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문헌을 보고 있는 금장태 교수. 금 교수는 학자로서 가장 왕성한 작업을 펼칠 40대 후반에 뇌종양에 걸려 15년째 병과 싸우며 공부에 매진해왔다. 그는 뇌종양 때문에 시력이 더욱 나빠져 두꺼운 돋보기가 없으면 책을 읽을 수 없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유학 권위자 금장태 서울대 교수
15년간 수술 미루고 매년 3권 이상 연구서 저술
인터뷰땐 ‘베이스’…유학 얘기 꺼내자 ‘테너’로
지치지 않는 열정…서울대 학술상 첫 수상자에 금장태(64)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학문에 대한 열정의 상징이다. 한국 유학의 최고 전문가로 우리 유학의 독자적인 틀이 갖춰지기 시작한 통일신라 시대부터 현대에 이어지는 유학의 학맥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얻은 평가는 그가 공부로 암과 싸워가며 이룩한 것이다. 그는 15년째 뇌종양과 싸우며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오고 있다. 병세에도 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듯하다. 내년 2월 정년을 앞두고 있는 금 교수는 올해에만 5권의 연구서를 펴냈다. 서울대는 올해 처음 제정한 서울대 학술상을 그에게 안겼다. ‘공부 의지’ 하나로 육체를 극복하는 이 공부의 화신처럼 첫 수상자로 걸맞는 이도 없어 보인다. 늦가을 고요한 서울대 교정에서도 유독 정적에 싸인 듯한 인문대학, 그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할 수 있었는지, 공부란 그에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연구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낮은 목소리로 금 교수가 손님을 맞았다. 그는 꼿꼿했다. 나이는 들어 보였지만 암환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연구실은 놀랍게도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허름한 책상 두 개와 조그만 탁자 하나. 책장엔 책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책이 없는 교수 연구실은 처음 봅니다. “저도 젊을 때는 책 욕심이 남 못지않았어요. 하지만 뭔가 늘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더라고요. 높은 데서 먼지 덮어쓴 책을 보면 ‘내가 읽겠다고 사둔 건데 계약을 위반하고 있구나’라는 자책감 같은 것도 들고요. 그래서 다 여러 번 나눠서 여기저기 도서관에 기증했어요. 필요한 책이 있으면 빌려서 읽어요.” 병은 모든 것을 바꾼다. 그가 욕심을 버리기 시작한 것도 병을 얻고 나서였다고 한다. 생사의 갈림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절실하게 보이면서 허상을 쉽게 버릴 수 있었을 터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그런 얘기는 안 하고 싶어요. 학문이나 책으로 인정받고 싶지, 아프다는 얘기가 내세워지는 건 참 마음에 들지 않아요.” 금 교수는 단호하지만 담담하게 잘라 말했다. 공부에 일생을 건 학자의 단단한 자존심이 전해졌다. 그래도 암 선고를 받고 이렇게 오래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물었다. “그럭저럭 해왔어요. 치료는 받고 있고, 공부는 할 만합니다. 시력은 점점 나빠지고 의식도 자꾸 흐려지긴 하지만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암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고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종양이 커지면서 시력은 계속 나빠져 책을 한번에 오래 읽기 어렵고, 투병과 공부로 약해지는 체력 탓에 병치레도 잦아지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은 귀띔했다. 금 교수가 암 판정을 받은 것은 안식년이었던 1994년이었다. 건강검진에서 눈 뒤편에 종양이 있는 것이 발견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아홉. 코 내시경으로 대수술을 받았지만 종양 덩어리가 너무 커 모두 제거할 수는 없었다. 병원에선 종양 위치가 위험하니 두개골을 절개해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자고 권했다. 그는 마다했다. 자칫 뇌에 영향을 미쳐 공부에 지장이 있을지 몰라서였다. 공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결단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종양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지는 않아 다행이다. 금 교수는 지금껏 호르몬제 약물 치료를 계속해오고 있다. -암수술을 포기하면서까지 공부에 매달리신 건데,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무슨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공부를 하기로 했던 건 아닙니다. 제가 62학번인데요, 먹고살기 참 어려웠을 때죠. 다들 회사에 취직해서 밥벌이하기에 바빴는데, 저는 회사에 취직해서 살아가는 게 영 맞질 않을 것 같아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잘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거죠.” 금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학부를 마친 뒤, 우리 종교에 관심을 갖고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다.