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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녀를 ‘날요’라 부른다

등록 2015-03-11 19:42수정 2015-03-12 10:00

[매거진 esc]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친한 동생이 있는데 와도 돼요?” 친한 동생이 친한 동생을 불러도 되느냐고 물었다. “예뻐?” 나는 되물었다. “네. 별명이 ‘날요’예요.” 날라리 요정이란 뜻인가? “기상캐스터거든요. 날씨의 요정.”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정확하게는 나와 남자인 다른 친구 둘이서. “이름이 세라예요. 이세라. 케이비에스 기상캐스터.” 나와 남자인 다른 친구는 스마트폰을 꺼내 ‘이세라’를 검색했다. 사진을 보고 확신했다. 세라는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

세라가 왔다. “세라야, 안녕!” 크게 말했다. 세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환하게 웃었다. 나, 얘 좋아하나? 그때는 그저 황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나중에 곰곰 세라를 떠올려보니 좋아하는 것 같다. 그 감정이 이성의 어떤 것보다 컸다. 나는 세라가 가진 언어의 결들, 그녀의 본성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세라와 나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어느 목요일 오전 10시30분 서울 강남 도산사거리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세라가 머리에 집게 같은 걸 꽂고 나타났다. 일부러 꽂은 건가? 저렇게 밖에 다녀도 안 부끄러운가? “세라야! 머리에 집게.” “어머.” 카페엔 세라와 나 둘뿐이었다.

기상캐스터 이세라. 사진 박미향 기자 <A href="mailto:mh@hani.co.kr">mh@hani.co.kr</A>
기상캐스터 이세라.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기상캐스터 이세라(27·사진)는 날씨 전문 채널 ‘케이(K)웨더’를 시작으로 연합뉴스티브이 <뉴스와이(Y)>를 거쳐 2012년부터 한국방송(KBS)에서 날씨를 전한다. “케이비에스 기상캐스터 중 한명이 그만뒀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원했어요. 경력자를 뽑았는데도, 지원자가 굉장히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하니까, 아무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고 세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뽑혔어?” “나를 봐도 모르겠어요?” “응.” 세라를 만나면 나는 찧고 까불며 즐거워진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가나? 한국방송 다음으로 또 갈 데가 있나? 아, 그래서 연예인이 되는 건가? 기상캐스터는 수명이 짧으니까. “세라야, 그럼 너도 이제 연예인 하겠네?” 세라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지만 물었다. 그 대답을 듣는 게 좋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상캐스터 일이 좋고 이 일에 집중하고 싶어요. 그런데 마흔쯤 되면 오빠, 나는 글을 쓸 거야.” 세라를 처음 만났을 때 친한 동생은 나를 소개하며 “시도 쓰는 오빠야”라고 말했다. 보통 여자들은 이 말을 들으면 신기하게 쳐다본다. 그런데 세라는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오빠, 저도 시 좋아해요.” 그래서 내가 시 쓰는 누구랑 누구랑 또 누구의 이름을 막 읊었더니 다 알고 있었다. 아니, 무슨 이런 기상캐스터가 다 있어. “저, 예고에서 문창과였어요. 대학도 국문과에 갔고요. 시랑 소설 썼어요.” 그래서 캐보니 심지어 잘 썼다. 굳이 대학 이름을 말하자면 세라는 동국대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에서 주최하는 ‘동대문학상’에서 시로 가작, 소설로 장원을 받았다. “일학년 때는 시를 썼고, 이학년이 되면서 소설을 썼어요. 세상에 대해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방식이 시는 아니었던 것 같았어요. 소설이 더 적합한 장르라고 생각한 거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소설은 과연 나에게 맞는 장르인가, 고민하게 된 거죠.” 세라가 하얀 도자기잔을 입술에 대며 말했다. 카페 안의 천장이 높아서 세라의 목소리와 음악 소리가 섞인 채 웅웅 울렸다. 그것이 어떤 은유처럼 느껴졌다. “근데 오빠, 나 며칠 전에 점 빼서 얼굴에 아직 자국 남아 있어. 사진기자분이 지워주시겠지.” 뜬금없는 지지배.

