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날 학교 앞 분식집은 따스한 쉼터가 된다. 수업을 마친 초등학생들의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매거진 esc] 오래 전 여고 앞 분식집 풍경 회고
위트 넘치는 젊은 소설가 김중혁이 한 장의 고백서를 보내 왔다. 한때 그는 학교 앞 분식점네 아들이었다. 음악산문집 <모든 게 노래>를 낼 정도로 노랫가락에도 조예가 깊은 그가 유년은 뜻밖에도 떡볶이 가락에 파묻혀 보냈다. 그 시절 달콤하고 짜릿했던 얘기다.
분식 회계에 대해선 내가 좀 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여자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분식집을 운영하셨고, 나는 가끔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떡볶이나 우동 판 돈을 슬쩍하곤 했다. 팔긴 많이 판 것 같은데 돈이 비어 보였던 것은 내가 분식점 회계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어머니께 죄송하다. 어머니 덕에 오락실에서 우주비행선과 유에프오는 원없이 격파했다.
분식점 시절을 생각하면 떡볶이 냄새와 여자 고등학생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머니는 전부터 분식집 장사를 했지만 학교 앞 장사가 잘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여자고등학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예전 가게에서는 도넛와 찐빵 위주로 팔았지만 여고 앞이라면 메뉴가 달라야 했다. 떡볶이와 어묵과 라면과 김밥과 우동이 주메뉴로 등극했다. 어머니는 가끔 그 시절을 얘기할 때면 일단 진저리를 쳤다. 그때의 상황이 떠오르는 듯했다. 점심시간이면 여고생들이 좀비들처럼 (어머니의 비유는 아니고, 얘기를 자세히 들어 보니 딱 좀비들이다) 가게로 달려들었다. 떡볶이와 어묵을 샅샅이 뜯어 먹은 여고생들이 수업종 울리는 교실로 돌아가면, 땡땡이를 치고 나온 날라리들이 조용한 가게로 들어온다. 날라리들이 우아하게 간식시간을 마친 뒤 학교 반대편으로 가고 나면 가게에 잠시 동안의 평화가 찾아든다. 내가 어머니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50원을 들고 사라지는 게 이때다. 어머니의 정신이 쏙 빠졌을 때 동전을 쏙 빼서 사라지는 것이다. 몇시간 뒤 하교시간이 되면 다시 전쟁이 시작된다. 장사는 잘됐다. 분식의 명당인 여고 앞이니까 당연하다. 하지만 가게의 회계는 점점 더 난감해졌다. 장사가 잘되긴 했지만 일시적이었다. 학교 앞이라 유동인구가 적었고, 주말이나 방학이면 공치는 날이 다반사인데다, 먹성 좋은 여학생들에게 서비스를 퍼주다 보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어쩌면 내가 분식 회계에 손을 댔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어머니는 그래도 그 시절을 좋아하신다. 어찌 되었건 가게에는 학생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로 생기가 넘쳤고, 생전 처음 만들어보는 떡볶이와 우동을 다들 맛있게 먹었다. (죄송하지만)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훌륭한 편이 아니었고, 지금도 그렇다. 오밀조밀하고 섬세하다기보다 ‘터프’한 편이고, 정갈하기보다 수더분한 솜씨였다. 어쩌면 오래 분식점 장사를 하신 탓에 빨리 음식을 내는 솜씨가 몸에 밴 것은 아닐까 추측해보곤 한다.
어머니가 그 시절을 좋아하는 또다른 이유는 그곳에서 자전거를 처음 배웠기 때문이다.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어머니는 여고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배웠고, 오랜 연습 끝에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다. 분식점 시절을 생각할 때 어머니가 자전거 타는 평화로운 풍경도 떠오른다. 아버지가 자전거 뒤를 잡아주고 어머니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도 떡볶이를 좋아한다. 라면이나 탄산음료나 햄버거는 거의 먹지 않지만 떡볶이는 여전히 먹는다. 길거리에서도 자주 사 먹는다. 떡볶이는 어떤 순간에도 거부하기 힘들다. 떡볶이를 먹는 순간, 떡과 어묵과 파를 동시에 집은 다음 빨간 국물에 찍어서 입속으로 넣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평안이 밀려온다. 맛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다. 나는 떡볶이를 맛으로 먹는 게 아니다. 떡볶이를 먹으면 나는 분식점 아들이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김중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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