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디지털 로맨스 소설 열풍
중고딩 시절 책상서랍 속에 두고 몰래몰래 읽었던 로맨스 소설.
웹소설·전자책과 함께 화려하게 돌아왔다.
남자는 여전히 탄탄한 근육질 몸을 자랑하고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차도남이지만 그 옛날 캔디들의 변신이 눈에 띈다.
중고딩 시절 책상서랍 속에 두고 몰래몰래 읽었던 로맨스 소설.
웹소설·전자책과 함께 화려하게 돌아왔다.
남자는 여전히 탄탄한 근육질 몸을 자랑하고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차도남이지만 그 옛날 캔디들의 변신이 눈에 띈다.
“차갑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가빈을 가만히 응시하던 하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벽을 짚고 있던 오른손을 내려 가빈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순간 자신을 속박하는 그의 손길에 놀란 가빈이 몸을 빼보려 비틀었지만 하준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가로막았다. 밀어내려는 가빈의 손길도 무시한 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입안으로 파고들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숨결> 중)
금요일 밤, 사랑이 시작된다. 일주일 내내 업무와 사람에 치이며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박영신(가명·48)씨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스마트폰 화면을 쓸어내렸다. 침대에 엎드린 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하아, 몸의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을 때, 복잡한 생각 하고 싶지 않을 때 로맨스를 읽어요.” 읽다 보면 밤이 지나갔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지나갔다. 기업 임원이자 비혼인 그의 주말은 요즘 로맨스로 가득 찬다.
캔디·신데렐라는 노생큐
남자는 재력보다 정력
결혼 해피엔딩은 불변
회사에선 늘 일처리가 분명하고 이성적인 편이다. 수많은 직원들을 통솔하는 자리다. 그런 그가 이토록 로맨스 소설을 즐긴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상관없다. “여자들이 바보라서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에 열광하는 건 아니에요. 누가 현실 속에 그런 사람이 없는지 모르나요? 현실에 없으니, 소설 보고 대리 만족이라도 하는 거지요.” 어디 보자. 우월한 외모의 재벌가 이복 남매, 알고 보니 피가 안 섞인 사이, 여동생에게 집착하는 오빠라…. 피식, 읽다 보니 웃음이 새어나온다. 하지만 하준이 ‘참지 못하고’ 가빈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는 장면에서 저릿함을 느꼈다. 화면을 내리는 손가락질은 멈출 줄 모른다. <숨결>은 5월 둘째 주 현재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운영하는 웹소설의 로맨스 분야 조회수 1위를 달리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훈자’라는 필명과 그가 스스로 써놓은 ‘신출내기’라는 프로필뿐. 2014년 한국 여성들의 밤에 로맨스가 있다. 언제는 없었나. 예전에도 있었다. 1980~90년대 여학생들의 책상 서랍 속에 하나씩 숨겨져 있던 ‘할리퀸’ 문고판이 있었고, 2000년대 들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로맨스 소설책들도 인기였다. 하지만 요즘은, 거기서 더 진화했다. 독자들은 이제 로맨스를 한밤중에 불 꺼두고도 스마트폰, 전자책 단말기 등 전자기기를 통해 본다. 로맨스가 손안에 들어왔다. 만나기 쉬워지니 사랑도 깊어진다. 네이버가 ‘웹소설’이란 플랫폼을 통해 로맨스 소설 연재를 무료로, 미리보기를 유료로 공급한 지 일년이 지났다. 웹소설 이용자들은 저녁 8시부터 자정에 가장 많이 접속한다. 1년 새 웹소설의 조회수는 216% 성장했다. 웹소설에 연재된 <광해의 연인>은 1년2개월 동안 300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억대 연봉 작가들도 탄생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도 ‘이(e)연재’ 서비스를 통해, 인터넷 기업 카카오도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로맨스 연재를 시작했다. 이수림 전 한국로맨스소설작가협회(로협) 회장은 “로맨스 시장은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며 “10년 넘게 책을 내온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더이상 종이책을 내지 않고 전자책만 내거나 온라인 연재를 계획하는 등 노력하고 있지만 변화 속도를 쫓아가는 게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로맨스 소설에 독자와 자본이 몰리니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도 크게 늘고 있다. 네이버 웹소설의 아마추어 도전 코너인 ‘챌린지 리그’에만 지난 1년2개월 사이 7만6000명의 아마추어 작가들이 20만편 이상의 작품을 올렸다. 하루 400편꼴이다. “거절할 새도 없이 남자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청아는 의자에 엉덩이가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정신이 혼미한 탓도 있지만 남자는 상처받은 여자를 다루는 방식이 능숙했다. 그녀의 횡설수설을 느긋하게 들어주었고, 잔이 비지 않게 술도 채워준다. 남자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언제 적인지 까마득했다. 