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같은 여자〉(2002)
[매거진 Esc]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악마같은 여자> (2002)
잭 블랙하면 떠오르는 건? <로맨틱 홀리데이>의 그 훈남 아냐? 라고 묻는다면 <이터널 선샤인> 한편 보고 짐 캐리를 우수 어린 고독남 캐릭터로 착각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킹콩>에서 킹콩을 찍기 위해 목숨도 거는 그 편집광적 영화감독이지, 라고 하면 그를 반 정도 이해한 거다. <스쿨 오브 락>에서 교복 입은 아이들이 눈망울 초롱초롱 굴리며 “무슨 과목 공부해요?” 물어볼 때 숙취에 찌든 표정으로 “닥치고 그냥 놀아”라고 대꾸하는 한심한 가짜 선생을 기억한다면 비로소 잭 블랙을 제대로 본 거다.
잭 블랙은 열정의 배우다. 열정 없는 배우가 있겠는가마는 잭 블랙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활활 타는 캐릭터를 자주 연기하고, 잘 연기하는 배우를 찾기도 드물다. 그리고 그의 열정은 경건하게도 오로지 한 곳을 향해 있다. 그것은 바로 ‘록 스피릿’. 실제로 ‘터네이셔스 디’라는 밴드를 하면서 집념의 밴드 이야기를 담은 <터네이셔스 디>라는 영화를 만든 적도 있지만 잭 블랙이 환상의 연기를 보여줄 때는 그가 못 말리는 음악광으로 등장할 때다.
하지만 그가 연기하는 록커는 <벨벳 골드마인>이나 <헤드윅>, <원스>처럼 폼나는 음악영화의 뮤지션들과 거리가 있다. 물론 그도 여기 나오는 배우들 못지않게 카리스마가 충만하다. 문제는 그만큼 재능이 없다는 거다. 카리스마는 넘치고 재능은 그것을 받쳐주지 못할 때 벌어지는 불가피한 사연들. 사는 게 민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스쿨 오브 락>에서도 착실한 친구 집에 빌붙어 밴드 생활을 하지만 공연 중 다이빙을 하면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 부상을 입고,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는 자신이 이끄는 밴드가 공연에 나서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점원으로 일하는 음반가게에서 사장 머리 위에 앉아 제멋대로 행동한다.
<아메리칸 파이>의 제이슨 빅스와 함께 나온 <악마 같은 여자>에서도 잭 블랙은 비록 샌드위치 가게에서 ‘초고속 승진’을 한 점원이지만 그의 열정은 닐 다이아몬드에게로 향해 있다. 빅스 그리고 다른 친구와 닐 다이아몬드 카피 밴드인 ‘거친 다이아몬드’를 이끌고 거리 공연을 하는 게 그가 사는 이유다. 사실 닐 다이아몬드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한물간 가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거친 다이아몬드’가 거리 공연을 할 때 장단을 맞춰주는 건 대부분 동네 중장년층이다. 하지만 그의 열정만큼은 커트 코베인 저리 가라다. 그는 닐 다이아몬드를 쫓아다니며 “형님 사랑해요”를 외치면서 몸을 날리다가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것조차 자랑으로 여기며 공연장 드레스룸에 몰래 들어가 훔친 닐 다이아몬드의 옷을 보물처럼 아낀다. 잭 블랙이 주는 큰 웃음은 이렇게 ‘돌아이’적 열정이 앞뒤를 가리지 않음으로서 터져나오는 각종 엽기 행각들이다. 물론 그 주접들은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것들이지만 100% 원액으로 구성된 순결한 열정은 때로 뭉클한 감동까지 준다. 한국에 순결한 재용이가 있다면 할리우드에는 순결한 잭 블랙이 있다.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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