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5시가 넘으면 창을 활짝 열어 영업하는 꼬치구이 전문점 ‘마요네즈’. 지난 1일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맥주 등을 마시며 즐기고 있다. 박미향 기자
5, 4, 3, 2, 1. 드디어 오후 4시. ‘남영돈’의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아이돌 공연장에 입장하듯 들뜬 표정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18석이 금세 찼다. 가게 밖에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20여명이 서성였다. 지난달 30일 서울 남영동에 있는 돼지고기 전문점 남영돈의 풍경이다. 인근에 있는 ‘남영닭’이나 레트로 감성으로 한껏 멋 부린 포차 ‘밤피장’(밤에 피는 장미) 등 이 골목에 둥지를 튼 여러 식당에서 최근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서울 용산구 크라운해태제과 뒷골목 5개 블록, 남영동 일대(한강대로 72·76·80·88길)가 뜨겁다. 요즘 뜬다는 중구 ‘힙당동’(힙+신당동)과 용산구 ‘용리단길’(아모레퍼시픽 뒷골목 일대)의 아성을 넘보고 있다. 가히 ‘남리단길’이라고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니다.
김근태 선생, 박종철 열사 등 1970~80년대 청춘들을 가두고 희망을 말살했던 고문의 산실 ‘남영동 대공분실’에 이름이 박혀 현대사의 불명예를 안고 산 남영동. 지난해부터 외식업계 히트 상품(식당) 제조기로 불리는 ‘선수’들이 하나둘씩 이곳에 가게를 열면서 오명을 벗고 젊은이의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거리 가운데 있는 베트남 식당 ‘남박’. 이곳은 “베트남 현지에 온 줄”이라는 수식어가 달렸던 용리단길 힙한 식당 ‘효뜨’를 성공시킨 남준영 셰프와 아내 박지은씨가 주인이다. 남준영의 ‘남’과 박지은의 ‘박’이 가게 이름이다. 이곳의 특별한 메뉴는 쌀국수, 강황밥 등으로 구성한 ‘남박 아침 반상’이다. 김규열 매니저는 “베트남 아침 식사 문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아시아 컬처’ 메뉴 중심인 ‘에다마메’의 마파두부 라면. 박미향 기자
이탈리안 레스토랑 ‘살팀보카’의 문어샐러드. 살팀보카는 ‘입으로 뛰어든다’라는 뜻의 이탈리아 음식. 박미향 기자
맞은편에 있는 ‘에다마메’는 2010년대 말 돈가스 샌드위치인 카츠산도 열풍을 일으켰던 한남동 ‘다츠’의 제이콥(본명 현상욱) 셰프가 지난해 연 곳이다. 카츠산도는 그야말로 전국권 히트 메뉴였다. 에다마메는 ‘마파두부’ ‘명란 포테토 사라다’ 등 일식과 중식을 넘나드는 “아시아 컬처” 메뉴를 내놓은 식당이지만, ‘풋콩’ ‘풋콩 껍질째 삶은 것’을 뜻하는 이름처럼 요리에 스민 콩맛이 각별하다. 제이콥 셰프는 “중국 청두에서 마파두부 맛보고 콩맛이 남다른 것을 알았다”며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두반장을 쓴다”고 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살팀보카’의 전필중 셰프도 10여년 넘게 한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실력을 닦은 이다. 나폴리 음식 위주인 ‘지아니스나폴리’도 운영한다. “지난해 3월에 연 이곳은 화덕 피자와 이탈리아 중북부 음식이 중심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피자 장인 프란체스코 마르투치가 스승이라고 했다. “오래전 서울의 감성도 살아있고, 새로운 것을 해보기에 적합한 동네가 여기죠.” 인근에는 을지로를 ‘힙지로’로 만드는 데 공이 큰 주점 ‘보석’의 창업자 중 한명인 조서형씨가 연 ‘남영동경주’도 있다. 지난 1일 저녁 6시, 여기도 만석이었다. 간판도 없는 이 식당에 손님이 몰려든 데는 ‘보석’의 명성이 한몫했다. 연예인도 줄 선다는 삼각지 고깃집 ‘몽탄’의 주인 조준모씨도 이 거리에 몇 년 전 ‘초원’을 열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tvN)에 출연해 바비큐 정신을 알리며 더 유명해진 유용욱씨의 ‘유용욱 바베큐 연구소’도 3년 전 이곳 남영아케이드 골목에 둥지를 마련했다.
