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육 햄 등 식물성 재료로만 만든 더 베러의 샌드위치.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올여름 마지막 복날은 8월15일이다. 가을이 시작된다는 입추(올해는 양력 8월7일)가 지나도 복날엔 신기하게도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가을의 서늘한 기운을 누르는 날’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처럼. 여름 한철 소진한 에너지를 촘촘히 채워넣어야 할 것 같은 말복, 삼계탕이나 치킨, 삼겹살 등 기름진 육식을 선택하는 건 이제 지루하다. 이날마저도 고기를 먹었다간 기력을 회복하기는커녕 동맥경화로 건강을 잃을 것만 같다. 잦은 육식이 과잉이 된 시대, 말복 하루만큼은 오히려 비건 음식으로 건강을 챙겨보는 건 어떨까. 간편하고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비건 음식을 소개한다.
인터넷 검색 엔진에 ‘비건 식당’, ‘채식 식당’이라고 검색어를 넣으면 서울에서만 적어도 20곳은 넘는 식당이 나온다. 최근에는 경기도, 부산, 대구, 제주 등에서도 비건 식당이 대세다. ‘비건 샐러드 가게’, ‘비건 중식당’, ‘비건 빵집’ 등 세분화된 카테고리가 생긴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대형 식품 기업이나 식품 유통 기업에서도 이런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씨제이(CJ)제일제당, 농심, 풀무원, 롯데푸드 등의 식품 제조 기업과 신세계푸드, 현대그린푸드 등 식자재 유통 기업, 씨유(CU), 지에스(GS)25, 세븐일레븐 같은 편의점 유통 기업까지 모두 비건 대체식품 사업 추진에 나서고 있다.
이렇다 보니 이젠 시중에서 비건 간편식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김민지 푸드스타일리스트가 제안하는 ‘비건 동그랑땡 미니 버거’는 시판 냉동 비건 동그랑땡으로 아이와 어른 모두 즐길 수 있는 비건 메뉴다. 제조 순서는 이렇다. ①냉동해둔 비건 동그랑땡을 해동해 구워둔다. ②모닝빵을 반 갈라 굽고 한쪽에는 비건 마요네즈를, 다른 한면에는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바른다. ③시판 토마토소스에 다진 마늘과 양파, 피망 등을 넣어 조린다. ④연근은 얇게 썰어 에어프라이어나 프라이팬에 바삭하게 튀긴다. ⑤모닝빵에 치커리를 얹고 토마토소스를 바른 다음 동그랑땡을 얹는다. 연근튀김을 위에 올리고 빵을 덮는다. 더블 패티를 원한다면 이 과정을 한번 더 반복한다. 바삭한 연근튀김은 감자튀김처럼 사이드 메뉴로 함께 곁들여도 좋다. 김 푸드스타일리스트는 “한창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나이대의 아이들을 위한 급식 메뉴로 개발한 것”이라며 “슴슴하고 은은한 간의 음식도 좋겠지만, 아이들에게는 다소 자극적일 수 있는 맛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정육점 분위기의 비건 음식점, 더 베러.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비건 동그랑땡처럼, 익숙한 육식의 향을 품고 비건의 길로 건너가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햄이나 소시지 같은 육가공 식품이 몸에 나쁘다지만 짙은 훈연향에 입에 착 달라붙는 감칠맛 때문에 끊을 수가 없다면, 대체육 햄이란 다른 선택지가 있다. 최근 강남구 신사동에 문을 연 ‘더 베러’는 ‘국내 최초 식물성 정육 델리’를 표방한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대체육. 돼지고기 생햄의 맛과 식감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신세계푸드 더 베러 담당자는 “기후변화를 넘어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환경보호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소비 트렌드를 주도하는 엠제트(MZ) 세대를 중심으로 환경과 동물 복지에 관한 관심도 올라” 미래형 먹거리 기술 개발에 나섰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곳의 가장 중요한 콘셉트는 “소비자에게 식물성이라는 말을 강요하거나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것”. 채식이 대세로 떠올랐지만 윤리성이 강조되면 오히려 대중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육 등으로 육식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면 채소 본연의 매력을 극대화해 즐기는 방식도 좋을 테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비건 레스토랑 ‘남미플랜트랩’에서는 2021년 3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비건 딥소스 3종’을 판매했다. 귀리 마요네즈, 후무스, 올리브 스프레드 3종으로 구성된 이 딥소스 세트는 출시와 동시에 완판을 기록했고 성공적인 펀딩 판매 사례로 꼽힐 만큼 많은 이의 입소문을 탔다. 제품의 이름 역시 ‘아무나 먹는 비건 소스 3종’으로,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채식을 쉽게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된 ‘효자 상품’이었다고. 이 소스의 캐치프레이즈는 ‘식물에서 찾은 속세의 맛’이다. 무언가 부족하거나 빠진 아쉬운 맛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식재료를 사용해 최고의 맛을 구현했다는 것.
