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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왜곡? 무관심보다는 낫다”

등록 2008-10-30 18:18수정 2008-11-01 20:47

언론 노출을 꺼리는 편인 이정명 작가는 “인터뷰는 해도 사진 촬영은 사양”이라며 대신 사진을 보내왔다.       밀리언하우스 제공
언론 노출을 꺼리는 편인 이정명 작가는 “인터뷰는 해도 사진 촬영은 사양”이라며 대신 사진을 보내왔다. 밀리언하우스 제공
모든 소설은 팩션…여성이란 설정은 분명 오답
역사적 인물과 그림을 다시 보는 계기 됐으면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토종 팩션 ‘바람의 화원’ 원작자 이정명씨

거의 난리가 났다. 서울 간송미술관 전시회 첫날에만 2만명이 몰렸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려는 사람들이 미술관에 장사진을 이뤘다.

말도 많기도 하다. 사람들이 실제로는 남자인 신윤복을 행여 여자라고 믿게 되면 큰일이라고 문화재위원장이 ‘역사 왜곡’을 걱정할 정도다.

요즘 벌어지는 이 모든 ‘신윤복 현상’은 이정명(44) 작가에게서 비롯됐다. 이 작가의 소설 <바람의 화원>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장안의 화제가 된 때문이다. 드라마의 열기에 힘입어 원작 소설도 인기가 급상승했다. 출간 1년이 지난 소설 <바람의 화원>은 최근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혜원 신윤복은 여자로 그려진다. 사람들은 그 파격적인 상상력에 열광했지만 학자들로선 틀림없는 오류라고 걱정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 작가는 <바람의 화원>으로 ‘한국형 팩션’(역사적 사실을 뜻하는 ‘팩트’와 지어낸 이야기란 ‘픽션’을 합친 말)의 첫 스타작가로 자리잡고 있다. 장르소설팬들에겐 대단한 인기였던 전작 <뿌리 깊은 나무>로 홈런을 쳤고, 이번에 <바람의 화원>으로 만루홈런을 날렸다. 정작 이 새로운 역사 이야기꾼 개인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씨가 인터뷰를 꺼려온 탓이다. 신윤복 열풍 창조자의 생각이 궁금해 인터뷰를 요청하자 뜻밖에도 그는 흔쾌히 응했다. 17일 신문사로 찾아온 인기 작가는 작은 체구에 검은 재킷, 붉은 빛 동그란 안경을 쓰고 은은히 향수 냄새를 풍기는 단정하면서도 ‘패셔너블한’ 모습이었다. 뜻밖인 것은 그가 몰고 온 승용차였다. 베스트셀러 1위 작가의 차로는 예상하기 힘든 10년은 넘었을 듯한 쏘나타3였다.

-차를 오래 타시나 봐요?

“12년 됐는데요, 덜덜 거리고 말썽을 피워도 애착이 가요. 오래 타다 보니까 차가 늙어가는 게 느껴지는데 선뜻 바꾸기가 뭐하더라고요. 청개구리 같은 것도 있죠. 그랜저나 렉서스 끌고 다니는 사람보다 못하지 않다는 ‘역(逆)과시욕’ 같은 게 있어요.”

밝게 웃는 모습 속에선 똘똘 뭉친 자존감도 느껴졌다. 요즘 화제인 신윤복 이야기부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도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니까.


-어린 학생들이 신윤복을 여성이라고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고 말들이 있더군요.

“무책임하게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긴 한데요(그는 잠시 고민스러워하는 듯했다) …, 잘못 아는 것이 전혀 모르거나 관심조차 안 갖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수학문제를 포기해버리기보다는 그래도 풀어보면 틀리더라도 오답이라는 걸 알고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생기게 되는 거죠. 신윤복이 여자라는 건 역사적으로 오답이지만, 그런 오답을 통해서 신윤복과 그림을 다시 보게 되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요즘 독자분들 수준이나 학부모들의 자녀 교육 수준을 봐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역사소설은 엄연한 사실인 역사가 바탕이다 보니 작가가 집어넣은 상상력이 두드러져 보이는 한계가 더욱 뚜렷할 수밖에 없다. 이 작가는 엄연한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더욱 상상력을 강조했다.