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은 기독교 관련 전공자 외엔 뽑으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성균관대에서 유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렵게 교수가 되어 열심히 학문을 꽃피울 시점에 병이 찾아왔다. 수술 대신 공부를 선택한 결단력은 책 쓰기로 이어졌다. 1999년 이후로 그는 해마다 최소 3권 이상의 책을 썼다. 가히 놀라운 생산력이다. 금 교수는 “이제는 공부한 걸 정리해야 할 때여서 책을 계속 내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답할 뿐이다. -공부 말고 다른 걸 할걸 하고 후회한 적은 없으신가요? “그런 후회는 해 본 적이 없지요. 오히려 가장 후회가 되는 게 뭐냐면, 젊은 시절 공부 제대로 안 하고 놀았던 거예요. 학부와 대학원 다니면서 철없이 술 마시고 놀러다닌 게 후회가 돼요. 요즘에는 이쪽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문 공부를 가르쳐 주는 데가 있지만 제가 다닐 때만 해도 없었어요. 그때 미리 공부를 많이 해서 한문을 잘 알면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운 거지요.” 다른 학자들이 그다지 관심 갖지 않았던 유학에 그는 평생을 바쳤다. 그의 공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금 교수는 구한말 유학자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진암 이병헌이라는 분이 있어요. 유학을 종교로 승화시켜려던 인물이죠. 배산서당을 세웠는데 여기가 사실은 유교 교회였던 셈입니다. 서양 문물이 밀려들어오고 일제가 침략해 올 때,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유교를 체계화하려 했던 거죠. 유림들로부터 이단이라는 비판을 받아가며 했던 일이에요.” 이어 서우 전병훈이라는 유학자를 언급하면서 뜻이 좀 더 명확해졌다. “이분은 정말 스케일이 큰 생각을 하셨는데, 유불선은 물론이고 칸트 철학 같은 서양 사상까지 하나로 아우르는 사상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셨던 유학자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원대하고 웅장했던 분들이 많았었죠. 이론의 체계화를 통해 사회를 변혁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꿈꿨던 것이지요.” 학문은 책상 위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사회를 변혁하는 도구로써 의의가 있다는 말이다. 격동기를 온몸으로 살았던 숨은 유학자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금 교수는 신명이 난듯 눈이 밝아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금 교수는 1980년대 현장을 답사해가며 근세 유학자 70여명을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그렇게 쌓아온 성과를 이제는 책으로 체계화하는 중이다. 유교를 넘어 도교와 불교, 천주교까지 연구 영역은 계속 넓어져왔다. -선생님도 독자적인 이론, 사상을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진 않으셨는지요? “저는 디딤돌이죠. 우리 세대가 그래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역사적 단절이 있어서 남아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문헌들을 정리하고 앞으로 후배들이 독자적인 이론을 내놓기 위해 디디고 올라설 수 있도록, 연구 성과를 정리했습니다. 후배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지만, 정리하는 것 그뿐입니다.” 내년이 정년이지만 공부만을 해온 이니 당연히 명예교수로 연구를 계속하리라고 지레짐작했다. 뜻밖에도 그는 “쉬겠다”고 했다. “정년 퇴임하면 못 만나던 친구들도 만나고 바둑도 두고, 여행도 해야지요.” 말은 그런데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 다시 커다란 돋보기가 세워져 있는 집필용 책상으로 돌아갔다. 책상에는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제8책이 펼쳐져 있었다. “춘추시대 의례에 관한 연구가 나와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시 목소리가 커진다. 정말 금 교수가 정년 뒤 공부를 쉬고 바둑과 여행에 나설까? 사뭇 궁금해졌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금장태 교수는…
유불선 아우른 ‘통큰 선비’
금장태 교수는 전통 유학을 되살려 정리하고 오늘날에 맞게 적용하는 한편 유학을 종교적으로 확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를 위해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화서 이항로 등을 중심으로 연구했다. 퇴계의 성리학, 다산의 실학을 거쳐, 화서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유학의 전모를 규명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그의 주전공이다. 이런 작업과정에서 구한말 일제 침략과 더불어 단절되고 묻혀버렸던 근세 유학자 70여명을 발굴하기도 했다. 요즘 그의 관심사는 유학을 넘어서, 유불선 사상을 통합해 이해하는 문제다. 학계에선 그가 이런 성과를 밑바탕으로 우리 유교 역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해줄 인물로 평가한다.
