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8일 인도 라자스탄주에 있는 ‘핑크시티’ 자이푸르의 카페에서 한 인도인이 맞은편에 있는 이 도시의 랜드마크 하와마할 궁전을 바라보고 있다.
인도의 인구는 14억2862만명으로 세계 1위다. 국민의 40%가 사용하는 힌디어 외에도 14개의 공용어가 있다. 국내총생산(GDP)은 3조달러로 세계 6위. 국민 대부분이 힌두교를 믿지만, 이와 별개로 3억명의 신을 모신다. 이 압도적인 숫자들로 인도는 다양하고 혼란스러우며 매력적이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유적과 현지인들의 독특한 생활 문화를 볼 수 있는 매혹의 땅이기도 하다. ‘인도는 배낭여행자의 종착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인도 여행은 최근 더욱 ‘핫’해졌다. 지난 6월부터 시작한 문화방송(MBC) 예능 프로그램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2’ 때문이다. ‘태어난 김에 사는 사람’이란 수식어를 가진 웹툰작가 기안84와,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 유디티 출신 방송인 덱스가 인도 여행을 함께 한다. 영혼을 정화해준다는 갠지스강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빨래터에서 빨래를 두들기고, 사원에서 무료 급식을 받아먹는 등 인도와 하나가 되어 문화를 체험한다.
인도는 내게도 오랫동안 꿈꿨던 여행지였다. 팬데믹이 끝나고 국경이 열린 올해 여름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간 곳은 인도 북서부에서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라자스탄이다. 힌디어로 ‘라자’는 왕, ‘스탄’은 땅이다. 이름 그대로 ‘왕들의 땅’인 라자스탄주에는 핑크·화이트·블루시티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세 도시가 있다. 올해 7월 말부터 2주간 이곳을 여행하며 21세기 가장 아름다운 인도를 경험했다.
‘핑크시티’ 자이푸르의 옛 시가지 모습.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많다.
지난 7월26일 인도 델리 공항에 내려 5시간 기차를 타고 라자스탄주의 주도인 ‘핑크시티’ 자이푸르로 향했다. 1876년 이곳에 들른 영국 에드워드 왕세자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도시를 분홍색으로 칠하면서 핑크시티가 됐다. 이후로 이곳의 건물은 붉은 사암(모래 크기의 작은 입자들이 쌓인 암석)으로 건축돼 빛을 받으면 분홍색으로 빛난다고 한다. 늦은 밤 도착해 처음 만난 이 도시의 색깔은 붉은 갈색이었다.
이튿날 아침 숙소 직원인 재키에게 여기서 ‘뭘 하면 좋겠냐’고 묻자 의외로 영화 관람을 권했다. “관광객들이 꼭 찾는 성벽과 궁궐도 있지만 나라면 영화관을 갈 거야. 볼리우드(발리우드) 문화를 누릴 수 있거든.” 인도 여행을 이제 막 시작했는데 영화를 보라고? 반신반의했지만, 날이 더워 현지인의 조언에 일단 따라 1976년에 문을 연 ‘라지 만디르 영화관’을 방문했다. 최신작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 ‘로키와 라니’를 상영하고 있었다. 전통 있는 영화관의 우아함이 강조된 인테리어 덕일까. 궁궐에 초대된 귀족과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4개 등급으로 나눠진 좌석별로 가격이 다르고, 뒷좌석일수록 비쌌다. 중간 정도인 에메랄드 좌석을 170루피(약 2700원)에 끊었다. 표를 사는 창구부터 영화관에 입장하는 줄까지 여성용이 따로 배정돼 있는 게 독특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라지 만디르’ 영화관의 내부.
