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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기경은 세상의 밥이 되라 하셨죠…”

등록 2009-03-05 19:08수정 2009-03-06 18:39

김기준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사무총장이 김수환 추기경 추모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명동성당 들머리를 지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면서 장기를 기증한 것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는 물론 일반인의 장기기증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A href="mailto:root2@hani.co.kr">root2@hani.co.kr</A>
김기준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사무총장이 김수환 추기경 추모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명동성당 들머리를 지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면서 장기를 기증한 것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는 물론 일반인의 장기기증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김기준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사무총장
20년전부터 장기기증 운동 ‘아름다운 동행’
“추기경께서 만든 기적 잇는게 우리들 책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가슴과 머리 사이
생각 있지만 마음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죠”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뒤 가장 바빠진 곳 중 하나가 명동성당 옆 가톨릭회관 4층에 있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이하 본부)는 20여년 전인 1988년부터 가톨릭 차원에서 장기기증운동을 벌여온 곳이다. 김 추기경은 선종하면서 20여년 전 이 본부와 약속한 대로 자신의 각막을 기증했고, 이 모습에 감화된 시민들은 각막은 물론 다른 장기 기증을 서약하려고 이곳을 줄지어 찾고 있다. 김 추기경 선종 뒤 1주일 만에 무려 1520여명이 장기기증 서약을 했고, 2월 말까지 모두 2700명이 기증 서약에 동참했다. 예년 1년치 기증자 수와 맞먹는다. 김 추기경의 마지막 선행이 아직도 장기 기증이 보편화되지 않은 대한민국에 또다른 기적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탄생 때부터 몸담아온 김기준(61) 사무총장은 기적이 아니라 “이는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것”이라고 말한다. 김 추기경은 80년대부터 헌혈과 장기기증 같은 생명의 나눔을 강조했고, 이를 맡을 기관을 만들라고 제안해 본부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장기기증운동의 효시였다. 김 추기경은 초대 이사장을 맡았고 김 사무총장은 88년부터 지금까지 21년 동안 이곳에서 장기기증 운동 일을 해오고 있다.

-김 추기경은 언제 장기기증 서약을 하신 겁니까?

“1989년 9월20일에 안구를 기증하겠다고 발표하시고, 1990년 1월5일에 서명을 하셨습니다. 이후 뇌사에 대한 종교적 법적 규정이 명확해졌고, 2000년 7월에 뇌사시 장기기증을 하시겠다고 서명하셨습니다.”

-김 추기경이 생전 장기기증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김 추기경은 ‘장기기증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하는 일’이라고 말씀해오셨습니다. 그래서 한국 가톨릭은 오래전부터 헌혈과 각막을 기증하는 헌안운동을 벌여왔습니다. 1989년 7월 잠실체육관에서 가톨릭신자 5천명이 헌혈에 나서는 국내 최초의 대규모 행사를 벌였습니다. 지금 들으면 어감이 이상하지만 당시 우리는 이 행사를 ‘헌혈잔치’라고 했습니다.”

-추기경의 각막이 어느 분들에게 이식되었는지 사무총장께선 아십니까?

“그런 것을 확인하는 것은 장기기증운동 취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장기기증은 준 유족분들이나 받은 분이나 모두 절대 모르는 게 원칙입니다. 저희는 그런 사실을 알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확인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장기보다 안구 기증을 먼저 시작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사후 기증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후 기증할 수 있는 장기는 각막뿐이었습니다. 이후 1990년대가 되면서 교황청, 법원, 병원에서 뇌사의 정의가 확실해지면서 뇌사시 장기기증 서약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장기기증 전문 기관인가요?

“한마음한몸운동은 지구의 모든 생명이 하나이며 이를 위해 가슴을 열고 모든 장벽을 뛰어넘자는 운동입니다. 장기기증 말고도 세계 빈곤 퇴치, 환경운동, 농민운동, 북한 돕기 등 여러 나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장기기증운동은 쉽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들도 생명 나눔에는 동의하면서도 장기기증은 주저했다고 한다.

-초기에 어려웠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신도들에게 교육을 시키면 일단 수긍은 합니다. 그런데 기증서류를 가져가면 깜깜무소식이었죠.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기증하셨는데, 기증서류에는 2명의 가족 동의가 필요했습니다. 자식들이 절대 안 된다고 펄펄 뛰는 거죠. 그래서 1~2년 후 신도들이 내민 기증서 가운데에는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한 기증서가 많았습니다.”

-일화도 많겠습니다.

“2000년 초쯤 40대 남성이 찾아와 자기 안구를 어머니 이름으로 기증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신자였던 어머니가 사후 안구를 기증하려 해서 반대했다가 어머니가 하도 완강해서 겨우 동의를 해드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정신없이 장례식을 치른 뒤 유품을 정리하다 어머니의 안구 기증 서류를 발견한 거죠. 이미 어머니는 화장했는데 말입니다. 그제야 어머니의 뜻을 이해하고 오신 겁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이젠 장기기증 문화가 좀 달라졌습니까?

“많이 달라졌죠. 지금은 각막은 물론이고 뇌사시 장기기증에 대한 거부감도 적어졌습니다. 저희가 의학 발전을 위해 시신을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받는데, 장기기증과 달리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너무 많아서 한 해에 몇 백명씩 한정해서 받고 있습니다.”

