소 젖으로 만든 치즈였다. 피에몬테에는 로비올라라는 염소젖 치즈(양젖도 일부 사용한다)가 있다. 이 치즈는 눈처럼 희고 딱딱한 외피가 없는 연성치즈다. 시큼하고 강한 향이 특징이다. 새하얀 청국장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한국 사람 가운데에는 이 치즈에 기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 입맛에는 밍밍한 우유 치즈보다 맛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이 로비올라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같은 염소·양젖으로 만드는 그리스 페타는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말이다. 이런 나에게 얼마 전 현직 셰프인 지인이 인터넷으로 이 치즈를 구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정보 덕분에 몇년 만에 맛본 로비올라는 그 맛을 떠나 반가웠다. 미세먼지라고는 찾을 수 없는 짙고 푸른 이탈리아의 봄 하늘 아래 이 치즈를 처음 먹었던 때가 떠올랐다. 염소나 양은 봄에 새끼를 낳기 때문에 이 치즈는 이맘때인 봄에 가장 맛있다.

오랜만에 맛보는 로비올라와 함께한 와인은 시칠리아 와이너리인 플라네타의 샤르도네였다. 플라네타는 1995년 문을 연 신생 와이너리다. 창립자는 저렴하게 대량생산하는 기존의 시칠리아 화이트 와인과 달리 “시칠리아를 뛰어넘는 새로운 와인”을 목표로 했다. 이 샤르도네는 오크숙성을 하지 않아 가벼운 대개의 이탈리아 화이트와 달리 열두달이나 프렌치 오크통에서 숙성시킨다. 그것도 절반가량은 고가인 새 오크통에서 숙성시킨다.

피에몬테와 토스카나처럼 기존의 전통적인 와인 제조 방식에 반대하며 새로운 와인을 만드는 혁신가가 시칠리아에도 있다는 걸 알린 것이다. 1996년 처음 출시된 이 와인은 바로 그해에 이탈리아의 와인 평가인 감베로 로소의 최고등급(트레 비키에리)을 비롯해 국제적으로 많은 상을 받았다.

오크숙성 덕에 이 와인은 열대과일과 버터와 꿀 맛이 난다. 하지만 미국이나 프랑스의 샤르도네와 달리 질감은 참 부드럽다. 시트러스, 꽃향기에 미네랄감도 있어 잔잔한 여운이 남는다. 시칠리아는 햇볕이 뜨겁기 때문에 포도나무 키가 북쪽에 견줘 한참 작다. 기온 탓에 포도의 당도는 높고 산도는 낮다. 이런 샤르도네로 알프스 북쪽의 샤르도네와 같은 깊은 맛과 향을 끌어내는 건 참 쉽지 않았을 것이다.

틀을 깨기는 쉽지 않다. 미국산 치즈를 가장 많이 수입해서 먹는 국가는 멕시코, 한국, 일본 순이다. 나도 이탈리아에 오기 전까지 고가의 일부 치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치즈가 우유로만 만들고, 공장에서 얇게 썰어져 사각으로 비닐포장 돼 나오는 줄 알았다. 미국식 음식 문화에 따른 미국식 사고방식이었다. 로비올라를 비롯한 이탈리아 치즈는 이런 나의 고정관념을 깨주었다. 이 치즈가 시칠리아 화이트의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맞선 플라네타 샤르도네와 잘 어울리는 까닭이다.

권은중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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