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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유로의 행복…이탈리아, 길거리 음식도 이렇게 맛있어?

등록 2022-09-02 20:00수정 2022-09-02 23:22

[ESC] 토리노·볼로냐 미식 여행

10유로 안팎으로 즐기는 토리노 ‘절대 맛집’과 ‘핫플’
길거리 음식 재해석한 레스토랑, 시장 옆 푸짐한 식당 등
코로나19로 위축된 마음 사르르 녹게 한 소탈한 한 그릇

이탈리아에는 가을에 와야 한다. 9월 말쯤 이탈리아에선 화이트 트러플을 비롯해 합리적인 가격에 맛이 좋은 포르치니 버섯같이 온갖 맛나고 진기한 식재료가 나온다. 게다가 전세계에서 오는 수백만명의 관광객들도 뜸해져 온전히 나만의 이탈리아를 즐길 수 있다.

그걸 잘 알지만, 나는 개인 스케줄 탓에 8월 중순에 이탈리아에 왔다. 2019년 12월 이후 거의 3년 만인 지난달 19일 토리노에 도착했다.

푸어만저의 감자 요리.
푸어만저의 감자 요리.

먼 타국에서 느낀 짬뽕의 향기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토리노 시내는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처럼 상당수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도착 다음날 아침, 가고 싶었던 랑게의 유명 레스토랑인 마시모 카미아나 오스테리아 벨리오에 예약 전화를 했지만 9월 초에 문을 연다고 했다. 거기에 먹고 싶었던 화이트 트러플은 이상 고온 탓에 10월이 지나야 나올 예정이란다. 나는 이탈리아의 여름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이탈리아 친구들 역시 대부분 휴양지인 산레모를 비롯해 이탈리아 곳곳에서 휴가 중이었다. 그들에게 물어물어 문을 연 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휴가철에도 문을 닫지 않는 ‘절대 맛집’을 찾을 수 있었다.

푸어만저(Poormanger)라는 감자구이집은 최근 토리노에서 ‘핫’한 식당이다. 큰 감자를 잘라서 오븐에 구운 뒤에 거기에 이탈리아 전통 방식으로 만든 요리를 올려주는 식이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나는 꽤 오랜 시간을 혼자서 기다려야 했다. 자리에 앉아 시칠리아식 가지 요리를 올려주는 메뉴를 시켜봤다. 구운 아몬드와 잘 튀겨진 가지를 올린 감자는 나를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활기찬 거리로 데려가주었다. 푸어만저는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라는 뜻인데 가장 저렴한 메뉴가 5유로(6700원)다.

빵 위에 닭고기와 해물을 얹은 트라피치노.
빵 위에 닭고기와 해물을 얹은 트라피치노.

토리노에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트라피치노(Trapizzino)도 인상적이었다. 트라피치노는 로마가 있는 중부 라치오의 길거리 음식 이름이기도 한데, 레스토랑 체인으로 성장했다. 바삭하고 두툼한 빵의 중간 부분을 갈라서 갑오징어와 와인으로 조린 닭고기를 넣어준다. 갑오징어를 넣은 빵에는 토마토 소스를 썼는데 우리나라 진한 짬뽕 냄새가 났다. 닭고기는 어찌나 부드럽던지. 하나에 5유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집이 50~100유로(7만~13만원)짜리 고급 와인을 판다는 점이다. 한병에 200유로(27만원)가 넘는 가야 바르바레스코도 있었다. 떡볶이집에서 고급 양주 ‘발렌타인 30년’을 파는 듯한 기묘한 조합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여름에 생선튀김을 많이 먹는다. 도시에 있지만 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다. 생선 튀김은 시칠리아가 유명하지만 토리노도 만만치 않았다. 유럽 최대 전통시장인 토리노 포르타 팔라초의 갈리나(Gallina)가 유명하다. 우리로 치면 노량진수산시장 옆에 있는 음식점쯤이다. 그날 가장 신선한 재료로 만드는 해산물 요릿집인데, 둘이 충분히 먹을 만큼 푸짐한 한 접시가 무조건 17유로(2만3천원)다. 와인은 한잔에 3유로(4천원). 그러나 맛난 음식과 함께 먹으니 이름도 모르는 하우스 와인이 프랑스 부르고뉴가 부럽지 않았다.

이탈리의 생선튀김 요리.
이탈리의 생선튀김 요리.

이탈리아의 유기농 매장인 이탈리(Eataly)도 그날 가져온 신선한 수산물로 즉석에서 요리를 해준다. 팔레르모의 발라로 시장이나 부치리아 시장의 생선튀김이나 삶은 문어 같은 길거리 음식을 좀더 고급화한 것이다. 중멸(알리치), 오징어, 새우 등을 튀겨왔는데 바삭바삭하니 맛있었다. 시칠리아에서 먹은 것보다 더 맛있었다. 같이 먹은 염장대구로 만든 스프레드 역시 이탈리아 해산물 요리의 깊이를 보여줬다.