문득 깨달았을 때 그녀는 수다를 떨며, 목까지 젖히고 웃었다.”(<이 남자의 여자 제조법> 중) 1월부터 5월7일까지 독자들이 예스24에서 전자책을 구입한 시간대를 분석해보니 로맨스를 포함한 장르문학 전자책의 34%가 밤 9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 팔려나갔다. 남성 독자가 전자책을 제일 많이 구입하는 시각은 오후 5시인데 여성 독자는 밤 11시다. 김희조 예스24 엠디는 “우리나라는 로맨스 소설을 대놓고 읽는 분위기가 아니어서인지 표지가 보이지 않는 전자책의 경우 전체 매출의 50%가 장르문학이고,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는 항상 로맨스물 차지”라고 설명했다. 전자책으로는 ‘19금 로맨스’가 특히 인기다. 5월 첫째 주 기준으로 교보문고와 예스24 모두 전자책 순위 10위권에 ‘19금’이 7~8권이다. 인터넷에 연재하는 로맨스의 경우 ‘19금’의 농밀한 내용을 담는 경우는 드물다. 네이버 웹소설의 경우 정책적으로 “10~20대 초반 여성들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수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책은 다르다. 주요 구매자도 30~40대 여성이다. 5월2~8일 예스24에서 가장 잘 팔린 전자책은 ‘19금 로맨스’인 이상원 작가의 <이 남자의 여자 제조법>이다. 태광그룹 비서, 낯선 남자와의 하룻밤, 그리고 새로 온 이사가 바로 그 남자…. 책에는 특히 남자의 정력과 관계된 묘사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로맨스 소설 팬이기도 한 이다혜 <씨네21> 기자는 “한국의 로맨스 소설은 남자 주인공의 압도적인 부와 정력이 큰 특징”이라며 “최근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져 가면서 남자의 매력 요소로 재력보다 정력이 더 강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진백 네이버 웹소설팀장은 “이제 로맨스 소설에 신데렐라나 캔디는 없다”며 “작가들도 여성 독자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여자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나 재력을 높여 쓰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로맨스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해피엔딩’이다. 이다혜 기자는 “로맨스 소설은 중간에 아무리 난리법석을 떨어도 결국 마지막에는 행복한 결혼으로 끝나고,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장면까지 보여준다”며 “이런 구식 판타지를 즐기는 여성 독자 입장에서는 어찌 됐든 로맨스 소설이 내놓고 즐길 수 없는 ‘길티 플레저’인 셈”이라고 말했다.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오히려 “한국 여성이 로맨스 소설을 읽는 이유를 묻는 사회의 행태 자체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에 없는 남자, 꿈같은 사랑 이야기를 읽는 행복한 시간에 대해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느냐는 지적이다.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이 주말과 이어져 ‘황금연휴’가 있었던 5월. 로맨스 소설 팬들이 모이는 한 인터넷 카페에는 여성 독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연휴라서 집에 가족들이 다 있으니 로맨스 소설을 못 봐서 너무 싫네요.” “주부들에게 쉬는 날은 쉬는 게 아니죠. 삼식이(세끼를 다 집에서 먹으려는 남자를 이르는 말)들이 잔뜩….” 현실은 고단하다. 좀처럼 변하지를 않는다. 모두 잠든 시간에 나비처럼 날아가 잠시나마 꽃에 안긴다. 꿈꾸고 상상하고 웃는다. 그리고 힘을 낸다. 오늘 밤에도 깜깜한 방 안에서 홀로 빛을 내는 스마트폰처럼, 로맨스 소설은 여성들을 부르고 있다.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남자는 재력보다 정력
결혼 해피엔딩은 불변
회사에선 늘 일처리가 분명하고 이성적인 편이다. 수많은 직원들을 통솔하는 자리다. 그런 그가 이토록 로맨스 소설을 즐긴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상관없다. “여자들이 바보라서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에 열광하는 건 아니에요. 누가 현실 속에 그런 사람이 없는지 모르나요? 현실에 없으니, 소설 보고 대리 만족이라도 하는 거지요.” 어디 보자. 우월한 외모의 재벌가 이복 남매, 알고 보니 피가 안 섞인 사이, 여동생에게 집착하는 오빠라…. 피식, 읽다 보니 웃음이 새어나온다. 하지만 하준이 ‘참지 못하고’ 가빈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는 장면에서 저릿함을 느꼈다. 화면을 내리는 손가락질은 멈출 줄 모른다. <숨결>은 5월 둘째 주 현재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운영하는 웹소설의 로맨스 분야 조회수 1위를 달리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훈자’라는 필명과 그가 스스로 써놓은 ‘신출내기’라는 프로필뿐. 2014년 한국 여성들의 밤에 로맨스가 있다. 언제는 없었나. 예전에도 있었다. 1980~90년대 여학생들의 책상 서랍 속에 하나씩 숨겨져 있던 ‘할리퀸’ 문고판이 있었고, 2000년대 들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로맨스 소설책들도 인기였다. 하지만 요즘은, 거기서 더 진화했다. 독자들은 이제 로맨스를 한밤중에 불 꺼두고도 스마트폰, 전자책 단말기 등 전자기기를 통해 본다. 로맨스가 손안에 들어왔다. 만나기 쉬워지니 사랑도 깊어진다. 네이버가 ‘웹소설’이란 플랫폼을 통해 로맨스 소설 연재를 무료로, 미리보기를 유료로 공급한 지 일년이 지났다. 웹소설 이용자들은 저녁 8시부터 자정에 가장 많이 접속한다. 1년 새 웹소설의 조회수는 216% 성장했다. 