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사람이 해가 뜰 즈음 강가를 따라 조깅하고 있는 모습. D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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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봄, 보스턴 마라톤 출전을 준비 중이던 켄트주립대학 학생 딕 코디어는 위스콘신주 하트포드시에 있는 집 주변에서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순찰 중이던 경찰차가 그를 멈춰 세웠다. 도로를 따라 달리는 행위는 “보행자에 의한 불법 도로 점유”이기 때문에 교통 위반 딱지를 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었다. 결국 법정까지 선 코디어는 무죄를 선고 받았고 시장의 사과 편지까지 받았지만 경찰은 단속을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하트포드시 서부에서 레이 크로더스가 같은 혐의로 경찰의 추격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
같은 해 11월, 한국의 <동아일보>는 <로이터>를 인용해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온몸 흔들기 운동(조깅)”을 소개했다. ‘조깅’이라는 단어가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가벼운 달리기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영어사전을 참고해 번역한 담당 기자의 실수일 테지만, 달리기를 하면 온몸을 흔들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니 아주 틀린 번역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 하지만 미국에서조차 “온몸 흔들기 운동”은 낯선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달리기를 하다 경찰의 추격을 받은 크로더스는 경찰서에 전화를 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집 근처에서라도 달리게 해주면 안되나요?”
그 무렵 <시카고 트리뷴>에는 경찰에게 의심 받을까 걱정하며 이른 아침에만 달리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다 큰 어른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이웃들을 소개하는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여러 신문과 잡지에 앞다퉈 소개될 만큼 미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조깅 혹은 달리기는 여전히 ‘이상한 취미’ 취급을 당했다. 같은 시기 한국은 어땠을까? 언론에서 다뤄질 만큼 많은 사람이 즐기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1960년대 말 한국 신문에서 달리기에 관한 기사는 대부분 당시 고등학교 입학에 필수적이었던 체력검정 시험의 한 과목으로 ‘달리는 행위’를 어떻게 채점할 것인지를 다뤘다. 비가 내려도 달리기 시험을 치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것이 문제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미국 전역에서 본격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 조깅이 한국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1979년 6월 말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을 통해서였다. 카터 대통령은 당시 막 달리기 1년 차에 접어들고 있던 초보 러너였는데, 그가 방한 일정 중에도 오전 5시에 조깅을 한다는 소식은 신문 1면에 실릴 만큼 큰 화젯거리였다.
카터의 김포공항 도착을 앞둔 1979년 6월29일치 <경향신문> 사설은 그를 “조깅으로 몸단련을 해서 신념과 성실로 가다듬은 정신”을 지닌 정치인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카터 부부는 실제로 방한 기간에 창덕궁 후원에서 숲속 새벽 조깅을 즐겼다. 당시 달리기는 ‘미국 대통령도 매일 하는 운동’이자 오일 쇼크로 전 국민이 강제로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기에 걸맞은 ‘검소한 운동’으로 인기를 끌게 됐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도 카터와의 회담에서 자신도 매일 달리기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에서부터 한국으로 건너온 달리기 열풍은 대체 어디서 시작된 걸까? 미국의 육상 지도자였던 빌 바워먼은 1962년 12월 뉴질랜드 오클랜드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장면을 마주쳤다. 자동차가 대부분의 공간을 점령한 미국 도시와 달리, 오클랜드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공원에서 함께 달리기를 즐기고 있었다. 바워먼은 그를 초대한 동료의 권유로 마지못해 함께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불과 몇백미터를 가지 못하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잠시 멈춰야 했다. 이때 그를 기다려준 사람은 친절한 노인 러너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바워먼은 일류 운동 선수나 한다고 여겨졌던 달리기 훈련을 좀 더 가벼운 형태로 만든 조깅을 전파하기로 마음 먹고, 오리건주 유진시 지역 신문에 부담 없는 달리기 운동을 소개하는 글을 기고한 뒤 사람들을 초대했다. “일요일입니다. 와서 함께 달립시다!” 그의 초대에 200여명의 사람이 응했고,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나 1500명에 이르게 되었다.
달리기 모임의 성공은 <조깅-모든 연령대를 위해 의학적으로 검증된 체력 증진 프로그램>(1967)이라는 제목의 책 발간으로도 이어졌다. 심장병 전문의와 함께 쓴 이 책은 미국 전역에서 베스트셀러에 등극했고, ‘이상한 취미’ 취급을 받던 달리기가 ‘미국적 운동’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는 상황은 그의 사업에도 큰 도움을 줬다. 그는 달리기 신발 브랜드를 창업했다. 바로 나이키다.
1970년대 미국인들은 왜 그렇게 미친 듯이 달리기를 시작한 걸까? 당시 미국에서는 달리기뿐 아니라 온갖 피트니스 산업이 활황을 맞이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베트남 전쟁과 68혁명, 중동 지역에서 비롯한 오일 쇼크로 모두의 삶이 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된 시대적 배경도 있다. 반전을 부르짖으며 68혁명에 가담했던 이들은 시대의 변화에서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라이프스타일 구루로 변신했고, 이후 세대는 삶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췄다.
달리기 유행이 시작되던 50년 전 미국이나 지금의 현실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한국 또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희비극에 대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연대와 지지를 표하고 행동에 나서는 것과 별개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집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대상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 뿐인 것만 같다.
내 몸과 마음이야말로 누구에게도 무엇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통제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이걸 일종의 도피라고 불러야 할까. 혹은 최소한의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한국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고 뒤늦게 혼자서 달리는 기쁨을 알게 된 몇 년의 시간은 어쩌면 거의 처음으로 나 자신을 꾸준히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가지 달리기가, 100명이라면 100가지 달리기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박재용 프리랜스 통번역가·큐레이터
서울을 중심으로 현대미술과 영화계에서 주로 일한다. 인스타그램 @one_day_one_run에 명상과 달리기를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