생일상처럼 받은 볼로냐 햄 한판!

이처럼 이탈리아는 길거리 음식이나 패스트푸드에도 자부심이 넘친다. 물론 기초적인 빵도 소스도 조리법도 길거리 음식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의 자부심은 고대 로마가 서양 음식의 뿌리를 이루었고, 식욕을 죄악으로 규정한 교회로부터 건강한 음식을 시민의 권리로 찾아온 르네상스의 종주국이라는 자각에서 오는 것 같다. 미국의 패스트푸드 공습을 슬로푸드 운동으로 맞선 곳도 이탈리아였다. 심지어 아메리카노 커피를 ‘더러운 물’(acqua sporca)이라며 마시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 레알레 토리노.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 레알레 토리노.

실제 이탈리아의 커피 역사는 길다. 이탈리아에는 어느 도시나 100년이 넘은 커피숍이 있다. 토리노에는 스트라타(1858년), 카페 토리노(1903년)가 있다. 사보이아 왕궁에 자리 잡은 카페 레알레 토리노도 왕궁의 회랑에서 커피를 마시기에 근사하다. 대학도시 볼로냐에는 1907년 문을 연 감베리니가 있고 피렌체에는 1733년 문을 연 카페 질리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는 볼로냐의 테르치다. 테르치는 강배전(원두를 강하게 볶는 것)의 전통적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산미와 고소한 맛의 조화를 추구하는 개성 넘치는 에스프레소를 내놓는다. 그래서 나는 지난달 29일 토리노에서 300㎞ 떨어진 볼로냐에 도착하자마자 시내 중심가에 있는 테르치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맛본 테르치의 커피 맛은 여전했다.

볼로냐 시뇨르비노의 햄 한판.
볼로냐 시뇨르비노의 햄 한판.

내가 토리노에서 볼로냐로 온 것은 이곳이 미식의 수도로 불리기 때문이다. 볼로냐를 대표하는 음식의 하나는 돼지고기 햄이다. 볼로냐는 생햄인 프로슈토와 조리된 햄인 모르타델라의 중심지다. 그래서 볼로냐는 ‘뚱보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볼로냐를 혼자, 그리고 아내와 두번이나 왔지만 볼로냐의 명물인 이 햄들을 큰 나무 접시에 내놓는 탈리에리(우리말로 도마)를 한번도 먹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엔 한을 풀듯이 드디어 이 한판을 시켜봤다. 마조레 광장 맞은편에 있는 시뇨르비노의 28유로(3만8천원)짜리 한판에는 온갖 이탈리아의 원산지인증(DOP) 햄과 치즈 그리고 전통 빵이 올라왔다. 생일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음식과 함께 스푸만테를 비롯해 와인 세 종류를 페어링을 했다.

마조레 광장이 잘 보이는 창가의 가죽 소파에 혼자 앉아(여기가 인스타그램 명당이다) 느긋하게 24개월 숙성된 파르마산 프로슈토에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마시며 하루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내가 꼭 이탈리아를 가야 하나’라는 마음 한구석의 회의가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슈퍼마켓에서 사온 와인과 식재료로 차린 식사.
슈퍼마켓에서 사온 와인과 식재료로 차린 식사.

나를 치유한 이탈리아 슈퍼마켓

그런데 볼로냐에서 와인과 햄으로 치유받기에 앞서 진작에 나의 걱정을 씻어낸 곳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슈퍼마켓들이다. 2019년 이탈리아에서 요리 유학을 한 나에게 이탈리아 슈퍼는 낙원이자 도서관이었다. 거기다 한국에 견주면 절반 가격인 와인은 지갑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한다. 치즈와 프로슈토 역시 한국에 견주면 3분의 1 이하의 가격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도 많다. 나는 양과 염소의 젖으로 만드는 피에몬테 특산품인 로비올라와 세계 3대 레드와인으로 불리는 바롤로를 넣은 바롤로 치즈를 즐긴다. 강렬한 향취로 들고 다니기만 해도 “목욕 안 했냐”는 지청구를 유발하는 치즈다. 이런 치즈와 햄에 한 봉지 0.99유로 주고 산 루콜라를 얹고 장작을 때서 구운 시골빵과 함께 와인을 마시면 부러울 게 없다. 이 글을 쓰는 늦은 볼로냐의 밤에도 와인을 홀짝이고 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역시 카페 테르치로 달려가 진한 에스프레소와 갓 구운 크루아상으로 이탈리아식 해장에 도전해볼 계획이다.

권은중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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