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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표 국악’ 자식처럼 키웠어요

등록 2009-06-11 21:06

“저를 만나셨으니까 이제 국악에 관심 가지셔야 돼요.” 국악 연주그룹 다스름 유은선 단장은 ‘주문’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20년 동안 다스름을 이끌어온 이 여걸은 사람들이 국악을 만날 기회가 적을 뿐, 직접 국악을 듣게 되면 누구나 국악을 사랑하게 된다고 확신한다.  신소영 기자 <A href="mailto:viator@hani.co.kr">viator@hani.co.kr</A>
“저를 만나셨으니까 이제 국악에 관심 가지셔야 돼요.” 국악 연주그룹 다스름 유은선 단장은 ‘주문’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20년 동안 다스름을 이끌어온 이 여걸은 사람들이 국악을 만날 기회가 적을 뿐, 직접 국악을 듣게 되면 누구나 국악을 사랑하게 된다고 확신한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스무살 된 ‘다스름’ 유은선 단장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다는 뉴스를 들으면 예술계 대학생들은 쓴웃음을 짓는다. 예술계에선 이미 수십년 전부터 겪어온 일이어서다.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한 예술학도들 상당수가 졸업과 함께 전공을 살릴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시들어버린다. 특히 여성 전공자들은 더더욱.

국악작곡가 유은선(47)도 그랬다. 이른바 ‘국악계의 KS’(국립국악고-서울대 국악과 출신을 일컫는 말)인데도 국악으로 취직할 곳은 없었다. 작곡이 전공이어서 더욱 갈 곳이 안 보였다. 그는 정면 도전을 택했다. 고용해주는 곳이 없으니 스스로 고용을 창출하기로 한 것이다. 대학 동창 여성 연주자 8명을 모아 연주단체를 만들었다. 지도교수도 말렸다. “여자 셋이 모여도 접시가 깨지는데, 여덟씩이나 모여서 시끄럽게 뭘 하겠다는 거냐.”

유은선과 그의 국악연주단은 접시가 아니라 고정관념을 깼다. 올해로 활동 20년째를 맞은 연주단 ‘다스름’은 이제 국악계를 대표하는 중견 연주단체로 성장했다. 국악 전문 방송작가면서 작곡가, 공연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유은선은 꿈꾸는 사람의 힘을 보여줬다. 외교나 문화교류 차원에서 해외 공연을 할 때 가장 먼저 요청을 받는 국악연주단이 다스름이다. 지금 스타 연주자로 꼽히는 지애리(가야금)·김애라(해금)·문양숙(가야금)에 최근 김선옥(거문고) 등이 다스름 출신이다. 단장인 유은선 자신만 빼고 다스름도, 단원들도 다들 유명해졌다.

고생고생해서 대학 마쳤더니 백수
여성연주단 만들어 국악판 도전장

작가·작곡가·공연기획자 ‘1인 다역’
찾아가는 음악회로 우리 것 알려요

-원래 전공이 국악이 아니었는데 파란만장하게 대학에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한국 무용을 전공했어요. 저희 집이 5남매라 경제적으로 예체능을 할 여유는 못 됐고 중학교 때 집 옆에 있던 무용소 선생님께 어깨너머로 배웠죠. 중3 때 저는 서울여상을 가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너 국악고에 가봐라, 그러시는 거예요. 국립국악고와 국악예고가 있었는데 국악예고 교복이 참 예뻤어요. 그런데 전 그게 국립국악고 교복인 줄 알고 국립국악고로 갔어요(웃음). 무용하면서 반주로 나오는 국악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많아졌고, 또 무용으로 대학 가려면 돈도 너무 많이 들어서 국악으로 돌아섰죠.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시험에 떨어지셨어요?

“제가 5수를 해서 들어갔어요. 좀 장수를 했죠(웃음). 돈 들어가는 게 싫어 음악교육과에 지망해 붙었는데, 결국은 음악을 해보고 싶어서 재수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가야금을 했는데 떨어졌어요. 3수 때는 실기가 약한가 보다 싶어 작곡으로 했는데 또 떨어졌어요. 너무 충격이 커서 4수를 했는데 이번에도 떨어졌어요. 그래서 포기하고 유류 회사에 취직했어요.”