‘남양돈’ 불판에서 돼지고기가 익고 있다. 박미향 기자
그러고 보면 유난히 이 거리에는 고깃집이 많다. 첫번째 블록 초입에는 양고기 전문점 ‘화양연가’와 고급 양고기 그릴 바 ‘양식문화’가 마주보고 있다. 남영돈도 힙합 가수 최자가 만든 미식 웹 콘텐츠 ‘최자로드’에 소개돼 날개를 달았지만, 돼지고기의 도톰한 두께와 냉쫄면이 매력으로 작용했다. 본래 이 자리에는 주인 정재범씨의 어머니 조명숙씨가 운영하던 한식당이 있었다. 6년 전 정씨가 지금의 모습으로 바꿨다. 2021년 문 연 남영닭은 외국 레스토랑 경험이 많은 오준탁 셰프와 정씨가 공동 창업한 참나무 통닭구이 집이다. 오 셰프는 “오븐은 온도 올리는 데 한계가 있는데, 참나무는 불 조절에 용이하다”며 “향이 다르다”고 자랑한다.
빼놓지 말고 가봐야 할 식당에 지난해 6월 문 연 ‘오시우’(Osiu)도 있다. 베테랑 박춘선·강형선 셰프가 연 고급 다이닝 레스토랑이다. 이들 30대 셰프가 만든 이곳에는 와인과 페어링하기 좋은 메뉴가 가득하다.
몇 블록 걸어가면 꼬치구이로 손님을 잡아끄는 ‘마요네즈’가 나타난다. 오후 5시가 되면 도로변으로 난 창 여러 개를 활짝 열어젖힌다. 거리가 오롯이 보이는 바가 된다. ‘닭 껍질’ 등 32개 꼬치구이 메뉴와 즉석 떡볶이 형태의 ‘마요즉볶이’ 등이 안주다. 너른 실내에는 히비키, 야마자키 등 일본 위스키가 구비돼 있다. 대구에 본사가 있다. 이민혜 점장은 “서울역에서 가까워 관광객도 오고, 재밌는 스토리도 있어 엠제트 세대가 좋아할 동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동네 스토리’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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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용리단길보다 임대료 저렴…한때 ‘미제고기’ 번성했던 곳
1970~80년대 남영동은 인근에 있는 미군 부대 때문에 ‘미제고기 먹는 곳’, ‘스테끼 골목’으로 불렸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소고기와 소시지, 베이컨 등이 재료였다. 1982년 ‘여성동아’ 8월호를 보면 1970년대 초에는 “시장 안 으슥한 집들 몇이 이런 고기”를 팔았는데 사람들이 “처음 먹어보는 ‘미제고기’가 싸고 푸짐한 맛에” 소문나 “요란한 스테이크 골목을 이루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강산이 6번 변하는 동안 ‘대우이발’을 지킨 황병선(82)씨가 골목의 산증인이다. “수십개 고깃집이 즐비했는데, 지금은 ‘은성집’, ‘털보’ 등 몇 개 안 남았지. 미군들이 쏟아져 나와서 분위기 험할 때도 있었어. 그래도 고기가 맛있으니 많이들 왔어. 배우도 왔다니까. 80~90년대는 직장인들이 많이 왔지. 작년부터 젊은 친구들이 많고. 경리단길 비싸지니까 이리 온 거 같아.” 실제 이 지역 부동산중개업소들에 따르면 삼각지 일대와 ‘용리단길’로 불리는 상권의 임대료가 오르자 상대적으로 20~30% 저렴한 이곳으로 터를 잡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마치 홍대 상권의 확장과 유사한 꼴이다.
1979년 문 연 은성집은 노포로서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의 스테이크는 특별하다. 불판에 은박지를 깔고 뜨거워지면 버터를 올려 녹인다. 그다음에 한우와 베이컨, 소시지, 양파, 버섯 등을 얹는다. 적당히 익으면 구운 마늘가루를 뿌린다. 82살 동갑내기 이경자·김광웅 주인 부부가 개발한 양념이다. 1959년 문 열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중식당 ‘덕순루’도 이 거리를 지키고 있다.
세련된 카페도 식당 사이에 별처럼 박혀 있다. 출판사로 오해받는 카페 ‘남영동출판사’, 안이 훤하게 보이는 ‘골드버튼커피’, 그리고 ‘무자비’, ‘데일리루틴커피’, ‘데이원커피바’ 등이 그 주인공들.
지난 1일 해가 지자 이 골목 작은 가게에서 타투이스트 이성민씨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알록달록한 타투를 몸에 걸친 20~30대가 모였다. 남영동엔 이제 그들의 힙한 문화까지 스며들고 있다. 그들과 연대하고 이해하기 위해 ‘남리단’은 ‘권장’할 만하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