평생 유학을 연구한 학자답게 그는 삶의 태도에서도 선비들의 자세를 실천하고자 노력해왔다. 인터뷰가 어려울 정도의 겸손함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다.
자신의 학문에 대해서도 그는 정당한 자평보다도 반성을 앞세운다. 대표적 저서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욕심(人心)과 이성(道心)이 가슴속에서 싸울 때는 반드시 욕심을 누르고 이성이 지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다산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결국 내 마음속에서 욕심이 이성을 이기고 말아 나는 분수를 망각한 채 무모하게 덤벼들었다. 그러니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 내내 부끄러움과 후회스러움을 감당하기 어려웠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김진철 기자
인터뷰땐 ‘베이스’…유학 얘기 꺼내자 ‘테너’로
지치지 않는 열정…서울대 학술상 첫 수상자에 금장태(64)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학문에 대한 열정의 상징이다. 한국 유학의 최고 전문가로 우리 유학의 독자적인 틀이 갖춰지기 시작한 통일신라 시대부터 현대에 이어지는 유학의 학맥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얻은 평가는 그가 공부로 암과 싸워가며 이룩한 것이다. 그는 15년째 뇌종양과 싸우며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오고 있다. 병세에도 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듯하다. 내년 2월 정년을 앞두고 있는 금 교수는 올해에만 5권의 연구서를 펴냈다. 서울대는 올해 처음 제정한 서울대 학술상을 그에게 안겼다. ‘공부 의지’ 하나로 육체를 극복하는 이 공부의 화신처럼 첫 수상자로 걸맞는 이도 없어 보인다. 늦가을 고요한 서울대 교정에서도 유독 정적에 싸인 듯한 인문대학, 그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할 수 있었는지, 공부란 그에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연구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낮은 목소리로 금 교수가 손님을 맞았다. 그는 꼿꼿했다. 나이는 들어 보였지만 암환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연구실은 놀랍게도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허름한 책상 두 개와 조그만 탁자 하나. 책장엔 책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책이 없는 교수 연구실은 처음 봅니다. “저도 젊을 때는 책 욕심이 남 못지않았어요. 하지만 뭔가 늘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더라고요. 높은 데서 먼지 덮어쓴 책을 보면 ‘내가 읽겠다고 사둔 건데 계약을 위반하고 있구나’라는 자책감 같은 것도 들고요. 그래서 다 여러 번 나눠서 여기저기 도서관에 기증했어요. 필요한 책이 있으면 빌려서 읽어요.” 병은 모든 것을 바꾼다. 그가 욕심을 버리기 시작한 것도 병을 얻고 나서였다고 한다. 생사의 갈림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절실하게 보이면서 허상을 쉽게 버릴 수 있었을 터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그런 얘기는 안 하고 싶어요. 학문이나 책으로 인정받고 싶지, 아프다는 얘기가 내세워지는 건 참 마음에 들지 않아요.” 금 교수는 단호하지만 담담하게 잘라 말했다. 공부에 일생을 건 학자의 단단한 자존심이 전해졌다. 그래도 암 선고를 받고 이렇게 오래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물었다. “그럭저럭 해왔어요. 치료는 받고 있고, 공부는 할 만합니다. 시력은 점점 나빠지고 의식도 자꾸 흐려지긴 하지만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암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고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종양이 커지면서 시력은 계속 나빠져 책을 한번에 오래 읽기 어렵고, 투병과 공부로 약해지는 체력 탓에 병치레도 잦아지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은 귀띔했다. 금 교수가 암 판정을 받은 것은 안식년이었던 1994년이었다. 건강검진에서 눈 뒤편에 종양이 있는 것이 발견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아홉. 코 내시경으로 대수술을 받았지만 종양 덩어리가 너무 커 모두 제거할 수는 없었다. 병원에선 종양 위치가 위험하니 두개골을 절개해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자고 권했다. 그는 마다했다. 자칫 뇌에 영향을 미쳐 공부에 지장이 있을지 몰라서였다. 공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결단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종양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지는 않아 다행이다. 금 교수는 지금껏 호르몬제 약물 치료를 계속해오고 있다. -암수술을 포기하면서까지 공부에 매달리신 건데,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무슨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공부를 하기로 했던 건 아닙니다. 