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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안 한의대, 체질개선 처방 나섰죠

등록 2009-04-23 19:27수정 2009-04-24 14:21

세계보건기구에서 5년간 전통의학 표준화 작업 고문을 마치고 지난해 귀국한 최승훈 경희대 한의대 학장은 국내 한의대로는 처음으로 영어 강의와 독서 프로그램 등을 도입하며 한의대 교과과정의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A href="mailto:details@hani.co.kr">details@hani.co.kr</A>
세계보건기구에서 5년간 전통의학 표준화 작업 고문을 마치고 지난해 귀국한 최승훈 경희대 한의대 학장은 국내 한의대로는 처음으로 영어 강의와 독서 프로그램 등을 도입하며 한의대 교과과정의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details@hani.co.kr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최승훈 경희대 학장의 실험
한의학 세계화 채비에 영어수업은 필수
의사만 말고 이젠 연구인력도 키워야죠

한국 대학가를 휩쓸고 있는 영어 수업 광풍에 의연할 수 있는 학과들이 있다. 한의학과가 그렇다.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의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영어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 법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의학의 대표선수 격인 경희대 한의대가 이번 학기부터 전체 수업의 20%를 영어로 강의하기 시작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경희대 한의대는 이번 학기부터 의무적으로 동서양 고전 100권을 읽어야만 하는 ‘독이고(讀而考, 읽고 생각하라는 뜻) 프로젝트’도 도입했다. 정해진 책을 읽지 않으면 예과 학생들은 본과에 진학할 수 없다. 여기에 학부생 중심 연구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학부생들이 독자적인 프로젝트를 맡아 연구한 결과를 각종 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이다. 이공대에서는 일찌감치 도입된 시스템이지만 한의사 배출에 힘써온 경희대 한의대에서는 대학원생들만 하던 것이었다. 학생 선발도 파격적으로 바뀐다. 이과생만 뽑던 기존의 방식에서 전체 정원의 30%를 문과 출신으로 뽑기로 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최승훈(52) 학장이 있다. 최 학장은 지난해 7월 유엔 세계보건기구(WHO)에 전통 의학 자문관으로 파견돼 5년을 근무하고 돌아왔다. 귀국해 학장을 맡자마자 그는 한의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다양한 방안을 도입하고 있다. 한의학과 한의대에 대한 그의 진단과 처방을 들어봤다.


한의학은 질병보다 인간을 다루는 학문
고전 읽히고 정원 30%는 문과생 뽑기로

-한의학과에서 영어로 강의한다니 좀 생소하게 들립니다.

“전공 과목은 아니고 교양, 자연과학 과목, 서양의학 과목 등을 영어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들 과목은 학문의 기원이 영어권이기 때문에 영어로 수업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영어 강의가 꼭 필요한 이유는 뭔가요?

“지금 세계적으로 전통의학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습니다. 한의학의 세계화를 준비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소통입니다. 영어로 소통이 가능해야 한의학을 알릴 수 있습니다.”

-영어 수업에 대한 반발은 없습니까?

“영어 강의를 하면 강의를 쉽게 때우기 어려워집니다. 준비할 것이 많아집니다. 영어 강의는 오히려 학생들이 요구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경희대 한의학과는 국내 최고이기 때문에 교수님들이 그런 부담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문과 학생들을 30% 뽑겠다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우선 고등학교 때 문과 이과를 나누는 게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불합리한 틀을 언제까지 가져가겠습니까? 한의학이란 학문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입니다. 자연과학적 접근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접근도 필요합니다. 그쪽에 재능 있는 학생들이 필요합니다.”

최 학장은 세계건강기구(WHO)에서 일할 때 서태평양 전통 의학 표준화 위원회의 고문을 맡았다. 서태평양이라고 하지만 침술 및 전통 의학의 본고장인 한국ㆍ중국ㆍ일본이 중심이었다. 저마다 원조를 자처하는 세 나라의 자존심 대결은 표준화 작업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그는 서태평양 전통 의학 용어는 물론 침술 시술 부위 등 핵심 분야에서 표준화 작업을 성사시켰다. 동양 의학의 3국 통일을 이루는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최승훈 경희대 한의대 학장
최승훈 경희대 한의대 학장

-한·중·일이 모두 동의하는 표준화를 만들기란 무척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2002년 처음 고문 역할을 하는 자문관으로 파견 나갔을 때 표준화 논의는 중국의 판이었습니다. 위원들의 절반 이상이 중국 출신이었어요. 자문관으로 가서 위원회 구성부터 한·중·일이 같은 수가 되도록 바꾸었죠. 저는 대만과 중국에 교환교수를 다녀왔는데 그때 중국인들과 맺었던 ‘꽌시’(관계라는 뜻의 중국말)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무래도 동양의학에는 중국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나요?

“중국은 마오쩌둥 주석이 중국을 장악한 1950년대부터 전통의학인 중의학을 중시해왔습니다. 동서 의학의 교류도 활발하고 국가 표준화도 가장 먼저 했죠. 그걸 바탕으로 중국은 세계보건기구를 통해 자신들의 표준을 국제적 승인을 받으려고 작업을 벌여왔는데, 그때 제가 참여했던 거죠.”

-자존심 강한 중국을 어떤 식으로 설득할 수 있었습니까?

