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를 누르며
[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내가 누군지 아느냐.”
지난주 오후 회사에 있다가 괴이쩍은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모르는 번호였습니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신호가 가다가 툭 끊어졌습니다. 일부러 안 받는 듯했습니다. 내심 불쾌했지만, 누군가 잘못 보냈겠지 하며 잊어버렸습니다. 한데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범인은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었습니다. 집을 방문한 학습지 선생님이 깜빡 놓고 간 휴대전화로 장난을 한 거였습니다.
그 며칠 뒤엔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가 장난을 이었습니다. 엄마 휴대전화를 통해 오빠의 문자를 패러디해 보낸 겁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난 OOO이다. 119는 아니다. 날 알아맞춰봐! 크크크 큭큭큭.” 요즘 꼬마들은 문자메시지 하는 법을 스스로 익힙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툭하면 문자로 아빠를 희롱합니다. 옛 메시지함을 뒤져보니 이런 것도 눈에 띕니다. “피곤한 고경태 기자님 회사에서 잠꾸러기군요. 노래방이나 가시지요.”(딸) “죄인 고경태를 명예훼손 혐의로 무기징역에 처하노라.”(아들)
소설가 공지영씨의 에세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13면)를 읽으면서 떠오른 저의 ‘깃털’입니다. 공지영씨의 글 내용처럼 사소하고 가볍지만 정겨운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을 쓰겠다고 합니다. 가볍고 사소하지만, 담백하고 시원한 평양냉면 육수처럼 청량감을 줍니다. 기대하십시오. 앞으로 매주 독자 여러분께 한 그릇씩 대접할 예정입니다.
말 나온 김에 진짜 평양냉면을 드시러 가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를 참고하면서 말입니다. 냉면 기획은 우연히 이뤄졌습니다. 지난달 중순 팀원들과 근처 유명한 냉면집을 갔다가 길게 늘어선 줄에 경악했지요. 30여분간 서서 기다리다 문득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냉면이나 커버로 올릴까?” 알고 보면 커버 기획도 사소한 계기에 결정됩니다.
고경태/ <한겨레> 매거진팀장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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