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무심한 듯 쓱, 황금빛 와인과 마술 같은 파스타 [ESC]

등록 2022-10-09 18:05수정 2022-10-09 19:18

권은중의 생활와인 _ 드 비테 호프슈테터
이탈리아 친구가 바질, 토마토, 치즈, 아몬드 등을 갈아 쓱쓱 비벼 준 파스타와 드 비테 호프슈테터.
이탈리아 친구가 바질, 토마토, 치즈, 아몬드 등을 갈아 쓱쓱 비벼 준 파스타와 드 비테 호프슈테터.

이탈리아에서 현지인들의 집에 초대받아 가보면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실내 인테리어다. 아파트라도 3m가 넘는 높은 층고 덕에 공간감이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패션의 나라답게 벽면을 알록달록한 파스텔톤으로 칠하면서도, 고전적 색채의 가구로 조화를 맞췄다. 그렇지만 화려한 색상의 커튼과 모던한 디자인의 전등 같은 소품으로 전체적으로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국적인 식물들도 눈길을 끌었다.

내가 눈여겨보는 건 또 있다. 파스타 장이다. 파스타 원조국답게 이탈리아 가정의 주방 수납장에는 각종 형형색색의 파스타는 물론 쌀, 말린 빵 등이 가득하다. 또 토마토소스는 물론이고 전세계의 향신료, 마르살라 같은 조리용 와인 등을 찾을 수 있다. 가끔 한국 라면과 참기름도 마주친다.

파스타 장은 이탈리아식 환대의 출발점이다. 이탈리아 가정의 손님 차림은 의외로 간단하다. 샐러드 하나에 전통 빵과 각종 살라미를 꺼내놓고 와인을 내준다. 그런데 이탈리아 친구들은 함께 먹으며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주섬주섬 일어나 파스타를 말아준다. 뚝딱 만드는 파스타지만 참 맛나다. 마술 같다.

9월 초 이탈리아에 머물 때 이탈리아인 친구가 집에 초대해서 만들어준 시칠리아식 초간단 파스타도 그런 마법의 하나였다. 리코타 치즈와 아몬드 그리고 토마토와 바질을 넣어 믹서로 갈아 크림처럼 만든 뒤, 자전거 바퀴를 잘라놓은 모양의 큼직한 파스타인 파케리(Paccherri)에 쓱쓱 버무려준다. 너무 쉽게 만들어 ‘이탈리아인들은 다 파스타 장인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드 비테 호프슈테터.
드 비테 호프슈테터.

이미 전채로 통밀빵과 산다니엘레 프로슈토(이탈리아식 생햄) 그리고 라치오(로마가 있는 중부의 주)식 갑오징어 스튜를 스파클링 와인과 먹은 뒤였지만 이 파스타는 입맛을 당기게 했다. 뭔가 빈 듯하지만 비지 않은 꽉 찬 맛이었다. 시칠리아인들의 지혜로운 레시피 덕도 있겠지만 큼직한 파케리 면이 주는 압도감도 한몫했다. 파케리는 ‘손으로 때렸다’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됐다.

큼직한 면과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섬세한 소스의 파스타와 함께 친구가 새로 내준 와인은 호프슈테터의 드 비테(De Vite)였다. 피노 블랑, 뮐러 투르가우 등을 블렌딩한 이탈리아 북부 와인이다. 석회암 봉우리가 장관인 남알프스 돌로미티 기슭에서 생산된다. 이 와인은 꽃 향과 과일 향이 은은해 아몬드와 리코타를 넣은 파스타와 잘 어울렸다. 아쉽지만 국내에는 수입이 아직 안 되는데, 비슷한 뮐러 트루가우 등의 품종 와인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나의 이탈리아 친구는 이 와인을 즐기는 이유가 상큼한 맛도 맛이지만 병 디자인 때문이라고 말했다. 호프슈테터의 화이트와인 디자인은 은은한 황금빛으로 통일돼 있다. 친구 집의 커튼이나 벽의 장식 등이 차분한 금색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선택인 듯했다.

이탈리아에는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라는 말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궁중용어였던 이 말은 ‘힘든 일을 무심하게 처리하는 듯한 태도’를 뜻한다. 이탈리아인들의 기질을 설명하는 데 쓰이는 이 단어는 수수하지만 화려한 이탈리아의 인테리어는 물론 ‘단순하지만 복잡하다’라는 이탈리아 요리의 특징을 납득시켜준다. 이탈리아 친구들이 술을 마시다가 무심한 듯이 파스타를 쓱쓱 만들어 오는 것도 이런 기질 덕분이 아닐까.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쉿! 뭍의 소음에서 벗어나 제주로 ‘침묵 여행’ 1.

쉿! 뭍의 소음에서 벗어나 제주로 ‘침묵 여행’

간장에 졸이거나 기름에 굽거나…‘하늘이 내린’ 식재료 [ESC] 2.

간장에 졸이거나 기름에 굽거나…‘하늘이 내린’ 식재료 [ESC]

[ESC] 사랑·섹스…‘초딩’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3.

[ESC] 사랑·섹스…‘초딩’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4.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커피 도시 강릉을 지키는 일흔의 ‘커피 구도자’, 박이추 [ESC] 5.

커피 도시 강릉을 지키는 일흔의 ‘커피 구도자’, 박이추 [ESC]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