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과 아주 잘 어울렸던 프랑스 로제 와인 프로방스 로즈 봉봉. 권은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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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인들은 자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와인도 예외가 아니다. 이탈리아가 20세기 프랑스의 양조술을 도입해 와인의 질적 도약을 이끌어냈지만 아직도 자신의 전통을 고집하는 와이너리가 적지 않다. 세계 모든 나라가 신봉하는 프렌치 오크통(바리크) 대신 전통적인 대용량 오크통인 보티를 쓰는가 하면 고대 로마 시대의 토기인 암포라를 쓰기도 한다.
‘고집쟁이’ 이탈리아 사람들이 비판하는 프랑스 와인이 로제다. 화이트도 레드도 아닌 어중간한 와인을 프랑스인들이 상업적인 이유로 만들었다며 못마땅해한다. 이탈리아에서 요리 유학을 했던 나도 당연히 로제에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로제가 한식과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걸 알게 돼 가끔 마시게 됐다. 내가 로제와 주로 즐겨 먹는 음식은 회다. 육고기를 즐기지 않는 나에게 회는 갑각류와 함께 최고의 별식이다. 로제 와인은 원래 해산물을 즐겨 먹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유래했다. 화이트 와인에 포도 껍질이나 적포도 즙을 함께 넣어 발효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독특한 향과 맛을 갖게 된다. 이 독특한 풍미 덕에 스파이시한 한식에 잘 맞는다.
얼마 전 서울 이촌동의 만두 맛집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이 로제 와인인 프랑스 ‘프로방스 로즈 봉봉’을 가져왔다. 또 프랑스 샴페인을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만두에는 맥주를 주로 마셔서 솔직히 이 와인과 음식의 궁합이 걱정됐다. 그런데 로제 와인이 생각보다 만두와 잘 어울렸다. 뒤이어 시킨 문어숙회나 생선전과도 궁합이 좋았다. 그래서 그날 샴페인보다 저렴한 로즈 봉봉이 훨씬 먼저 동이 났다.
봉봉은 프랑스어로 사탕이란 뜻이다. 와인색이 사탕에 어울릴 분홍색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로즈 봉봉은 색깔은 물론이고 향도 강렬했다. 꽃향과 과일향, 그리고 소비뇽 블랑의 싱그러운 풀향도 났다. 6개월을 숙성해 산도와 바디감도 좋아 가벼운 여느 로제와는 사뭇 달랐다.
귀여운 이름과 달리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는 이 와인은 출발점부터 남다르다. 먼저 이 와인은 프랑스 남부 토착품종인 생소를 주로 쓰는데, 사용하는 포도의 70%는 100년 이상 된 나무에서 수확한다. 발랄한 색과 향이 노령의 나무에서 나온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또 와이너리인 도멘 데 디아블의 밭은 생빅투아르산 높은 고도의 자갈 토양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산도와 진한 미네랄 감의 비결이다. 산화방지제를 쓰지 않으려고 수확 후 드라이아이스를 사용하는 양조기법도 신박하다.
나는 꽤 긴 시간 로제 와인의 가볍고 발랄한 핑크빛을 경계해왔다. 그러나 2006년 문을 연 신생 와이너리가 빚은 발랄하지만 묵직한 로즈 봉봉의 핑크빛에서 와인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발견했다. 이 와인 덕분에 앞으로 프로방스 로제의 핑크빛을 그저 핑크빛으로만 느끼지 않을 것 같다.
권은중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