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춧가루 뿌리지 마세요?
[매거진 Esc] 요리의 친구들
고추는 한국인의 상징처럼 쓰인다. ‘작은 고추가 맵다’ ‘고추 먹은 소리’(못마땅하게 여겨 씁쓸해하는 말) 등 속담도 있다. 요샌 ‘고춧가루를 뿌린다’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정치인들도 즐겨 쓰는 말이 됐다. 지난해 7월 한나라당 경선 뒤 강재섭 대표는 박근혜 전 대표 측을 의식해 “서로 상처를 보듬고 붕대를 감아줘야지 고춧가루를 뿌리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추는 전래된 지 400년이 채 안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기간에 민족의 상징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늙은 영조는 1768년 ‘고추장 사랑’을 목 놓아 외친다. 그는 도제조(조선시대의 고위급 명예직)에게 “송이(소나무 숲에서 자라는 식용버섯), 생복(전복), 아치(어린 꿩), 고초장(고추장)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이로써 보면 입맛이 영구히 늙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고추는 한자로 ‘고초’(苦椒)라고 썼다.
외국인들은 종종 고추 때문에 고초를 겪는다. 롯데호텔 한식당의 정문환(45) 주방장은 91년 겨울 러시아에서 열렸던 한국 음식 축제에 참여했다. 러시아 불곰 같은 덩치 큰 러시아 남자가 된장찌개를 먹어보더니 “더 맵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것봐라? 정 주방장은 청양 고춧가루을 더 넣어 끓여 줬다. 한 숟갈 떠넣은 러시아 남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주방을 뛰어다녔다. 그 러시아인은 다음날 “입안이 헐어서 약을 먹었다”고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정 주방장은 지금도 청양 고춧가루를 애용한다. 그러나 외국인이 주방을 뛰어다니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너무 자극적인 제품보다 부드러운 맛이 나는 고춧가루를 쓴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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