-시신기증은 해부 실습 뒤 시신 회수가 어려워 유족들이 반대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정해진 시간(보통 2년)이 지나면 별도로 날을 정해 화장을 거쳐 김 추기경이 묻힌 경기 용인에 있는 천주교성직자묘지에 봉안됩니다. 기증자의 뜻을 아름답게 받아들여 마지막까지 경건하게 모시려는 취지입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장기기증운동이 다른 단체들 활동보다 오히려 덜 알려진 것 같습니다.

“가끔 신자분들이 ‘다른 종교에선 장기기증운동을 하는데 우리는 왜 안 하느냐’라고 하십니다(웃음). 저희가 다른 활동도 하기 때문에 이름에 장기라는 직접적인 말을 안 씁니다. 그래서 본부와 장기기증운동이 바로 연결되지 않나 봅니다.”

묵묵히 이어온 가톨릭의 장기기증운동은 이제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최근 보건복지가족부가 한마음한몸운동본부와 함께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복지부는 또 소속 직원 1795명이 참여한 장기기증 신청서를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 기증했다. 불교계 등 다른 종교계와 연대하는 것도 거론된다. 종교단체와 정부가 함께 힘을 모으면 장기기증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모든 일이 김 추기경에서부터 비롯된 일이다.

-김 추기경의 각막 기증이 많은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본부가 20여년 동안 한 일보다 더 큰 일을 추기경께서 이루신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인의 존경을 받던 분이 돌아가시면서 안구까지 기증하니까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장기기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싹 가시게 한 것 같습니다. 문의전화가 쇄도해서 장기기증 담당자 2명이 업무를 제대로 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가진 분이나 종교가 없는 분들의 문의가 많습니다.

-장례식 때 명동을 찾은 추모 인파에 이어 또 한 번의 기적으로 이를 만하네요.

“저는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안수하며 눈을 뜨라고 했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추기경께서 만들어주신 이 기적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저희의 무거운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김 사무총장은 “이 대목에서 김 추기경이 가진 나눔의 뜻에 손과 발이 되어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서 붙박이로 보냈던 21년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그는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로 1988년 본부에 간사로 들어가 차장, 국장을 거쳐 2005년 사무총장이 됐다.

김기준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사무총장
김기준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사무총장

-어떻게 이 일에 참여하게 된 건가요?

“제가 다니던 회사가 1980년 오일쇼크로 부도가 나 다른 종교 산하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회사에선 그 종교 교육을 시켰는데 한 5년을 계속 다녔습니다. 그런데 1988년 10월쯤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성작(미사 때 포도주를 담는 잔)을 제게 건네주셨습니다. 깨고 나서 ‘아, 회사를 더 이상 다니면 안 되겠구나’ 생각이 들어 15년 다니던 회사를 그날로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성당 주보에서 한마음한몸운동본부 간사를 뽑는다는 알림을 보고 지원했습니다.

-40대에 임시직인 간사일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자원봉사한다고 생각해 급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독실한 신자여서 가족 반대는 없었습니다. 천직이라고 생각해 그만둘 생각도 없었습니다. 맨 처음 운동본부 사무실이 곧 허물어질 것 같은 허름한 건물 1층에 있었는데, 제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옛 회사 후배들이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울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취직자리 알아보고 해서 제가 극구 사양하는 일이 있었죠.”

-다른 마음고생은 없었나요?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생길 무렵이 우리나라 사회운동이 막 시작될 때여서 각 분야 운동의 산파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여기서 환경운동사목위원회,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민족화해위원회가 생겼죠. 지금 시민단체 대표들이 된 분들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뒤에서 열심히 고생하면서도 ‘나는 뭐 하나’ 그런 생각이 났어요. 그러다가 2000년쯤 ‘이 일이 나의 십자가다’라는 생각이 든 다음부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가 마음을 다잡은 것은 가까운 거리에서 김 추기경을 볼 수 있었던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랫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면서도 권력자들에게는 할 말을 서슴지 않는 김 추기경을 지켜보면서 그는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가는 눈에 긴 얼굴 탓에 김 추기경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을 가끔 듣는데 “내가 어디 감히”라고 말하면서도 그때마다 기분은 좋았다고 했다.

-추기경께서 본부를 시작하면서 김 사무총장에게 특별히 당부한 말씀은 뭔가요?

“‘밥이 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밥’이 속된 의미로 ‘만만하다’ 이런 뜻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맨 처음엔 잘 몰랐죠. 그런데 생명나눔 활동을 하면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나눔이란 게 결국 자신이 밥이 되어 사람에게 떠먹힌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평화의 첫 발걸음인 거죠. 그분이 실천한 나눔운동의 정수를 표현한 한마디였습니다.”

-그 말씀을 앞으로 어떻게 실천하실 겁니까?

“김 추기경은 평소 주변에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어디인줄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바로 ‘머리와 가슴 사이의 거리’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머리와 가슴이 가까운 분이셨습니다. 선종을 보면서 본부가 생길 때의 초심을 떠올렸습니다. 개인적으로 88년 본부가 생겼던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이런 기회를 다시 주신 김 추기경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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