-신윤복을 ‘여자’로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신윤복 그림을 처음 본 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아리랑이란 담배에 파란저고리에 노란치마를 입은 여자가 그네 타는 <단오풍정>이란 그림이 들어갔어요. 왜 화가와 그림을 동일시하는 그런 게 있잖아요? 색감이나 여자 얼굴을 보고 신윤복은 여자일 거라고 명시적으로는 아니어도 잠재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학교에서 신윤복이 남자라는 걸 배웠을 때 굉장히 충격이었죠. 머리로는 남자라는 걸 받아들였지만, 가슴으로는 여자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고, 여자였으면 어땠을까 어떤 얘기가 있을까 하는 공상을 했어요. 그러다가 <바람의 화원>의 모티브도 발견하게 된 거고요.”

-번뜩이는 상상력만의 결과는 아니라는 말씀이네요.

“주변이나 독자들께서 어떻게 그런 발칙한 상상을 했냐고 물어보시는데, 저한테 상상이란 건 하루아침에 번개 치듯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10년, 20년은 돼야 하는 거죠. <바람의 화원>도 어릴 적 신윤복한테 관심을 갖게 된 뒤로, 소설로 구체화했는데 처음에는 김홍도, 신윤복은 나오지도 않고 신윤복 그림 속에 나오는 기생이나 선비들로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막혀서 상당기간 한쪽 구석에 처박아뒀다가 다시 고쳐쓴 겁니다.”

토종 팩션 ‘바람의 화원’ 원작자 이정명씨
토종 팩션 ‘바람의 화원’ 원작자 이정명씨
누가 뭐래도 이씨는 요즘 한국 팩션의 대표주자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처럼 그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름, 그러나 그 인물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역사 속 인물들을 흥미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딱딱한 교과서 속 위인들이 생생한 주인공으로 살아왔기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한국형 팩션의 시조’가 아니냐는 말에 그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아니죠. 팩션이라는 용어가 그전에도 있긴 했지만 일반화는 안 됐었죠. 하지만 어찌 보면 모든 소설이 팩션이에요. 사람이 밥 세 끼 먹어야 사는 팩트, 사랑이라는 팩트에 허구를 섞은 거니까요. 저는 다만 우리 역사, 우리 감성과 장르적 특성을 결합시켜서도 얼마든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해보고 싶었어요.”

스스로는 부인했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가 소설가가 된 건 운명처럼 보였다. 대학 국문과를 나와 잡지와 신문 기자를 오래했고, 늘 공상 속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는 “소설가가 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국문과를 나오셨는데, 작가를 꿈꾸지 않았다는 건가요?

“전혀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문학이라는 게 무지 고행이죠. 뼈를 깎고 배를 곯으면서 몇 년씩 정진해야 하는 그런 걸 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냥 취미로 시작했던 겁니다.”

그가 ‘뭔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기자 생활을 4~5년 하며 갓 서른을 넘겼을 때였다.

“어느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듭디다(웃음). 예수는 서른세 살에 죽어서 2천년이 넘도록 이름을 남기는데 나는 뭔가, 인류에게 뭐 줄 건 없지만, 나를 위해서라도 뭐 하나 주자, 그래 놓고선 회사 글 말고 나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짧은 소설이든 시든 뭔가 하나를 남기자고 한 거죠. 그리고 몸을 위해서는 서른세 살까지 마라톤을 완주해보자고 마음 먹었죠.”

서른세 살이 되던 해 그는 가을에 첫 소설을 완성하고, 하프 마라톤을 1시간20분대라는 좋은 기록에 완주했다.

-무슨 계기라도 있었나요?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 …, 서른 넘어가면서 조급해지고 회사에서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했던 거죠. 어떻게 보면 명상하듯 글쓰고 달리고 했던 것 같네요.”

직장을 다니며 짬짬이 글을 쓰는 것은 습관이 되어 그의 소설 스타일로 이어졌다. 퇴근 뒤 한 시간, 출근 전 한 시간 식으로 시간을 끊어서 소설을 썼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영화 시나리오의 신(scene)처럼 구분된 느낌이 든다. 짧은 시간에 채울 수 있는 원고지 10~20매 정도로 한 장면이 완성되는 식이다. 방송에서 <바람의 화원>을 주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전작 <뿌리 깊은 나무>도 이미 드라마와 영화 판권이 팔린 상태다.

-쓰신 소설들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기가 좋은 모양입니다.