-청춘을 대입에 바친 셈이네요. 그 사이 동기들은 대학을 졸업했겠습니다.

“회사를 다녀보니까 몇 드럼 팔았나 더하기 빼기만 하고, 월급도 대졸자의 절반 수준인 것이 충격적이었어요. 여기서 벗어나려면 학교를 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인생을 바꾸기 위해선 대학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5수를 시작한 거죠.”

-직장 다니면서 공부한 5수 때에 오히려 합격한 거네요.

“작곡과는 피아노, 거문고, 청음, 화성학, 국악이론 다섯 과목을 봐요. 저희 집이 왕십리인데 피아노 레슨은 인천으로 가고, 화성학과 이론 레슨은 과천으로, 거문고는 봉천동으로 다녔어요. 그런데 시험날 거문고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떨어졌구나, 계속 출근을 해야겠구나 체념하면서 노량진역 계단을 걸어가다 저 혼자 미끄러졌어요. 거문고는 금이 가고, 너무 처량해서 주저앉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한은 없었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심히 살았으니까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랬는데 붙었다고 하더라고요.”

그토록 고생해서 들어갔건만 대학은 환상이었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곳이 없는 국악 전공 여성들의 문제를 직면한 뒤 유은선은 다스름을 만들었다. 다행히 다스름을 만들고 난 직후 그는 방송국에 국악 프로그램 작가로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방송국에 가보니 더욱 국악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피디들이 국악 프로를 맡게 되면 거의 사표 쓰는 분위기였다. 작가로 기본 수입은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다스름으로 그런 인식을 깨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이제는 다스름의 대명사가 된 찾아가는 초등학교 국악교실 프로그램이었다.

-예체능계가 여성들에게 더 힘든 판 같습니다.

“그때는 실력에 상관없이 남자들에게 기회가 더 많았던 시절이었어요. 남자들 판이고 우리 여자들은 백수니까 여자들끼리 해보자, 실력 있는 여자들끼리 만들자는 거였죠. 장르별로 잘한다는 친구들을 모았어요. 다스름은 ‘음을 다스린다’(調音)는 순우리말인데, 그때는 세 글자 이름이 유행이었어요. 먼저 85년에 슬기둥이 생겼고 그다음 어울림하고 저희 다스름이 생겼어요.”

-초등학교를 찾아가기로 한 것은 어떤 이유였습니까?

“사회적으로 국악에 대한 인식이 정말 형편없는 거예요. 국악이라고 하면 기생이나 방석집을 먼저 떠올리는 수준이었어요. 국악을 생활 속에서 접할 일이 없으니까요. 아이들에겐 그런 고정관념 없게 해주자, 그런데 아이들이 국악 들으러 올 수는 없으니까 찾아가자, 공부하는 교실에서 수업 중의 하나로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자, 그런 거죠. 90년 5월에 처음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 학교에 가서 공연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국악 전문가들이 와서 무료로 수업하고 연주해주는데도 싫어하나요?

“담임선생님을 설득해도 최종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교장 선생님을 만나요. 설명을 다 하고 나면 연주하고 나서 뭘 팔거냐고 물어요. 처음에는 화가 나서 많이 울기도 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찾아가는 음악회가 400회를 넘겼다.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교도소부터 한센병 환자촌, 치매 병원 등 문화 소외지역들을 골라서 다녔다. 물론 힘들지만 찾아가면 괴로움은 사라진다고 한다. “완도에서 다시 배타고 들어가는 한 섬에 갔는데, 거기 학생들은 저희가 가서 처음으로 가야금을 실물로 본 거예요. 전교생 여남은 명뿐인 시골 학교로 가면 노인들도 오셔서 마을 잔치가 돼요. 멋진 무대에서 박수 받는 것도 좋지만 남들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도 굉장한 힘이 되어줍니다.”

스무살 된 ‘다스름’ 유은선 단장
스무살 된 ‘다스름’ 유은선 단장
-중간에 위기는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초기에 제가 돈관리를 안 했는데 어느 날 후배가 장부하고 만원을 주면서 이거 남았다는 거예요. 연주는 적고 초등학교만 돌아다니고 돈도 없으니 해체하자는 거죠. 그래서 나 혼자라도 가겠다고 했어요. 그때 서울대가 아니라 여자로 가자고 마음먹었어요. 같은 학교 출신으로 한다는 것을 깨버리니까 훨씬 자유로워졌어요.”