영화 시작과 동시에 막이 오르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인도 관객들은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주인공이 나쁜 행태를 보이면 야유를 퍼부었고 갈등이 해결되면 휘파람을 불었다. 인도 영화 특유의 노래와 춤이 시작되면 깔깔거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옆 사람과의 대화는 예삿일이었다. 조용히 극에 몰입하는 한국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낯선 풍경이었다. 현지인들의 자유로우면서도 나름의 질서를 띤 이 묘한 분위기에, 나도 시나브로 스며들었다. 같이 큰 소리로 웃고 리듬에 맞춰 몸을 달싹이며 영화를 감상했다. 핑크시티는 이렇게 일상의 관성을 단번에 깨버렸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목이 말랐다. 영화관 맞은편에 있는 라시(인도의 발효 요구르트) 가게 ‘라시왈라’에 들렀다. 1944년 영업을 시작한 이곳의 음료는 ‘인도 3대 라시’로 꼽힌다. 원조 주변엔 모방자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주변에 같은 이름의 매장이 많지만 312번지 검정 간판을 단 곳이 원조다. 우유와 요구르트, 설탕이 섞인 음료에 치즈를 살포시 얹어 황토 도자기 그릇에 담아 준다. 상큼하고 달콤하며 시원하다. 큰 사이즈가 80루피(약 1265원).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더 북적인다.
숙소는 자이푸르의 랜드마크인 하와마할 근처에 잡았다. 아름다운 핑크빛을 뽐내는 이 사암 궁전은 1799년 왕실 여성들이 궁궐 안에서 시장과 거리 축제를 구경할 용도로 지어졌다. 왕녀들은 정교한 격자무늬로 장식된 953개의 작은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구경했다.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는 구조다. 1천개에 가까운 창문들은 환풍구 기능도 한다. 무더운 여름 실내 온도를 선선하게 유지할 수 있어 하와마할은 ‘바람의 궁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궁전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모습도 좋았겠지만, 워낙 관광객이 붐비는 곳이라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게 나는 좋았다. 하와마할 맞은편 ‘타투 카페’나 ‘윈드 뷰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감상하면 안성맞춤이다.
‘화이트시티’ 우다이푸르에서는 시내 어디서든 호수와 흰 건물을 볼 수 있다. 햇살을 받은 흰 건물이 금빛으로 보인다.
7월의 마지막 날, 자이푸르에서 우다이푸르로 이동했다. 기차로 7시간35분이 걸렸다. 라자스탄주 남부에 있는 우다이푸르는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다. 건축물이 대부분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지어져 도시 전체가 흰색을 띠고 있어 화이트시티로도 불린다. 도시 중앙의 피촐라 호수를 흰색 궁궐과 호텔들이 둘러싸고 있다. 2018년 아시아 최고 부호 무케시 암바니의 딸이 1128억원이 넘는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도 유명하다.
인도로 떠나기 전, 2014년에 두 달 동안 인도를 다녀왔고 우다이푸르를 최고의 여행지로 꼽았던 지인 임준엽(34)씨에게 이곳의 ‘핫플’이 어디냐고 물었다. “하루를 잡고 천천히 시티팰리스를 구경해 봐. 최근까지 귀족들이 살던 곳이라 라자스탄 문화 양식을 느낄 수 있고, 박물관이 함께 있어 볼거리가 충분해.”
우다이푸르 시티팰리스에서 한 인도 어린이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라자스탄주 전체에서 가장 큰 궁전 시티팰리스는 화이트시티의 대표 관광 명소다. 1553년에 우다이푸르를 건설한 우다이 싱 2세가 처음 지었고, 이후 왕들이 건물들을 증축했다. 이렇게 해서 시티팰리스가 완성되기까지 무려 400년이 걸렸다. 지금도 여전히 궁궐 안에는 왕실 가족이 살고 있다. 다만, 왕실이 많이 축소돼 현재 본관 건물은 박물관으로, 나머지 건물 일부는 호텔로 개조해 여행객들을 받고 있다. 입장료 300루피(약 4720원)를 내고 시티팰리스에 들어갔다. 입장하면 정원과 무기박물관이 나온다. 무기박물관에서는 군사들이 실제 궁궐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무기들을 시대별로 볼 수 있다. 이곳을 거치면 몸수색을 한 다음 궁궐 내부로 입장할 수 있다.
시티팰리스는 피촐라 호수와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망을 자랑한다. 또 이곳은 세밀화가 유명하다. 기둥 하나에도 정교한 그림을 새겨 넣었고, 방마다 서로 다른 조각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궁궐 전체가 위대한 조각품이나 다름없다. 당시 생활 양식도 엿볼 수 있었다. 부엌과 화장실은 물론 악기와 당시 귀족의 의상, 체스판, 밥그릇까지 보존돼 있다. 가볍게 보고 나오려 했지만, 세 시간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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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시티’ 조드푸르에 밀집해 있는 파란 주택들.
