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작 〈임꺽정〉 이후 10여년 만에 대작 만화 〈이두호의 한국사〉를 그리고 있는 이두호 교수. 1년에 한 권씩 10권을 내는 대형 프로젝트다. 가장 한국적인 만화가로 꼽혀온 그가 올해로 꼭 만화인생 반세기, 데뷔 50돌을 맞았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만화인생 50년 이두호씨
한국만화 100년만에…예술로 ‘입성’
작가들도 우열없이 개성으로 승부수
고대~현대까지 ‘한국사’ 작업 매달려
하루 15시간 엉덩이에 곰팡이 핍니다 만화가 이두호 세종대 교수(66·만화애니메이션학과)는 현역 만화가들 가운데 가장 데뷔가 이른 축에 든다. 올해가 한국 만화 100돌인데, 이 교수의 만화인생이 그 절반인 50돌을 맞았다. 1959년, 만화 1세대인 김종래 박기당 등이 활약하던 시절 대본소 만화 <피리를 불어라>를 내며 중학교 2학년에 어엿한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길고 긴 만화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그는 만화를 피해 다녔다. 서양화가를 꿈꿨기 때문이었다. 만화는 그저 호구지책으로만 생각했다.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물감 살 돈조차 없었던 그는 만화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만화를 그리면서도 늘 서양화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치기도 했다. 여러번 만화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은 만화로 돌아오기를 거듭하면서 그는 만화를 자기 인생으로 받아들인다. 그 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 교수가 된 만화가로 한국 만화를 이끌어왔다. 그의 별명은 ’만화계의 뿔따구’. 입바른 소리를 자주 해 생겼다. 정년퇴직 뒤에도 학교에 남아 여전히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만화계에선 2년 전부터 “이두호 선생이 <임꺽정> 이후 모처럼 큰 걸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요즘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7시까지 만화를 그린다. 주말도 없다. 오랫동안 별러왔던 <이두호의 한국사>를 그리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다. 고즈넉한 세종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데뷔 50돌을 맞아 찾아간 기자를 인자한 얼굴로 반겨줬다.
-만화가 교수 1세대이신데, 어느새 정년퇴직을 하셨습니다.
“지난해 8월에 정년퇴임을 했는데, 학교 부탁도 있고 학생들을 가르칠 욕심도 있고 해서 학교에 남아 있습니다.”
-어떤 과목을 가르치시나요?
“지금은 1학년 수업인 ‘만화의 기초’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화는 1학년 때 기초를 다져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처음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새로 그리는 역사만화를 선택하신 계기가 있나요?
“예전부터 그리고 싶었지만 교수를 하면서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년을 1년 앞두고 다시 출판사에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정년 때 맞춰서 시작해보자라고 쉽게 생각했죠.”
-주로 조선시대가 배경인 작품이 많았습니다. 이번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압축하는 것이어서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정말 다루기 어렵습니다. 상상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 뚜렷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어서 사관이라는 것이 더 조심스럽습니다. 동학만 해도 우리 때는 동학란이라고 배웠는데 지금은 동학농민혁명으로 부르죠. 그리고 이전 만화들처럼 구체적인 캐릭터로 풀어나가는 것이 또한 어렵습니다. 제가 그렸던 <임꺽정> 등에는 모두 특정한 캐릭터가 있어서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건 역사니까 모든 상황을 일일이 다 설정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진척이 됐습니까?
“시작한 지 2년 됐는데 딱 2권 그렸습니다.”
1년에 만화책 한 권? 너무 더뎌보이겠지만 작은 부분에 집념을 쏟아붓는 이교수의 고집을 알면 왜 느린지 이해가 된다. 그가 2006년 펴낸 자서전을 보면 그는 만화를 그리면서 자신이 범했던 실수를 뼈아프게 반성하는 모습이 나온다. 한옥 구조를 잘못 그린 일, 한자를 틀리게 쓴 일 같은 것들이다. 그런 반성 때문에 자서전 제목도 <무식하면 용감하다>였을 정도다. 만화가로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독자와의 신뢰다. 그래서 사소한 실수에도 참지 못한다. 이후 그는 대목수의 한옥 강의를 듣고, 순우리말을 각주 붙여가며 만화의 대사로 쓰는 노력을 펼치며 장인처럼 만화를 그려왔다.
-자서전에서 실수를 과감하게 고백하셨던데요.
“이외수 선생의 <칼>에는 칼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작가의 자세한 설명을 읽다보면 ‘졌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작가의 다른 책에 대해서도 이의를 달지 않게 됩니다. 만화가도 똑같습니다. 독자에게 그런 신뢰를 줘야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만화가가 그렇게 되기 싫었는데 결국 다시 만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군대 갔다와서 생활고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만화를 그렸어요, 그러다가 다시 그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교 동기들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그림 열정을 키웠던 친구들이 제가 돈 때문에 예술을 포기하고 만화를 그린다고 비웃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걱정해 준 것인데 자격지심이었죠. 그래서 1979년쯤 2년간 만화를 그만두고 서양화를 그렸죠. 매일 100호나 되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는데 2년쯤 지나자 어느 순간 만화를 그리고 싶어졌어요. ‘아, 만화가 바로 내 운명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화와 저는 숙명처럼 얽혀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한눈 팔지 않고 만화만 그렸죠.”
길을 정한 뒤 그는 우직하고 고집스럽게 한국적인 만화로 파고들었다. 장독대, 또매, 머털도사 같은 우리말 이름 주인공들을 하나하나 탄생시켰다. 그의 대표작인 대하만화 <임꺽정>은 외국어로 번역돼 지금도 수출되고 있다.
