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조선사대부 폭탄주 암살사건

등록 2007-12-12 18:26수정 2007-12-14 17:34

조선사대부 폭탄주 암살사건
조선사대부 폭탄주 암살사건
[매거진 Esc] 기생과 노니던 갑부집 장남 밤새 주검
춘향전·연암 제문서 단서 “그래, 혼돈주야!”
‘소막’에 ‘앵무잔주’ 제조해 권커니 자커니
자시께 기생이 방으로 들어갔다는 증언뿐 범행도구 오리무중

“시신의 간이 부어 있는 것을 보니 짐작 가는 범행도구가 있네!”

검시관 호음주(胡飮酒)의 눈이 번뜩였다. “여보게, 부검시관! 시신의 배에 소화 안 된 고기산적이 잔뜩 있어. 자네는 이것이 무얼 뜻한다고 보나?” 부검시관은 뭐라 답할지 몰라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렸다. 정조 6년(1782년) 전라도 남원에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남원 제일의 사대부인 이갑부의 첫째아들 이불로가 밤사이 숨졌다. 방안에는 먹다 남은 음식과 술잔뿐 다른 범행도구는 없었다. 자시(밤 11시∼1시)께 이불로의 방으로 남원 제일의 기생 단란이 들어갔다는 노비 돌쇠의 증언이 전부였다. 다음날 아침 이불로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기생 단란은 순순히 범행을 시인했지만 범행도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호롱불에 책장 넘기다 눈이 반짝, “바로 이 대목이야!”

‘나 설록(說錄) 호음주, 남원 고을 형조에서 10년 잔뼈가 굵었어. 설록이라는 호는 허투로 지은 게 아냐. 모든 기록을 샅샅이 뒤져 범인을 찾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호음주는 형조로 돌아왔다. 그는 단서를 찾느라 당시 저자에서 서민들이 읽던 <춘향전>을 구해 왔다. 호롱불에 책장을 넘기던 호음주의 눈이 갑자기 형형하게 빛났다. 바로 이 대목이야! “(춘향이) 이태백의 포도주, 도연명의 국화주, 마고선녀의 천일주, 산중처사의 송엽주며 일년주, 백화주, 이감고, 감홍로, 자소주, 황소주를 앵무잔에 가득 부어 이 도령과 전할 적에 권주가를 부른다.”


“집안 넉넉지 못해 소주 얻으면 곧장 막걸리 사다가…”

호음주가 무릎을 쳤다. 그 소리에 옆에서 졸던 부검시관이 깜짝 놀라 물었다. “설록 나으리, 그럼 범행도구는 앵무잔이란 말씀이시군요. 단란이가 이불로에게 술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뒤 잔으로 머리를 내려친 것이로군요.” “너는 형조 생활 3년에 어찌 아직 그리 감이 없단 말이냐.” 호음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 자네에게 실마리를 줌세. 지난해 12월 초닷새에 석치 정철조(1730∼1781)나으리가 돌아가신 것은 알지?” 호음주가 묻자 부검시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음주는 그와 친했던 연암 박지원이 석치를 위해 쓴 제문을 읊었다. “몇 섬의 술을 마시고 서로들 벌거숭이가 되어 치고받으면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크게 취해 함부로 이놈 저놈 부르다가 먹은 것을 게워내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속이 뒤집히고 눈이 어질어질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만두련만. 이제 석치는 진정 죽었구나!”

재산 상속 노리던 아우가 사주해 완전범죄 노렸는데…

호음주는 폭음으로 유명했던 석치 정철조가 숨진 것에서 범행도구에 대한 단서를 다시 얻었다. “임천상의 <쇄편>을 보면, 석치 나으리는 주량이 셌지만 집안이 넉넉지 못했네. 그래서 소주를 얻으면 곧장 막걸리를 사다가 한데 섞고, 커다란 자기를 가져다 술잔 삼아 마시고는 ‘혼돈주’(混沌酒)라 불렀네.” 호음주의 설명을 듣고서야 부검시관은 무릎을 치며 “이제 모든 의문은 풀렸어요!”라고 말했다. 호음주는 단란이 아버지 재산을 혼자 상속받으려던 둘째아들 이소득의 사주를 받았음을 밝혀냈다. 단란은 이불로의 방에 들어가 갖은 안주로 입맛을 돋우게 한 뒤, 막걸리와 소주를 섞은 혼돈주는 물론 춘향이 이몽룡에게 주었던 혼돈주를 수없이 ‘제조’해 줬다. 첫째아들 이불로는 혼돈주 맛에 사로잡혀 이를 거부하지 못한 채 잔을 거듭하다 정신을 잃었다. 급성 알코올 중독이었다.

“벌써 자시가 지났군. 혼돈주 한 사발만 들고 퇴청하세나!”

당시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금주령을 내렸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호음주는 영조 38년(1762년) 몰래 술을 마시던 대사성(조선왕실에서 유학과 문묘의 관리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고위직책)이 쫓겨난 사건을 떠올렸다. 그 사건은 호음주를 비롯한 중인들 사이에서도 크게 회자됐다. 십여년 전 정언(고려·조선시대에 왕에게 간하고 의견을 나누던 직책) 박상로가 임금에게 올린 상소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는 빈객과 의약에 술을 쓰지 않아 인정에 위배되며, 수령들이 이로 말미암아 자주 바뀌는 등 10가지 폐단을 들어 금주령을 해제하라고 상소했다.

‘정녕 혼돈주를 금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게야.’ 호음주는 혼자 씁쓸히 웃었다. “여보게, 부검시관! 벌써 자시가 지났군. 가볍게 혼돈주 한 사발만 들고 퇴청하세나!”

참고 <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회)·<조선왕조실록>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 일러스트레이션 이관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