“이런 경우는 있지.
이 날씨에 저런 복장이 어울리나
태풍이 불고 있는데
시스루를 꼭 입어야 하나?”

요즘 세라의 관심사는 영화다. ‘날요’를 모셔놓고 영화 얘기를 하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서 너는 영화에 대해 칼럼을 쓰겠다는 거야?” “네!” 방송하던 애가 칼럼이라니. “생각을 해봤는데, 영화가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매체 같아요. 영화에 대해 쓰면 나도 세상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 같아. 나는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기상캐스터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예요.” 나는 이렇게 말하는 세라의 언어, 그녀의 의지가 좋다.

세라는 남자친구가 없다. 이상형은 있다. 물론 나는 아니다. 등이 넓고, 뭐 딱히 나 정도의 미남은 아니더라도, 세라가 뭐라고 말하든 허허 웃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요즘 그런 남자가 있어?” 지금 네가 보고 있잖아, 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나는 바람둥이니까. 등도 좁고.

“세라야, 그런데 기상캐스터들은 옷을 왜 다 그렇게 섹시하게 입어?” 부끄러워하면서 물었다. “오빠, 우리 회사는 안 그래요. 공영방송이잖아요. 야하게 입으면 경고 받아요. 그리고 의상은 다 협찬이에요. 우리 마음대로 입을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다시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쟤가 섹시 콘셉트로 떠보려고 하는구나, 생각이 드는 기상캐스터도 있지 않아?” “그런 것까지는 내가 말하기가 좀 그렇고, 이런 경우는 있지. 이 날씨에 저런 복장이 어울리나? 태풍이 불고 있는데 시스루를 꼭 입어야 하나?” 물론 나는 시스루는 어떤 경우라도 옳은 거라고 말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일수록 시스루한 의상으로 시청자들의 우울한 기분을 날려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세라는 웃었다.

“기상캐스터의 복장이라는 게 날씨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어요. 정보 전달력이 가장 중요한 직업이잖아. 우리가 라디오방송을 하는 건 아니니까 눈에 보이는 것에도 신경을 쓰긴 써야겠죠. 그리고 예쁜 옷을 입으면 누구나 기분 좋죠.”

세라는 평일엔 한국방송 4시 뉴스와 7시 뉴스에서 날씨를 알려주고, 주말엔 9시 뉴스에서 날씨를 알려준다. 9시 뉴스는 녹화고, 나머지는 생방송이다. 보통 두세 시간 전에 출근해서 메이크업을 하고, 의상을 입고, 중간중간 대본을 쓴다. 직접 쓴다. 누가 써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기상청에서 제공하는 사이트가 있어요. 아이디를 받은 사람들만 접속할 수 있어요. 그걸 보고 기사 방향을 정하고, 쓰는 거죠.” 시도 쓰고 소설도 썼던 세라니까, 날씨 기사도 당연히 잘 쓰겠지. “그런데 오빠, 쓸 수 있는 단어가 정해져 있어서 아쉬워요. 결국 날씨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비슷한 것도 조금이라도 다르게 적어보려고 해요. 어떻게 더 정확하고, 알기 쉽게,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예요.”

세라가 갔다. 갑자기 우아한 표정을 지으며 영 어울리지 않는 꼿꼿한 걸음으로 카페를 가로질러 나갔다. 나는 혼자 남아 이 인터뷰를 적는다. ‘날요’가 사라진 자리는 겨울의 빈자리 같았다. “오빠, 주말 날씨 장난 아니야. 나들이 가기에 딱!” 세라가 한 말이 계속 생각났다. 봄이 오는가. “하지만 한두 차례의 꽃샘추위가 아직 남아 있어요.”

스마트폰을 꺼냈다. 친한 동생에게 메시지를 보내려고. ‘고마워. 네 덕에 날요를 만났어’라고 적고 지웠다. 부끄러워서. 대신 여기 적는다.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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