귀리 마요네즈는 사탕수수와 레몬즙, 귀리 우유로 만든 채식 마요네즈로 새콤하고 달콤한 마요네즈의 풍미를 그대로 살렸다. 감자칩이나 피자에 찍어 먹거나 샐러드의 드레싱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레바논, 이집트 등 중동에서 주로 먹는 후무스는 병아리콩을 원료로 올리브오일과 레몬즙, 마늘 등을 섞어 만든 ‘중동식 쌈장’에 가깝다. 병아리콩 특유의 담백하고 슴슴한 맛에 올리브오일의 고소한 풍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늦은 밤, 심심한 입을 달래기에 좋다. 셀러리, 당근, 오이 같은 야채 스틱에 찍어 먹으면 ‘부담 없는 야식’으로 딱이다. 올리브 스프레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프로방스식 양념장’에 가깝다. 바게트 빵에 발라 먹거나 샌드위치에 찍어 먹으면 올리브의 쌉쌀한 맛이 입맛을 돋운다. 고기구이나, 튀긴 음식과 같은 일반식에도 무난하고 조화롭게 잘 어울린다.
남미플랜트랩에서는 감자 웨지 튀김에 수제 마요네즈 소스를 곁들여 낸다거나, ‘후무스 피자’를 만든다. 김경열 남미플랜트랩 셰프는 “비건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비건이라는 개념을 더 많은 이들에게 쉽고 편하게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채식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음식이 아닌, 우리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소비할 수 있는 좋은 선택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비건 소스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채식은 유난스럽고 어렵다’는 편견을 깨버린 것.
채소로만 깊은 맛을 낸 비건 탕면. 장민영 제공
장민영 음식탐험가 겸 작가는 “비건 음식을 대하는 가장 대표적 편견 가운데 하나가 자꾸 채식이 아닌 음식을 채식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 같다”며 “채식이라는 그 자체의 카테고리 안에서, 계절의 다채로운 맛을 그대로 느끼는 재미를 찾아가보자”고 제안한다. 그런 그가 자신있게 추천하는 복날 음식은 ‘비건 탕면’.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주점을 운영했던 김태윤 셰프의 ‘비건 산차이탕면’에 착안한 음식이다. 채소로만 만든 탕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깊고 진한 맛이 일품이다. 집에서 간단하게 만들어 먹기에는 아무래도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음식이라, 정확히 계량한 레시피를 제공할 수는 없으나, 이 탕면에서 주목해야 할 과정이 있다. 바로 ‘발효’. 홍성의 유기농 농장에서 재배한 양배추를 죽순과 함께 한달 이상 발효시키는 것이 포인트다. 발효시킨 양배추, 죽순, 구파래를 함께 넣고 푹 끓여내면 바다의 신선한 향과 땅에서 난 싱싱한 채소의 풍미가 조화로운 채수가 탄생한다. 꼬들꼬들한 구파래의 식감과 대비되는 부드럽고 하늘하늘한 소면을 넣고, 채소만으로 밋밋할 수 있는 식감을 살리기 위해 건두유피를 더한 것도 김 셰프만의 ‘킥’이다. 채소의 식이섬유와 건두유피의 단백질을 한꺼번에 섭취할 수 있는, 늦여름의 완벽한 영양식이다. 장씨는 “멸치 육수를 기반으로 한 잔치국수를 사랑하는 이라면 무조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메뉴”라고 덧붙였다.
