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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글이든 요리든 사람을 바꿔놓는 힘이 있죠”

등록 2022-06-04 10:09수정 2022-06-04 17:58

인터뷰 ‘음식과 문장’ 펴낸 나카가와 히데코

코로나 시기 2년 걸쳐 쓴 에세이
요리사·작가 정체성 모두 돋보여
대기 꽉 찬 연희동 요리선생 부엌
언제나 와글와글하며 다양성 폭발
‘연희동 요리선생’ 나카가와 히데코씨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요리교실인 ‘구르메 레브쿠헨’(미식가+생강과자) 조리대 앞에서 웃고 있다. 사진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연희동 요리선생’ 나카가와 히데코씨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요리교실인 ‘구르메 레브쿠헨’(미식가+생강과자) 조리대 앞에서 웃고 있다. 사진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열정적인 요리 연구가이자 에세이스트 나카가와 히데코씨가 ‘또’ 책을 냈다. 2008년부터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요리교실 ‘구르메 레브쿠헨’을 열고 활동해온 그는 일본 태생 귀화 한국인이다.

“저한테 음식과 문장, 둘 다 중요해요. 어느 인류학 교수가 제게 왜 계속 책을 쓰느냐, 책을 통해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찾으려는 게 아니냐는 얘기를 하셨는데,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재미있으니까.”

2011년 첫 책 <셰프의 딸>을 선보인 뒤 <맛보다 이야기>를 쓴 2013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거르지 않고 요리책 또는 요리 에세이를 출간해왔다. 올해만 해도 ‘술 취해도 만들 수 있는 초간단 안주 50가지’를 담은 요리책 <히데코의 사적인 안주교실>(중앙북스)과 네번째 산문집인 <음식과 문장>(마음산책)을 냈고, 머지않아 스페인 요리 타파스를 다룬 요리책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올해 내는 책만 3권, 아니 4권이 될 수도 있다. 이 에너지, 어디서 오는 건가.

자궁 이야기, 왜 안 돼?

지난달 30일 연희동 자택에서 만난 그에게 엠비티아이(MBTI) 성격유형 중 무엇에 해당하냐 물으니, “언제나 이에스에프제이(ESFJ)로 나온다”며 웃었다. 사교적인 외교관형. 한마디로 ‘핵인싸’ ‘인기쟁이’라고 한다. “곤경에 처할수록 망설이지 않는다”고 그는 자평했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이다. 하지만 몇해 전, 갱년기라는 몸의 신호를 무시한 채 계속 무리한 탓인지 자궁에 탈이 났다. 한의사는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라고 했다. 그럴 리가. 성격처럼 무심하게 지냈지만 배가 점점 부풀어 오르고 과다출혈에 빈혈이 심해져 급기야 목숨에 위협을 느낄 지경까지 이르렀다. 2년간 치료 끝에 지난해 말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았다. 이번 책 <음식과 문장>에도 갱년기 여성으로서 겪은 체험을 솔직담백하게 적었다. 자궁전적출술을 받으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의사에게 “남자가 성기를 절단하면 어떤 기분인가요?”라고 화를 냈다는 장면에 이르면, 심각한 가운데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의사의 의학적인 답변은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질문을 받았어요. 이번 책에 왜 굳이 자궁 적출에 대한 이야기를 썼냐고 말이죠. 근데, 왜 쓰면 안 되나요? 자궁 없어지면 여자 끝나는 건가? 2년 동안 혼자 깊게 고민한 끝에 결정한 거였는데, 전 되게 좋고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수술을 끝내고 제 인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작하는 거 같았어요. 나 자신의 몸도, 정신적인 것도 뭔가 한 시기를 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어릴 때부터 여러 나라를 오가면서 살았다. 프랑스 요리 전문 셰프로서 구 서독의 일본대사관 전속 조리장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독일에서 자랐다. 음식을 잘 만들던 플로리스트 어머니와 아버지는 딸이 셰프가 되길 바랐지만 그의 꿈은 부엌 바깥에 있었다. 국제정치학자, 언어학자, 신문기자, 유엔 직원 등이 되고 싶었고 대학에선 국제관계와 언어학을 공부했다.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인턴을 하거나 번역 일을 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엔 독일, 스페인에서 지내다가 1994년 한국에 정착했다. 한국에서 대학원 국문과 석사 과정을 밟았고 궁중음식연구원에서도 3년간 공부했다. 한국의 전통조리법이나 내림음식 등을 꾸준히 익힌 덕에 고사리나물이나 묵밥 같은 그의 토속적인 음식에서 ‘엄마의 손맛’을 떠올린다는 제자들도 있다.