웹소설에 연재된 <광해의 연인>은 1년2개월 동안 300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억대 연봉 작가들도 탄생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도 ‘이(e)연재’ 서비스를 통해, 인터넷 기업 카카오도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로맨스 연재를 시작했다. 이수림 전 한국로맨스소설작가협회(로협) 회장은 “로맨스 시장은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며 “10년 넘게 책을 내온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더이상 종이책을 내지 않고 전자책만 내거나 온라인 연재를 계획하는 등 노력하고 있지만 변화 속도를 쫓아가는 게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로맨스 소설에 독자와 자본이 몰리니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도 크게 늘고 있다. 네이버 웹소설의 아마추어 도전 코너인 ‘챌린지 리그’에만 지난 1년2개월 사이 7만6000명의 아마추어 작가들이 20만편 이상의 작품을 올렸다. 하루 400편꼴이다. “거절할 새도 없이 남자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청아는 의자에 엉덩이가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정신이 혼미한 탓도 있지만 남자는 상처받은 여자를 다루는 방식이 능숙했다. 그녀의 횡설수설을 느긋하게 들어주었고, 잔이 비지 않게 술도 채워준다. 남자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언제 적인지 까마득했다. 문득 깨달았을 때 그녀는 수다를 떨며, 목까지 젖히고 웃었다.”(<이 남자의 여자 제조법> 중) 1월부터 5월7일까지 독자들이 예스24에서 전자책을 구입한 시간대를 분석해보니 로맨스를 포함한 장르문학 전자책의 34%가 밤 9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 팔려나갔다. 남성 독자가 전자책을 제일 많이 구입하는 시각은 오후 5시인데 여성 독자는 밤 11시다. 김희조 예스24 엠디는 “우리나라는 로맨스 소설을 대놓고 읽는 분위기가 아니어서인지 표지가 보이지 않는 전자책의 경우 전체 매출의 50%가 장르문학이고,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는 항상 로맨스물 차지”라고 설명했다. 전자책으로는 ‘19금 로맨스’가 특히 인기다. 5월 첫째 주 기준으로 교보문고와 예스24 모두 전자책 순위 10위권에 ‘19금’이 7~8권이다. 인터넷에 연재하는 로맨스의 경우 ‘19금’의 농밀한 내용을 담는 경우는 드물다. 네이버 웹소설의 경우 정책적으로 “10~20대 초반 여성들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수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책은 다르다. 주요 구매자도 30~40대 여성이다. 5월2~8일 예스24에서 가장 잘 팔린 전자책은 ‘19금 로맨스’인 이상원 작가의 <이 남자의 여자 제조법>이다. 태광그룹 비서, 낯선 남자와의 하룻밤, 그리고 새로 온 이사가 바로 그 남자…. 책에는 특히 남자의 정력과 관계된 묘사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로맨스 소설 팬이기도 한 이다혜 <씨네21> 기자는 “한국의 로맨스 소설은 남자 주인공의 압도적인 부와 정력이 큰 특징”이라며 “최근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져 가면서 남자의 매력 요소로 재력보다 정력이 더 강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진백 네이버 웹소설팀장은 “이제 로맨스 소설에 신데렐라나 캔디는 없다”며 “작가들도 여성 독자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여자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나 재력을 높여 쓰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로맨스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해피엔딩’이다. 이다혜 기자는 “로맨스 소설은 중간에 아무리 난리법석을 떨어도 결국 마지막에는 행복한 결혼으로 끝나고,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장면까지 보여준다”며 “이런 구식 판타지를 즐기는 여성 독자 입장에서는 어찌 됐든 로맨스 소설이 내놓고 즐길 수 없는 ‘길티 플레저’인 셈”이라고 말했다.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오히려 “한국 여성이 로맨스 소설을 읽는 이유를 묻는 사회의 행태 자체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에 없는 남자, 꿈같은 사랑 이야기를 읽는 행복한 시간에 대해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느냐는 지적이다.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이 주말과 이어져 ‘황금연휴’가 있었던 5월. 로맨스 소설 팬들이 모이는 한 인터넷 카페에는 여성 독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연휴라서 집에 가족들이 다 있으니 로맨스 소설을 못 봐서 너무 싫네요.” “주부들에게 쉬는 날은 쉬는 게 아니죠. 삼식이(세끼를 다 집에서 먹으려는 남자를 이르는 말)들이 잔뜩….” 현실은 고단하다. 좀처럼 변하지를 않는다. 모두 잠든 시간에 나비처럼 날아가 잠시나마 꽃에 안긴다. 꿈꾸고 상상하고 웃는다. 그리고 힘을 낸다. 오늘 밤에도 깜깜한 방 안에서 홀로 빛을 내는 스마트폰처럼, 로맨스 소설은 여성들을 부르고 있다.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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