시선을 돌려 보면 이토록 풍부하고 다양한 채식의 세계가 존재한다. 늘 비슷한 음식을 먹는 일상생활에 활기를 주기에도 좋다. 맛도 좋지만 눈으로 즐기기에도 좋다. 서양엔 일주일 중 하루 채식을 하는 ‘미트리스 먼데이’(Meatless Monday) 캠페인이 있다. 우리는 여름날 마음먹고 채식으로 몸을 보양하는 ‘미트리스 복날’을 지내보는 건 어떨까?
추천, 비건 맛집ㅣ여기 고깃집 아닙니다~
여름 끝물, 지친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유명한 삼계탕집을 찾는 건 고릿적 얘기. 씹고 뜯고 맛보고 눈으로도 즐기는 비건 음식을 만나보자. 서울에만 20여곳의 비건 식당이 존재한다. 굳이 ‘건강한 비건식’을 강조하지 않아도, 비건이 아니어도, 그 자체로 맛있고 멋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2곳의 식당을 소개한다.
고기 햄이 아니랍니다, 더 베러
정육점처럼 꾸며놓은 실내에는 커다란 생햄 덩어리가 쇼케이스에도 가득하고 천장에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육가공사가 상주하는 ‘부처 존’(butcher zone)이 꾸며져 있는 이곳은 고기를 파는 곳일까?
지난 7월15일 강남구 신사동에 문을 연 ‘더 베러’는 신세계푸드가 국내 최초로 식물성 대체육을 선보이는 팝업 스토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콜드컷 햄’. 최근 국내에 식물성 대체육을 판매하는 곳이 많아지는 추세지만, ‘콜드컷’으로 대표되는 돼지고기 생햄을 표방한 대체육을 출시한 곳은 이곳이 처음이라고. ‘볼로냐 콜드컷’, ‘슁켄 콜드컷’, ‘모르타델라 콜드컷’처럼 다양한 맛과 향으로 세분화해 선택의 폭을 넓힌 것이 눈에 띈다. 생햄을 이용한 샌드위치와 샐러드는 물론 비건 치즈와 비건 드레싱, 베이커리도 만날 수 있는 것도 이곳만의 차별화된 특징. 이곳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비건 미트볼, 소시지 패티 등도 구매할 수 있다. 모르타델라 캄파뉴 샌드위치 9500원, 슁켄 & 퀴노아 샐러드 1만4300원. 서울 강남구 신사동 645-24 1층.
육식주의자, 비건 모두 행복한 고두리
육식주의자와 채식주의자가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식당은 없을까? 이런 고민에서 시작된 곳이 바로 용산구에 위치한 ‘고두리’다. 얼핏 보면 ‘고깃집인데’ 싶을 수도 있겠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버섯두부전골’과 ‘김치 생삼겹살’. 점심에는 주로 콩국수나 순두부찌개가, 저녁에는 인근 직장인들의 회식 메뉴인 ‘김치 생삼겹살’이 인기 메뉴다.
고깃집에서 먹는 두부의 맛이 얼마나 좋겠냐고 의심하는 이도 있겠지만, 이곳만의 자부심이 바로 두부다. 매일 아침 들여오는 파주 장단콩으로 매장에서 직접 만드는 생두부의 맛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 두부만을 따로 구매하러 매장을 방문하는 손님도 있을 정도다. 루꼴라(루콜라)를 듬뿍 얹어 내는 ‘루꼴라 비지전’이나 ‘두부 치즈’ 같은 이색 메뉴도 맛이 좋다. 비건에게도, 고기를 선택적으로 섭취하는 플렉시테리언에게도, 육식 마니아에게도 훌륭한 한끼가 될 것이다. 생순두부 1만1천원, 버섯두부전골 3만9천원.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39길 10 1층, 0507-1368-0178
백문영 객원기자 moonyoungbai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