-못생긴 만화 주인공 장독대 등 독특한 캐릭터들이 지금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당시 만화 주간지들이 호황이어서 독자 엽서가 많이 왔어요. 그런데 독자들로부터 장독대가 너무 못생겼다는 항의 아닌 항의를 많이 받았습니다. 머털도사는 마감을 코 앞에 두고 하룻밤 사이에 만든 캐릭터예요. 당시에는 머털도사가 그렇게 관심을 끌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화상을 입었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도사가 되는 머털이도 역시 못생긴 캐릭터였죠.”
-그렇게 못생긴 주인공을 내세우는 이유는 뭔가요?
“못 생기면 주인공을 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저는 일단 이야기를 먼저 만든 다음 캐릭터에 맞는 얼굴을 찾아줍니다. 어떤 얼굴이 캐릭터를 생생하게 나타내는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다보니 개성있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화에 대한 대중들과 관심은 날로 커졌지만 사회의 인식은 여전히 천박했다. 그림을 던지고 자긍심을 가지며 그렸던 그의 만화가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혐의로 검찰에 불려가기도 했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절필 선언까지 하기도 했다.
-그때만해도 만화가 검열 대상이었죠?
“지금은 검열이 없어졌지만 지금도 자기 검열을 하는 저를 보고 놀라곤 합니다. 1997년 스포츠신문에 연재한 <째마리>가 검찰 수사를 받았어요. 검찰에서 앞으로 청소년에게 유해한 만화를 그리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라는 겁니다. 저는 한번도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만화를 그린 적이 없다고 반발하면서 서약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절필을 선언했고 얼마 동안 만화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만화가들의 대표인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어깨가 무거웠겠습니다.
“한번 부딪쳐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기소유예가 됐지만 <천국의 신화>를 그린 이현세씨는 기소됐죠. 이현세씨 재판에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갔었어요. 무죄를 선고하는 날 재판정에서 만세 삼창을 부를 각오였죠. 그런데 이 교수 선고 날짜가 갑자기 잡혀 법정에 가지 못해서 만세 삼창을 하지 못했어요. 만화를 그리는 게 죄입니까? 자존심과 긍지로 만화를 그렸는데 왜 만화를 내 마음대로 못 그리게 하느냐는 오기가 났습니다.”
-올해 한국만화가 100돌을 맞았습니다. 예전과 견주면 만화에 대한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고 보십니까.
“이제 만화도 예술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고, 만화 100돌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 만화가 당당히 전시되고 있습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만화가들을 수사하고 재판에 회부했는데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만화가 가운데 누구를 가장 높게 평가하십니까.
“시사만화가로는 <고바우 영감>을 그린 김성환 선생님을, 극화 만화가는 1960년대 40권짜리 대작인 <도전자>를 선보였던 박기정 선생님을 꼽습니다.”
-동료만화가 가운데는 어떤 분을 좋아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박학다식한 고 고우영 선생과 특이한 필법의 박수동 선생이에요. 저는 술을 못하지만 두사람 다 모두 말술이었고 낚시를 좋아해 자주 어울렸습니다. 역사만화를 그리는 윤승운 선생은 저와 동갑(1943년생)인데, 가끔 만나요. 주로 제가 듣습니다. 저희 막내가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데 제 만화보다 윤 선생 만화가 더 재미있다고 해서 질투한 적도 있었습니다.(웃음)”
-반세기 동안 만화를 그리셨습니다.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화가들의 테크닉은 이제 우열이 없습니다. 이제 만화는 기획입니다.”
-학생들에게 만화는 엉덩이로 그리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하신다던데요?
“만화는 끈기 있게 그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동입니다. 만화가는 하루에 15시간씩 책상에 붙어있어 엉덩이에 곰팡이가 피는 일입니다. 학생들에게 그런 기본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러나 만화는 그림만 충실해서는 안 됩니다. 내용이 충실해야 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두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작가정신입니다. 이건 누가 봐도 예술이라고 하는 말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로는 재미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야기와 인물에 홀랑 빠져야 합니다. 물론 두가지는 겹치지 않는 범주입니다. 학생들은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자신들의 개성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화에는 1등 2등이 없습니다. 오직 개성이 있을 뿐입니다.”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작가들도 우열없이 개성으로 승부수
고대~현대까지 ‘한국사’ 작업 매달려
하루 15시간 엉덩이에 곰팡이 핍니다 만화가 이두호 세종대 교수(66·만화애니메이션학과)는 현역 만화가들 가운데 가장 데뷔가 이른 축에 든다. 올해가 한국 만화 100돌인데, 이 교수의 만화인생이 그 절반인 50돌을 맞았다. 1959년, 만화 1세대인 김종래 박기당 등이 활약하던 시절 대본소 만화 <피리를 불어라>를 내며 중학교 2학년에 어엿한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길고 긴 만화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그는 만화를 피해 다녔다. 서양화가를 꿈꿨기 때문이었다. 만화는 그저 호구지책으로만 생각했다.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물감 살 돈조차 없었던 그는 만화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만화를 그리면서도 늘 서양화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치기도 했다. 여러번 만화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은 만화로 돌아오기를 거듭하면서 그는 만화를 자기 인생으로 받아들인다. 그 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 교수가 된 만화가로 한국 만화를 이끌어왔다. 그의 별명은 ’만화계의 뿔따구’. 입바른 소리를 자주 해 생겼다. 정년퇴직 뒤에도 학교에 남아 여전히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만화계에선 2년 전부터 “이두호 선생이 <임꺽정> 이후 모처럼 큰 걸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요즘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7시까지 만화를 그린다. 주말도 없다. 오랫동안 별러왔던 <이두호의 한국사>를 그리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다. 고즈넉한 세종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데뷔 50돌을 맞아 찾아간 기자를 인자한 얼굴로 반겨줬다.
장독대·머털·임꺽정…‘엉덩이’로 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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