“한·중·일 세 나라의 361개 침구 경혈 부위 이름은 같은데 90여개의 구체적인 위치가 달랐습니다. 중국 측은 한의학 원전에 나오는 위치를 중시하자고 하고, 한국은 해부학적 개념을 도입하자고 맞서 회의가 11차례나 계속됐어요. 결국 한국 측 주장대로 엑스레이 촬영 등 해부학적 개념을 도입하게 됐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한국 의견에 동의해 다수결로 통과된 거죠.”

-전통 의학의 세계화에 대한 전망은 어떻습니까?

“미국이 주도할 가능성이 큽니다. 일단 미국이 연구비 투자가 많고 의료시장도 미국이 가장 큽니다. 미국에서 인정받으면 그게 바로 세계화입니다. 그래서 영어와 연구를 준비해야 하는 겁니다. 나중에 자유무역협정으로 의료시장이 개방되면 한의학은 중국이나 미국에 흡수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의학이 아예 사라지는 것이죠.”

세계보건기구는 서태평양 전통의학의 핵심인 용어와 경혈 부위를 통일한 뒤 곧바로 질병 분류와 약재 분류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세부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표준화를 이끈 최 학장은 고문 자리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힘들게 성과를 이뤘는데 학교로 돌아오는 게 아쉽지는 않았나요?

“노자가 공을 이루면 물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작업을 마무리하면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표준화 작업이 한창이던 2006년, 그는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본과 3학년인 한 한의대생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교수와 학생들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였다. “자기의 열정만큼 한의대가 부응을 못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서둘러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제가 세계보건기구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대학에 돌아가 함께 일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귀국 뒤 그는 곧바로 한의대 학장이 되었고, 학교를 거침없이 뜯어고치고 있다. 교과 과정은 물론 학생들이 공부하는 방식까지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고전 독서 프로그램인 ‘독이고’도 그중 하나다.

-고전을 읽어야만 한다는 규정이 눈길을 끕니다.

“우리 학생들이 시험은 잘 보지만 교양이 부족합니다. 한의학은 질병이 아니라 인간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게 하는 겁니다. 고전은 과거나 지금이나 인간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시간이 걸려도 고전을 읽는 것이 방법입니다.”

-목록을 보니까 동양 고전보다 자연과학 책이 더 많던데요?

“인간 질병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설익은 과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서양의학은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활용해서 지금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한의학도 이런 보편적인 도구를 이용해야 합니다. 한의학 기초 교과과정의 상당 부분이 서양의학과 똑같은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어떤 식으로 고전을 읽는 건가요?

“교수 1명이 학생 5~6명의 독서를 지도합니다. 고전을 강독한 뒤 내용을 정리 요약해서 감상과 함께 적어 내야 합니다. 100권 가운데 20권을 읽지 않으면 유급됩니다.”

-혹시 학생들이 가치 혼돈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맞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이 한의대에 입학해서 혼란을 겪습니다. 그래서 입학 후 첫 독회하는 책이 노자 <도덕경>입니다. 이 책으로 서양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한의학적인 세계관을 갖추도록 ‘세뇌’합니다.”

-실제 <도덕경>을 읽고 학생들 생각이 바뀝니까?

“한의학의 사상적 배경은 도가입니다. 도가의 핵심은 자연과 내가 연관돼 있다는 겁니다. 서양의학은 인체를 쪼갤 수 있을 때까지 쪼개는 반면 동양의학은 부분도 전체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봅니다. 쉬운 예가 침입니다. 한의학은 머리가 아픈데 손과 발에 침을 놓습니다. 인체의 모든 곳은 경락으로 다 연결돼 있다고 보는데, 이런 기초가 바로 노자의 사상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시간은 걸리지만 고전 읽기처럼 효과가 큰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 학장은 지금이 ‘한의학의 위기’라고 본다. 5년 만에 학교로 돌아와보니 한의학계는 물론 학생들마저 침체된 것을 느꼈다고 한다. 서양의학의 대안으로 전통 의학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지는 요즘 우리 한의학계는 도약하느냐 주저앉느냐의 갈림길에 섰다고 그는 말했다.

-한의학이 위기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한의학이라는 나무에 거름도 주고 물도 주며 돌보지는 않고 열매에만 탐닉했기 때문입니다. 경희대 한의대 졸업생이 5천명 정도인데 연구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5% 수준인 250명입니다. 졸업생 대부분이 한의사의 길을 간 겁니다. 지금까지 임상 한의사를 길러내는 데 집중하면서 연구인력을 키우는 데는 소홀했습니다. 이정도 연구 인력으로는 한의학을 키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위기는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어떤 열매에 탐닉했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탕제 중심의 한약 처방 문화를 말합니다. 업계가 탕제 처방을 남발하면서도 약효 데이터를 마련하는 것 등 자체적인 연구에는 소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약재 등으로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한의학 전체에 대한 불신도 생겨났습니다.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연구, 약재에 대한 품질보증에 대해 별 고민이 없다가 뒤늦게 위기에 직면한 것이죠.”

-학교보다는 업계나 협회 차원에서 고민할 문제처럼 보입니다.

“저는 눈앞의 개혁을 담당하는 사회변혁가가 아니라 교수입니다. 먼 미래를 보고 한의학의 뿌리를 키우는 일이 제몫입니다.”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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