“글이든 요리든 사람을 바꿔놓는 힘이 있어요. 다른 점이라면, 요리는 움직임의 시간이에요. 레시피를 만들고, 재료를 사고, 요리교실을 하는 것 모두 움직일 ‘동’(動)이에요. 글쓰기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고, 머무를 ‘정’(停)에 해당하죠. 편집자가 마감을 재촉하면 ‘그분이 아직 안 왔다’고 얘기해요. 인스피레이션(영감)요.”(웃음)

2년에 걸쳐 쓴 이번 책 <음식과 문장>은 많은 책들 중에서도 각별하다. 코로나 시기에 쓴 요리와 인생을 다룬 에세이이기도 하려니와, 미술대학을 다니고 있는 둘째 아들(박지훈)이 표지와 본문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안정윤 도예가가 구워준 둥근 도자기 접시에 문어를 그려 넣은 ‘구르메 레브쿠헨’의 상징적인 간판 또한 둘째 아들이 5학년 때 그린 것이다. “아들이 첫 유럽여행지인 스페인에서 문어 요리 ‘뽈뽀’(pulpo·풀포)를 먹은 뒤에 인상적이어서 남긴 것”이라고 했다. 1998년 1월과 1999년 12월에 낳은 두 아들을 기르기는 쉽지 않았다.

“요리, 육아, 살림, 공부 가운데 육아가 제일 어려웠던 것 같고, 좋은 엄마 아니었던 것 같고, 재미없었던 것 같아요. 사명감으로 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잘 자라주었지만요.”(웃음)

지인의 빵집 이야기를 쓴 부분에 삽입된 귀여운 그림. 나카가와 히데코씨의 아들 박지훈씨가 그렸다. 마음산책 제공
지인의 빵집 이야기를 쓴 부분에 삽입된 귀여운 그림. 나카가와 히데코씨의 아들 박지훈씨가 그렸다. 마음산책 제공

초여름 와인 안주로는…

코로나19가 일상을 멈추게 한 지난 2~3년 동안 그는 여기저기 아프고 다친 몸을 돌보았다. 부엌을 수선한 뒤 한동안 쉬었던 요리교실도 재개했다. 집 마당에 대형 솥을 걸고 카레를 끓이고 그릇과 책들을 판매하는 벼룩시장도 열었다. 얼마 전부터는 가족과 수많은 지인의 소식을 함께 담은 뉴스레터 구독서비스를 시작하는 등 끝이 없어 보이는 이벤트까지 쉼 없이 이어가고 있다. 스스로도 “바쁘게, 일을 만드는 팔자”라고 말한다.

“일을 좋아하니까 사업을 왜 안 하냐고들 하는데, 여기저기 제안이 있기는 하지만 조심스러워요. 그보다 저는 요리교실을 해야 콘텐츠가 나오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을 좋아하니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할 거예요.”

일식, 지중해식, 허브연구반, 술안주반 등으로 나뉜 그의 요리교실엔 전업주부, 직장인, 교수, 디자이너, 편집자, 잡지 에디터 등 성별 불문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드나든다. 대기자가 늘 150명 정도 있는데, 장기 수강생이 많아 결원이 적은 탓이다. 수강생들 모두 그의 요리교실에서만큼은 일상의 긴장을 내려놓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마시고 떠들썩하게 설거지까지 함께 하면서 쉬어간다. 다양성이 폭발하는 부엌이랄까. 전남 신안 도초도 염전의 소금, 경기도 농장의 토종쌀, 도시 장터 마르쉐에서 구한 친환경 채소들로 음식이 만들어지고, 400년 전 빚은 일본 도자기, 한국 작가의 현대 백자, 유럽에서 온 와인잔이 식탁에 함께 놓여 서로 섞인다. 못 말리는 애주가인 그는 물론이고, 그의 남편도 슬그머니 자리에 합류해 위스키병을 따기 일쑤다.

“초여름에 와인과 어울리는 안주를 추천하자면, 초당옥수수와 청양고추를 함께 넣어 볶은 ‘옥수수 간장 버터 볶음’과 허브 두부 카나페가 제격이죠. 올리브 볶음도 맛있는데….”

그의 요리 예찬, 인생 예찬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들 박지훈씨가 그린 나카가와 히데코씨의 모습. 마음산책 제공
아들 박지훈씨가 그린 나카가와 히데코씨의 모습. 마음산책 제공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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