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메르 풀라르의 오믈렛과 화덕에서 오믈렛을 구워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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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에 먹으러 다녀왔다. 이렇게 말하면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프랑스 하면 와인인데, 와인도 나지 않는 동네에서 무슨 먹거리 타령이냐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노르망디는 프랑스에서도 알아주는 미식 여행지다. 발달한 낙농업과 유제품, 영불해협에서 나는 풍부한 해산물, 사과로 만드는 매력적인 술까지 다양한 먹거리와 그에 딸린 이야기가 무궁무진한 곳이 바로 노르망디다.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인기 있는 관광지인 몽생미셸에서 노르망디 미식 여행을 시작해보자. 지난 9월21일 찾은 몽생미셸은 엔데믹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입구부터 북적였다. 첫 목적지인 마을 초입의 식당 ‘라 메르 풀라르’(La Mère Poulard)에도 점심식사를 위해 늘어선 줄이 길었다.
식당은 몽생미셸 수도원에서 일하던 아네트 풀라르라는 여성이 1888년 문 연 여인숙이 시초다. 대표 메뉴는 오믈렛. 보통 베이컨이나 감자, 치즈 등을 곁들여 먹는데 크기가 큼지막하고 눌러보면 폭신폭신한 게 평소 먹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남다른 생김새의 오믈렛에는 사연이 있다. 과거의 순례자들은 썰물 때 광활한 갯벌을 걸어 바다 위의 섬인 몽생미셸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갑자기 들어찬 밀물에 죽는 이도 허다했다. 간난신고 끝에 도착한 순례자들에게 먼저 포만감을 주는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려고 풀라르가 만들어낸 전채 요리가 바로 화덕에서 재빨리 구워낸 오믈렛이었다. 먹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요리사의 마음. 그래서 ‘어머니’(mère)라는 칭호를 얻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값(4만~5만원)에 비하면 아주 만족스럽다고 하긴 힘든 요리였다. 하지만 장소에 담긴 역사를 직접 체험한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식당 안을 메운 손님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식당 입구에 마련된 화덕에선 장작불이 활활 타고, 주방장은 기다란 손잡이가 달린 구리냄비 여러 개를 동시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쉴 새 없이 오믈렛을 부쳐 냈다. 130년 넘게 이어왔을 그 몸짓에 지나는 사람 모두 카메라를 꺼내 들고 또 지갑을 열고 있었다.
화강암으로 된 섬 위에 수백년 동안 쌓아올린 몽생미셸의 장엄한 모습은 여행 전에도 사진으로 많이 보았지만 실제로 마주한 감흥은 사뭇 달랐다. 특히 일출 무렵 물안개 자욱한 가운데 아스라이 솟아오른 수도원 풍경은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프랑스 노르망디 몽생미셸 인근 드넓은 목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들
멀리 몽생미셸을 배경으로 드넓은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양들도 진풍경이었다. 몸뚱이는 하얗고 얼굴만 까만 양들은 프레살레(pré-salé)라고 불린다. 미리 소금을 쳤다는 뜻. 만조 때면 몽생미셸 주변이 다 바닷물에 잠기는데, 그렇게 소금기가 밴 염생식물을 먹고 자란 양이라 따로 간을 하지 않아도 독특한 풍미가 있다고 한다.
몽생미셸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이 별미 양고기를 같은 이름의 식당 ‘르 프레 살레’(Le Pré Salé)에서 맛봤다. 6개월 된 양의 넓적다리 부위를 오랜 시간 구웠다는 요리는 담백하고 부드러웠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겉부분에 꿀을 발라 구운 고기는 마늘크림소스와 잘 어울렸다. 프레살레는 출생지 및 도축지 제한과 연중 230일 이상 방목 등 여러 조건에 부합해야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음식을 고부가가치 관광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스토리 못지않게 식재료 품질에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게 과연 미식의 나라다웠다.
전통주 시드르를 만드는 양조장을 연결한 사과술의 길.
다음 방문지는 버터로 유명한 이지니(이즈니로 많이 알려짐). 빵을 좋아하거나 음식에 관심이 있다면 이미 익숙할 이름이다. 요즘은 국내에도 유명한 빵집들이 이지니 버터를 사용해 빵을 만든다는 걸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쌀이 다르면 밥맛이 다른 것처럼, 버터도 빵 맛을 천양지차로 바꾼다. 이지니 버터는 일종의 보증서 같은 개념이다. 설령 이지니라는 이름을 모른대도 입은 이미 그 맛에 길들여졌을 수도 있다. 크루아상이나 카늘레처럼 우리가 흔히 먹는 빵과 디저트류에 이미 버터가 듬뿍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지니 버터는 프랑스 정부가 고품질 지역특산품에만 부여하는 등급인 ‘원산지 보호 명칭’(AOP) 인증을 받은 3개의 버터 중 하나다. 정확히는 이지니쉬르메르(Isigny-sur-Mer)라는 인구 3000여명의 작은 마을에서 만들어진다. 버터는 어디서도 살 수 있는데 굳이 이지니를 찾아간 건 어떻게 생긴 동네인지 궁금해서였다. 가는 길에 너른 초지와 한가로이 풀 뜯는 흰 소들이 차창 밖으로 움직이는 풍경화처럼 흘러갔다.