-여성이란 가치를 중시하는 이유는 뭐죠?

“처음부터 여자들이 직장 들어가기 어려워서 만든 거니까요. 그리고 여자들이 다들 엄마가 되잖아요? 전 엄마로서 자식을 가르치는 마음으로 국악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남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요. 티나고 멋져 보이지 않아도 중요한 자녀교육을 하는 것처럼 국악을 해야 한다는 거죠.”

-국악 전문작가로 중요 프로그램을 도맡아 했지만 프로 진행자도 여러 번 해서 유 단장을 엠시로 아는 분들도 많습니다.

“동시에 4개 프로그램 일을 한 적도 있었어요. 국악 전공한 작가가 드물어서 일이 몰렸죠.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는 한국방송 1텔레비전 <국악 한마당>이에요. 진행자였던 이금희씨가 정말 열심히 국악을 공부하면서 최선을 다했어요. 좋은 작가가 좋은 엠시를 만든다고 하는데, 전 금희씨 덕분에 작가로서의 실력을 다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엠시를 했던 국악 방송 프로그램들도 여럿이었는데 원고도 제가 쓰고 진행도 제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국악계 일부에선 방송작가 출신이라고 폄하하는 시각도 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방송작가를 그만둔 것도 그 때문인가요?

“작곡가니까 제가 다스름의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편곡을 해왔어요. 창작도 계속해서 발표도 했고요. 2001년쯤이었는데 제가 프로그램 담당 작가다보니 작가로만 이름을 올리고 작곡자 이름으로는 올려주지 않는 거예요. 이젠 작곡자로 살아야겠다, 작가는 그만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었죠. 다른 영역을 개척해보고도 싶었고요.”

-국악 연주자도 먹고살기 힘든데 작곡가는 더 힘들어 보입니다.

“작가로 활동할 때보다는 훨씬 영역도 줄어들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지만 그래도 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서 뿌듯해요. 서울시국악관현악단 40주년 음악회 때 기획을 맡아 월북 작곡가 김순남 등이 남긴 곡들을 국악으로 공연했던 것, 소극장 무대에 한옥을 올려서 국악의 태교음악으로서의 가능성을 시도해본 것 등이 기억에 남고 자랑스러워요.”

-젊은 나이에 겁 없이 다스름을 만든 게 놀랍습니다. 원래 간이 큰 편인가요?

“저는 돈이 없어도 해야 할 건 해요.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시간이니까. 돈을 벌려면 그렇게 하면 안 되겠지만. 공연비로 300만원 받기로 했다면 의상비로 500만원을 쓰는 스타일이에요. 다음 공연 해서 갚으면 되잖아요. 우리가 왜 무대에 서요? 더 품위 있고 더 멋지게 해서 관객들에게 국악을 전달하려는 건데, 우리가 궁상떨어서 귀중한 시간 내서 오신 분들께 불쌍하게 보이면 되겠어요? 우리 스스로 만족하는 공연을 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간이 큰 편이에요.”

-최근 서울 성북동 삼청각을 세종문화회관이 다시 운영하게 되면서 전문위원으로 위촉됐습니다. 어떤 일을 할 계획입니까?

“식사를 하되 공연이 있는 문화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기획을 하는 겁니다. 새로운 국악문화 체험을 할 수 있게 ‘문화 쇼크’를 주는 방식을 구상중입니다.”

-가사에, 연주단 운영에, 기획에, 작곡까지… 정말 바쁘게 사십니다.

“제가 하도 이것저것 하고 다니니까 다들 ‘결혼 안 하셨죠?’하고 물어봐요. 집안일도 해야 하는 게 정말 힘들죠. 막 악상이 떠올라 곡으로 옮기고 싶을 때가 마침 설거지할 때나 애가 아플 때면 정말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이 커요. 저는 집에 가면 마법이 풀려서 설거지 걸레질한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그래도 아침이면 다시 나가서 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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