제가 62학번인데요, 먹고살기 참 어려웠을 때죠. 다들 회사에 취직해서 밥벌이하기에 바빴는데, 저는 회사에 취직해서 살아가는 게 영 맞질 않을 것 같아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잘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거죠.” 금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학부를 마친 뒤, 우리 종교에 관심을 갖고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다.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은 기독교 관련 전공자 외엔 뽑으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성균관대에서 유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렵게 교수가 되어 열심히 학문을 꽃피울 시점에 병이 찾아왔다. 수술 대신 공부를 선택한 결단력은 책 쓰기로 이어졌다. 1999년 이후로 그는 해마다 최소 3권 이상의 책을 썼다. 가히 놀라운 생산력이다. 금 교수는 “이제는 공부한 걸 정리해야 할 때여서 책을 계속 내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답할 뿐이다. -공부 말고 다른 걸 할걸 하고 후회한 적은 없으신가요? “그런 후회는 해 본 적이 없지요. 오히려 가장 후회가 되는 게 뭐냐면, 젊은 시절 공부 제대로 안 하고 놀았던 거예요. 학부와 대학원 다니면서 철없이 술 마시고 놀러다닌 게 후회가 돼요. 요즘에는 이쪽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문 공부를 가르쳐 주는 데가 있지만 제가 다닐 때만 해도 없었어요. 그때 미리 공부를 많이 해서 한문을 잘 알면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운 거지요.” 다른 학자들이 그다지 관심 갖지 않았던 유학에 그는 평생을 바쳤다. 그의 공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금 교수는 구한말 유학자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진암 이병헌이라는 분이 있어요. 유학을 종교로 승화시켜려던 인물이죠. 배산서당을 세웠는데 여기가 사실은 유교 교회였던 셈입니다. 서양 문물이 밀려들어오고 일제가 침략해 올 때,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유교를 체계화하려 했던 거죠. 유림들로부터 이단이라는 비판을 받아가며 했던 일이에요.” 이어 서우 전병훈이라는 유학자를 언급하면서 뜻이 좀 더 명확해졌다. “이분은 정말 스케일이 큰 생각을 하셨는데, 유불선은 물론이고 칸트 철학 같은 서양 사상까지 하나로 아우르는 사상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셨던 유학자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원대하고 웅장했던 분들이 많았었죠. 이론의 체계화를 통해 사회를 변혁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꿈꿨던 것이지요.” 학문은 책상 위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사회를 변혁하는 도구로써 의의가 있다는 말이다. 격동기를 온몸으로 살았던 숨은 유학자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금 교수는 신명이 난듯 눈이 밝아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금 교수는 1980년대 현장을 답사해가며 근세 유학자 70여명을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그렇게 쌓아온 성과를 이제는 책으로 체계화하는 중이다. 유교를 넘어 도교와 불교, 천주교까지 연구 영역은 계속 넓어져왔다. -선생님도 독자적인 이론, 사상을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진 않으셨는지요? “저는 디딤돌이죠. 우리 세대가 그래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역사적 단절이 있어서 남아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문헌들을 정리하고 앞으로 후배들이 독자적인 이론을 내놓기 위해 디디고 올라설 수 있도록, 연구 성과를 정리했습니다. 후배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지만, 정리하는 것 그뿐입니다.” 내년이 정년이지만 공부만을 해온 이니 당연히 명예교수로 연구를 계속하리라고 지레짐작했다. 뜻밖에도 그는 “쉬겠다”고 했다. “정년 퇴임하면 못 만나던 친구들도 만나고 바둑도 두고, 여행도 해야지요.” 말은 그런데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 다시 커다란 돋보기가 세워져 있는 집필용 책상으로 돌아갔다. 책상에는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제8책이 펼쳐져 있었다. “춘추시대 의례에 관한 연구가 나와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시 목소리가 커진다. 정말 금 교수가 정년 뒤 공부를 쉬고 바둑과 여행에 나설까? 사뭇 궁금해졌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한만사 금장태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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