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짓수는 20세기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대응하는 자기방어의 기술로 급부상했다. 양민영 제공
그저 좋아하는 데서 운명이 더해지면 둘의 관계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운명이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우연에 당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나와 주짓수가 그랬다. 막 입문해서 그저 좋아하는 수준으로 주짓수를 즐기던 나는 열독하던 페미니즘 책에서 운명의 단서를 발견했다. 그 순간 읽고 있던 책도, 나의 대책 없는 열망도 페이지가 넘어갔다.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차렸겠지만 나는 운명론자다. 페미니스트인 내가 주짓수와 만난 건 운명이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그리고 서프러제트,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름을 떠올려주길. 알려진 대로 서프러제트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여성 참정권 운동과 그 운동가를 칭하는 용어이다.
바로 이 서프러제트의 투쟁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를 보면 노동자이자 운동가인 여성들이 허름한 창고에 모여서 무술을 배우는 장면이 5초 남짓 나온다.
“세상을 바꾸려면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야 해요.”
드레스 차림으로 상대의 팔을 꺾어서 넘어뜨리는 기술을 가르치는 여성의 이름은 이디스다. 배우 헬레나 보넘 카터가 연기한 이디스 마거릿 개러드는 실존 인물이었다. 영화에서는 약사로 등장하지만, 실제 직업은 자기방어술 전문가였다.
기록을 뒤져보면 이디스는 주짓수와 자기방어술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1908년 런던에서 주짓수에 영감을 받은 자기방어술 학교를 열고 여성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자기방어를 가르쳤다. 그의 활약을 지켜본 서프러제트들이 자신들을 무술로 양성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이들은 의기투합했다. 아예 서프러제트를 위한 자기방어 실습소를 열어 운동가들을 본격적으로 훈련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디스는 참정권 운동의 중심 세력인 여성사회정치연맹(WSPU)의 핵심 인사로 급부상했다.
현대적인 페미니즘 운동만 접한 사람은 참정권 운동가들이 왜 무술을 배웠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 답은 서프러제트가 국제주의적인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 그룹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여성 인권운동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운동가를 조직화하고 무장시켰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이디스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그는 주인공 모드에게 자신을 ‘운동가가 아닌 군인’이라고 소개한다.
주짓수는 최대한 힘을 아끼며 공격과 방어를 한다. 양민영 제공
그러나 처음부터 이들이 무력 투쟁을 일삼았던 건 아니다. 참정권 운동가들은 오랜 세월 평화집회, 선전, 낙선운동 등으로 여성 참정권의 필요성을 알렸다. 하지만 그 효과는 너무나 미미했다. 영국 정부는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여성의 목소리를 가볍게 묵살했다.
참정권 쟁취가 절박했던 서프러제트는 평화 시위에서 도시 게릴라식 무력 투쟁으로 운동의 방식을 바꿨다. 이를 중심에서 이끈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에멀린 팽크허스트이다. 그는 1903년에 여성사회정치연맹을 결성하고 투석·폭탄을 사용하는 전투를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문장으로 부연해서는 실감하기 어렵겠지만 이들의 투쟁은 투옥은 물론 사망자까지 발생할 정도로 격렬했다. 자연히 서프러제트에게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은 일상이 되었고 실질적인 대응 전략이 필요했던 그들은 주짓수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 많은 무술 중에 왜 하필 주짓수일까? 이디스는 주짓수에서 파생된 자기방어술이 여성과 같은 약자들에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그가 만든 자기방어술의 세가지 원리는 힘의 균형감각, 계략과 기습 기술, 가격타 아끼기이다. 쉽게 말해서 주짓수로 싸우면 최대한 힘을 아낄 수 있다는 거다.
페미니스트들은 나보다 힘이 세고 체격이 큰 상대가 먼저 지치도록 만든 다음에 관절, 얼굴, 목 등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집요하고 효율적으로 공격하는 주짓수의 원리를 이용했다. 이들의 몸은 주짓수를 통해서 정치화됐고 그 결과 1918년에 부분적인 참정권을 획득하고 1928년에 완전하게 평등한 참정권을 쟁취해 기나긴 투쟁에서 승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대 남성들에게는 주짓수가 찬밥 신세였다고 한다. 남성들은 주짓수가 피지배자들의 이국적인 무술이라는 이유로 ‘여자나 배울 법한 무술’이라고 폄하했다. 마치 이제는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았지만, 당대에는 부녀자들이나 배울 문자라고 무시당했던 한글처럼 말이다. 지금 주짓수를 가장 열렬하게 사랑하는 이들이 백인 남성임을 떠올리면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자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쓴 주짓수에 관한 글이 일부 남자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 같다. 지난 원고(<한겨레> 8월6일치
‘몸으로 체스 두는 시간, 주짓수’) 온라인판에 실린 댓글을 보면 일부 독자들은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여성이 주짓수를 배우는 것, 배워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또 뭐라도 아는 것처럼 글을 쓰는 것 등등 여러 대목에서 부지런하게 화를 발산했다.
아마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나는 주짓수에 관해서 쥐뿔도 모르는 여자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쥐뿔도 모른다면 그들도 마찬가지다. 왜 그처럼 화를 내는가? 어떤 남성이 사회가 여성의 영역이라고 정해놓은 일, 이를테면 요리나 살림에 관해 글을 쓴다고 해서 여성들이 달려들어 화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좋은 남자라고 칭찬하면 모를까).
‘감히 여자 주제에 주짓수를…’이라고 하기에는 페미니스트와 주짓수는 100년도 전부터 끈끈한 관계였다. 그것도 무려 대륙을 건넌 운명이었다. 그러니까 덮어놓고 화낼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면, 화내는 남자는 정말 매력이 없다. 친절과 상냥함이 현명한 남성의 미덕임을 항시 잊지 않았으면.
※참고문헌: <자신을 방어하기>, 엘자 도를랑 지음, 윤김지영 옮김, 그린비.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