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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라…주짓수, 운동의 종교화 [ESC]

등록 2023-08-05 10:00수정 2023-08-05 22:32

#오늘하루운동 주짓수
양민영 작가(위)가 상대의 가드(아래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의 몸을 양 다리로 조이고 양팔로 깃을 잡는 등 상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매는 기술)에서 벗어나는 기술인 가드 패스를 시도하고 있다. 윤성빈 제공
양민영 작가(위)가 상대의 가드(아래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의 몸을 양 다리로 조이고 양팔로 깃을 잡는 등 상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매는 기술)에서 벗어나는 기술인 가드 패스를 시도하고 있다. 윤성빈 제공

춤, 노래, 예배 그리고 운동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혼자 하기보다 여럿이 하면 더 즐겁다는 거다. 이는 실험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옥스퍼드대학의 진화인류학과 로빈 던바 교수팀은 여럿이 운동한 사람은 혼자 운동한 사람보다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이 2배나 늦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함께 운동하면 엔도르핀이 더 많이 나와서 그렇다고 한다.

주짓수만큼 ‘함께’라는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동이 또 있을까. 체스를 혼자 둘 수 없듯 인간 체스인 주짓수도 혼자서는 성립 불가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19는 주짓수의 무덤이라고 할 만한 최악의 암흑기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도장을 떠나지 않은 충성파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건강염려증 환자답게 팬데믹이 본격화하자마자 도장으로 향하던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죽어버린 주짓수가 부활하기를 기다렸다.

강해지고 싶은 욕망에…

최근엔 더 꾸준히 수련하기 위해서 다니던 도장을 옮겼다. 낯선 환경에서 수련하기도 벅찬데 새로운 얼굴을 어림잡아서 50명쯤 만났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외부인’은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스파링이 너무 공격적이지 않은지, 또 만에 하나 무례하게 보일까 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파트너의 표정을 살피고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하느라, 운동만 할 때보다 서너배쯤 빨리 지쳤다.

적응 기간 첫날엔 주짓수 도장에 처음 발을 들였던 날이 떠올랐다. 초창기 브라질리언 주짓수 주창자인 엘리오 그레이시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고 사람들은 규정에 따라서 한 명도 예외 없이, 흰색 도복을 입고 있었다. 또 다른 규정 가운데 ‘자존심을 버려라’, ‘자아를 문밖에 두고 오라’는 문장을 보고 잘못 읽은 게 아닌가 눈을 의심했다. 수업이 끝나고 ‘라인업하라’는 지시에 따라 일렬로 서서 지도자의 훈화를 듣던 모습까지 모든 게 생소하면서 기이했다.

그러나 초반에 느낀 거부감이 무색하게, 내부인이 되자마자 주짓수 커뮤니티의 독특한 문화를 빠르게 흡수했다.(강해지고 싶은, 숨은 욕망을 주짓수가 자극했기 때문이다) 주창자의 생애를 검색하고 흑백 필름으로 남아 있는 초저화질의 결투 영상을 감상했다. 또 아나콘다, 길로틴, 닌자 등의 단어를 즐겨 쓰는 허세 넘치는 작명 스타일에도 익숙해졌다. 나중에는 말끝마다 ‘오스’(일본어에서 유래한 인사말 내지 감탄사. 예의·존경·감사를 뜻하는 주짓수 용어)를 남발하는 ‘오스남’들을 봐도 대수롭잖게 지나쳤다.

주짓수를 배우기 전에도 4년쯤 크로스핏(고강도 기능성 운동) 커뮤니티에 몸담은 적이 있었다. 크로스핏이야말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창시자가 개발한 피트니스 브랜드로 특유의 커뮤니티 문화를 기반으로 인기를 끌었다. 크로스피터들은 ‘박스’라고 부르는 그들만의 커뮤니티 안에서 깊은 유대를 맺으며 운동 능력을 키운다. 하지만 두 가지 운동을 모두 경험한 입장에서 볼 때, 의도적으로 커뮤니티 문화를 조성한 크로스핏조차 주짓수보다 커뮤니티 성향이 강한 것 같진 않다.

주짓수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외부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한다. 우선 주짓수를 잘하고 싶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기술 훈련, 스파링을 기본으로 세미나, 대회, 승급식에 참여한다.(이때 구성원끼리 주고받는 조언과 피드백은 지도자의 코칭만큼이나 중요하다) 유니폼을 만들어서 나눠 입고 체육관의 심벌을 본뜬 패치를 도복에 붙이고 구성원의 취업, 결혼, 2세 출생 등을 함께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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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만들기, 최고의 성장 산업

여기까지는 유대가 돈독한 체육관에서 나타나는 전반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주짓수만의 커뮤니티적 성향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구성원들이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몸을 부대낀다는 점이다. 너무나 빈번한 접촉 때문에 싫든 좋든 유대감과 동료 의식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주짓수를 향한 광적인 사랑과 충성심이 공동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어디에나 마니아층은 있기 마련이지만 주짓수 광인들의 집념은 단순한 마니아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들에겐 ‘콜리플라워 귀’(한국에서는 만두 귀)라고 부르는, 잦은 접촉으로 인해서 변형된 귀는 자랑스러운 훈장이고 심각한 부상에도 어떻게 하면 훈련을 계속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특히 젊은 남자들의 충성심은 유독 강하다. 그들은 마치 매력적인 데이트 상대를 만난 것처럼 주짓수에 빠져든다. 자아와 남성성을 채우기 위해 주짓수에 몰두하고 단시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낸다. 부러우면서 짜증나기도 한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 집단 내의 고유한 문화, 외부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 벨트에 따른 계급제, 충성심 경쟁…. 이쯤 되면 ‘컬트’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미 구글에서 ‘컬트 주짓수’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관련된 글이 10페이지도 넘게 이어진다.

실제로 주짓수 수련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밈 중에 ‘힉슨 그레이시(엘리오 그레이시의 아들이자 세계적인 이종격투기 선수)가 하느님이고 호저 그레이시(세계 주짓수 대회의 금메달리스트)가 예수, 각 도장의 관장은 목사’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렇게 보면 주짓수 수업도 일종의 종교의식 같다. 기술 설명은 설교, 연습은 기도, 스파링은 찬양을 닮았다.

운동에 돈을 아끼지 않는 세대에게 운동은 신체를 단련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개개인의 브랜드 자체이자 정체성을 대변한다. 자아 찾기는 전통적으로 종교의 영역이었으나 요즘은 운동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체육관은 휴대폰을 던져놓은 채 타인과 직접 연결되고 정신과 육체에 오롯이 몰입하는, 진귀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엔 모든 게 지긋지긋했어요.”

오랫동안 몸담았던 주짓수 커뮤니티를 떠난 이들에게서 들은 말이다. 하나의 커뮤니티에서 여러 사람과 부대끼면 그에 따른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운동을 통한 자아 찾기 트렌드는 갈수록 그 세가 강해질 전망이다. 자아와의 진정한 연결을 강조하는 신학자 캐스퍼 터 카일의 말을 인용하면 ‘의미 만들기는 최고의 성장 산업’이다.

양민영 작가

사회적기업 운동친구의 대표이며 「운동하는 여자」를 썼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운동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못 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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