이지니 버터 공장 바로 앞에 있는 협동조합 매장에 들렀다. 공장은 인근 400여개 농장에서 우유를 공급받는다. 공장 직원만 1200명이라니 마을의 절반은 버터로 먹고사는 셈이다. 매장에서 만난 노부부가 마침 커다란 버터를 집어들길래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많이 사느냐” 물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과 함께 “버터가 안 들어가는 (프랑스) 요리가 있냐”는 답이 돌아왔다. 막 계산한 버터 아이스크림을 한숟갈 뜨며 그저 멋쩍게 웃었다.
이지니 마을엔 캐러멜 전시관도 있다. 버터에 비하면 역사가 100년 정도로 짧지만 비트에서 추출한 설탕과 이지니 버터 등 지역 재료만 사용한 이지니 캐러멜은 인기가 높다. 제품 종류가 다양하고 부피가 작아 선물용으로도 그만이다.
버터를 먹었으면 다음은 치즈 차례. 노르망디엔 카망베르, 리바로, 뇌샤텔, 퐁레베크 등 4가지 치즈가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치즈 숙성실을 포함한 제조 공정을 견학할 수 있는 리바로(Livarot) 치즈 공장을 방문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건물 밖까지 꼬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리바로 치즈는 숙성 과정에서 소금물로 표면을 자주 닦아내 특유의 향과 맛을 낸다. 동그랗게 모양 잡힌 치즈 옆구리엔 골풀을 둘둘 마는데, 그게 계급장과 비슷하다고 해서 별명이 ‘대령’이다. 공장에 딸린 기념품점에서 시식을 하고 작은 조각을 구입했다. 옅은 오렌지색 껍질 속의 치즈는 잘라내자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입안에선 곰삭은 묵은지처럼 묵직한 맛이 느껴졌다. 바디감이 있는 레드와인과 찰떡궁합이었다. 노르망디에서 그렇게 조금은 뜬금없이 인생 안주를 만났다.
노르망디는 습한 날씨 탓에 포도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따라서 와인도 만들지 못한다. 대신 예부터 사과 농사가 흥했다. 지천으로 널린 사과로 즙을 내 발효시켜 만든 발포주가 시드르(Cidre)다. 노르망디 농부들이 흔히 먹던 술이다. 알코올 도수 2~6도로 식전주로 주로 즐긴다. 시드르를 증류해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면 사과 브랜디인 칼바도스(Calvados)가 된다. 최근엔 한국에도 시드르와 칼바도스를 빚는 양조장이 충주, 예산 등지에 자리잡을 정도로 대중적인 술이 됐다.
어느 나라엘 가도 양조장만큼 흥미진진한 여행지는 찾기 힘들다. 술은 지역의 기후, 문화, 역사를 담는 그릇이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막 술독에서 퍼낸 잘 익은 술 한잔을 곁들이다 보면 누구라도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노르망디엔 아예 시드르와 칼바도스를 만드는 양조장 20여곳을 연결한 약 40㎞ 구간의 ‘사과술의 길’(Route du Cidre)이 조성돼 있다.
마침 노르망디는 이제 막 사과 수확철이었다. 다니는 곳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나무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내키는 대로 풍경을 감상하며 사과술의 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 ‘뵈브롱앙오주’(Beuvron-en-Auge)라는 마을에 내렸다.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된 적이 있는 인구 200여명의 시골마을. 투박한 나무기둥으로 예쁜 줄무늬를 만든 노르망디 전통가옥이 올망졸망 늘어선 광장은 아담했다.
광장 한켠의 크레프(크레페) 집에서 노르망디식 메밀부침개인 갈레트와 시드르 한잔을 시켰다. 식당에서 시드르를 주문할 때는 뒤에 붙는 단어를 확인하자. 드라이한 맛을 선호한다면 ‘브뤼’(brut)를, 달콤한 맛을 원한다면 ‘두’(doux)를 고르면 된다. 술을 담는 잔도 유심히 살펴보자. 시드르는 테라코타로 만든 잔에 따라 마셔야 제격이다. 유리잔을 가질 정도로 윤택하지 못했던 노르망디 시골 사람들은 볼레(bolée)라고 불리는, 진흙을 구워 만든 잔에 사과술을 따라 마셨다. 찌그러진 양철그릇에 마셔야 막걸리 맛이 나는 것과 유사한 이치다. 메밀전병에 막걸리 한잔하듯, 갈레트에 시드르 한사발이면 그럴듯한 노르망디 현지인 상차림 완성이다.
김형규 홍신애요리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