지난 2일 ‘화이트시티’ 우다이푸르에서 ‘블루시티’ 조드푸르로 이동할 땐 버스를 탔다. 이 구간엔 기차가 없다. 경적 소리와 거친 운전 탓에 이동 중에 잠을 자기가 어려웠다. 4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조드푸르 공국의 군주인 라오 조다가 1459년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방어용 성을 축조했는데 현존하는 인도 최대의 요새인 메헤랑가르성이다. 도시 초입에 36m 높이의 육중한 장벽을 세우며 성을 지었다. 성안으로 들어오려면 7개의 문을 통과하도록 설계됐고 각 문에는 쇠창살이 꽂힌 철문 등이 여전히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예전엔 카스트 제도의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이 사는 집만 파랗게 칠할 수 있었다. 오늘날 카스트 제도에 따른 차별이 문화적으로 여전하지만 적어도 법적으로는 금지되면서 모두가 집을 파랗게 칠했고, 조드푸르가 ‘블루시티’로 조성됐다고 한다. 고온다습한 날씨 때문에 벌레 퇴치제를 푸른색 페인트에 섞어 칠해 블루시티가 됐다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파란색은 조드푸르의 매력 포인트가 됐다. 블루시티는 할리우드 영화 ‘다크 나이트’,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을 비롯해 배우 공유와 임수정이 나온 한국 영화 ‘김종욱 찾기’의 배경으로도 등장했다.
이곳에선 무엇을 즐겨 볼까. 조드푸르에 도착한 내 에스엔에스(SNS) 사진을 보고 8년 전 이곳에 다녀간 지인 장하늘(30)씨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조드푸르에 갔군요! 오믈렛숍에서 마살라를 추가한 오믈렛을 꼭 드세요.” 인도에서 오믈렛을? 생소한 조합이었다. 조드푸르의 명소인 시계탑을 중심으로 한 시장 입구에 그 가게가 있었다. 이곳의 주인장은 60대 남성이었는데 백발을 헤나로 물들인 주황색 머리 색깔이 우선 시선을 끌었다. 그는 작은 숟가락으로 껍질을 두들겨 달걀을 깨고 소금과 채 썬 양파와 피망을 넣었고 기름을 넣은 프라이팬이 달궈지자 달걀물을 부쳤다. 장인의 유려한 손놀림에 한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지인 장씨의 추천 메뉴인 ‘마살라 치즈 오믈렛’을 주문했다. 요리의 마감재는 식빵이었다. 이곳에선 오믈렛이라 부르지만 조금 특별한 달걀 토스트였다.
“30년이 넘은 가게예요. 제가 물려받기 전 아버지 때부터 유명했어요. 미국, 프랑스, 일본 신문과 잡지에 몇 번이나 나왔어요. 섬세한 요리로 유명한 프랑스에서 우리 오믈렛을 칭찬했을 땐 기분이 정말 좋았죠. 매일 1천개의 계란을 굽고 장사가 잘되는 날엔 1500개도 써요.” 자부심 넘치는 주인의 말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토스트를 씹을수록 인도의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여기 한국의 스타 공유도 왔다 갔죠?”라고 묻자, 주인은 방명록을 펼쳤다. 2012년 배우 공유가 작성한 글귀가 나왔다. 2년 전인 2010년 영화 촬영하러 들렀을 때 자주 먹던 가게가 그대로 있어 기쁘다는 내용이었다.
오믈렛숍의 대표 메뉴 ‘마살라 치즈 오믈렛’.
대항해 시대에 탐험가들은 막대한 부와 명성을 위해 인도를 찾았다. 21세기의 나는 평소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신선한 자극을 구하며 인도를 찾았다. 인도 여행을 하는 동안 길거리 상인들에게서 “노 프로블럼”, “에브리싱 이즈 파서블”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조급해하지 말고 현지인들의 모습처럼 여유를 가지라는 뜻으로 들렸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내 안의 우물인 편견이 깨졌고, 감탄했고, 입맛이 돋았다. 인도 여행에선 ‘꼭 해야 할 것’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없다. 여기선 길거리에서 들려온 말처럼 노 프로블럼이고, 에브리싱 이즈 파서블이니까.
자이푸르·우다이푸르·조드푸르/글·사진 조서형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