“영상적이라는 얘기들을 많이 하세요. 한국 소설들이 내면 심리 묘사를 중시하는 데 비해 제 소설은 스토리 위주에요. 심리묘사를 거의 안 하고 보여주면서 심리를 드러내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심리 묘사를 해보기도 했는데, 주장하는 글처럼 되더라고요. 심리를 사물이나 상황으로 슬쩍 보여주는 정도로 끝내야 독자들이 바로바로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요. 신윤복과 기생 정향의 관계를 보더라도, 어찌 보면 동성애가 될 수도 있고, 여자로서 좋아하는 것일 수도, 예인으로 좋아하는 것일 수도, 또 스스로 감추고 있는 여성성을 발현해 자기 안의 또다른 자아를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고 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는데, 읽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겠다는 겁니다. 그런 부분이 드라마나 영화하는 분들한테는 영상으로 찍기 용이하게 다가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글쓰기 방식은 그가 기자 출신이란 사실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직접 끼어들어 이야기하기보다는 배경이 되는 사실이나 상황 설명을 중시하는 것이 기사 쓰기의 특징이니 말이다. 여성월간지, 종합일간지, 패션잡지 등을 거치며 그는 기자로 10여년을 살았고, 전업 소설가로 5년째 살고 있다.

-기자와 소설가 중 어느 때가 더 행복하세요?

“그땐 그때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행복해요. 기자로 돌아다닐 때는 그게 너무나 재밌었죠. 회사 그만둔 건 일이 싫어서는 아니었어요. 조직에서 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두려웠습니다. 그냥 안주하고 살면 내 자신이 녹아버릴 것 같았어요. 마흔살에도 계속 회사를 다니면 왠지 굉장히 불행해질 것 같기도 했고요. 서른아홉 살쯤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뭘 하든 내 걸 하고 싶어서 일단 뛰쳐나왔던 거죠.”

소설이 잘 돼서 전업 작가로 나선 게 아니라는 얘기였다. 좀더 파고들어가자 그는 난처해하며 “사적인 얘기는 안 썼으면 한다”고 정중하게 부탁해왔다. 그는 “뭔가 저지르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자신을 평했다.

이정명식 팩션은 줄줄이 대기 중이다. 어릴 적 공상에서 비롯돼 10여년 만에 소설로 완성된 <바람의 화원>처럼, 그가 주물럭거리고 있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음 소설에선 또 어떤 역사인물을 고를지 궁금해서 물었는데, 말을 돌리며 피해갔다.

“소설을 쓰겠다고 처음부터 생각하는 게 아니라 늘 공상을 하는데 그러다 보면 동기가 떠오르고, 그걸 골라서 써요. 써도 다 소설이 되는 것도 아니어서 1천매를 써놓고도 안 되는 것도 있고 그렇죠. 쓴 것도 있고, 쓰고 있는 것도 있고, 포기한 것도 있고 동화도 있고, 우화도 있어요. 그 중에서 또 제 기준으로 검열해서 고르는 거죠.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열심히 쓰고 또 쓰고 하다 보면 한두 개 남지 않을까 해요.”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잡지·신문 7~8곳서 ‘기자생활 유랑’
그림 그리듯 묘사…영상판권 불티

이정명(44) 작가는 다양한 매체를 거치며 기자생활을 10여년 했다. 여성월간지 <여원>에서 시작해 <일요신문>과 <경향신문> 문화부, 여성지 <쉬즈>에서 일했고 젊은 여성 패션잡지 <유행통신>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주로 “매체를 창간하는 일에 합류한 적이 많았다”고 할만큼 새롭고 역동적인 일에 푹 빠지는 스타일이다.

소설은 10여년 전부터 쓰기 시작해 5년 전부터 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다. 1999년 <천년 후에>로 데뷔해 <해바라기>(2001년), <마지막 소풍>(2002년) 등을 썼다. 그의 출세작은 2006년작 <뿌리 깊은 나무>. 세종대왕 시절 한글창제를 놓고 벌어진 집현전 학사 살인사건을 조선시대 수사관이 추적하는 이야기로, 입소문만으로 30만부 넘게 팔렸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이어 지난해 낸 <바람의 화원>은 드라마로 만들어져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바람의 화원>은 조선시대 화원인 김홍도와 신윤복이 주인공이다. 궁중화원에서 김홍도의 스승과 동료가 살해돼 김홍도가 사건 조사에 나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과 신윤복을 여성으로 한 설정이 독자들의 흥미를 돋웠다.

요즘 그의 소설들은 그야말로 상한가다. <뿌리 깊은 나무>는 내년에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영화 판권도 팔려나갔다. 다음달에는 <뿌리 깊은 나무>를 원작으로 한 연극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는가>도 무대에 오른다. <바람의 화원>의 인기를 타고 <10대를 위한 바람의 화원>도 출간됐다.

김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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