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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범의 의심, 박정범의 진심

등록 2015-04-08 20:52수정 2015-04-10 11:18

[매거진 esc]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데뷔작 <무산일기>로 국제영화제 상 17개 받고 두번째 연출작 <산다> 내놓은 박정범 감독
3월에 영화제 시상식을 취재하기 위해 홍콩에 갔다. 아시안필름어워드가 공동 주최한 특별상 시상식이었다. 박정범 감독을 거기서 처음 만났다. 누군지 몰랐다. 창피해. ‘알았다’라고 적고 싶은데 그건 거짓말이니까.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봤더니, 헐, 첫 장편 <무산일기>로 국제영화제 17관왕을 차지했다고 나온다. 직장 없이 빈둥대는 동네 형처럼 보이는데. 수염은 길고, 피부는 까맣고. 그런데 대단한 사람이라니.

박정범 감독. 사진 이우성 제공
박정범 감독. 사진 이우성 제공
영화 <무산일기>는 한국에 사는 탈북자의 이야기다. 그런 사람들은 주민등록번호가 125로 시작된다고 한다. 그랬구나, 그들은 그렇게 구분당하고 있구나. 포스터를 찾아보면 느끼겠지만, 그리고 당연히 편견이겠지만, 박정범은 탈북자처럼 생겼다. 너무 어울린다. 연기를 잘해서 그런가. 감독 박정범, 주연 박정범이다. 그런데 처음 만든 장편영화로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17개나 받으면…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나? 부담돼서. 사람들의 기대가 원망스러워질 텐데. 상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두번째 장편영화 <산다>를 찍기까지 4년이 걸렸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장편을 찍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산다>를 찍으면서 느낀 것은 어차피 나는 나를 뛰어넘는 영화를 못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통해 조금씩 배워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몇 줄 쓰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거 별로겠지만, 이름도 몰랐지만, 나는 박정범이라는 사람이 좋다. 고뇌하잖아. 유명해지려고,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감독이 되려고 영화를 찍는 게 아니잖아. 세월호 피해자들을 무시하는 게 짜증나고, 정치인들이 지랄하는 게 짜증나서, 이따위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지만, 박정범 같은 사람이 있어서 겨우겨우 버티고 산다. 나는 그렇다.

심지어 그의 두번째 영화, 방금 그의 말에서 거론된 영화 <산다>는 러닝타임이 3시간이다.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보나마나 지루한 작가주의 영화일 텐데, 3시간이라니? 어떤 극장이 이 영화를 걸려고 하겠어? 누가 이걸 보려고 하겠냐고?

“시나리오를 썼을 때부터 3시간이 넘을 것 같다는 예감은 들었습니다. 시나리오 분량이 무려 84페이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는 대부분의 장면을 원 신 원 컷으로 찍으려고 결심했습니다. 3시간이면 관객분들이 보시기에 견디기 힘든 시간이지만 저는 이 영화의 운명을 믿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운명 말입니다. 이 영화가 전달해야 하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운명’이라는 말, 그냥 운명이 아니라 영화의 운명이라는 말, 아름답다. “예전에 제가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 <시> 조감독을 할 때, 감독님께서 저에게 ‘어떤 영화든 그 영화의 운명이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시나리오를 썼을 때… 저는 이 영화의 운명이 이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창동에게 배웠구나. 게다가 함께 작업한 영화가 <시>라니. “제 영화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으라면 이창동 감독님의 연출부가 된 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 조감독을 하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지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박정범이 이창동 감독에게 배운 것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나는 모든 창작가가 예술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술가와 그저 무엇인가를 만드는 자를 구분하는 내 기준은 이렇다. 질문할 수 있는가? 질문하게 만드는가? 예술가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다만, 갈수록 예술가는 줄어들고,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만 늘어나니까….

<산다>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젊은 사내의 이야기다. 생존에 관한 이야기고, 절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감독 박정범, 주연 박정범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무산일기>도 <산다>도 ‘막장’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박정범은 왜 이런 것에 매력을 느끼는 걸까?

“쓰러져 가는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 행복은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는가
저는 늘 궁금합니다”

물론 박정범은 대답해주었다. 그가 이 말을 할 때 여러 매체의 기자들, 시상식을 주최한 샴페인 브랜드 담당자들, 그리고 영화평론가 오동진씨와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와중이었다. 그는 농담하듯 웃으며 말했다. “강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유년 시절은 저에게 모순된 세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늘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답을 찾는 중입니다.” 나는 봤다. 이 말을 할 때의 그의 눈.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스스로 의심하는 눈.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나름의 표정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사진 이우성 제공
사진 이우성 제공
“저는 쓰러져가는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 나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싫다. 바보 같은 말 아닌가? 개천에서 용이 안 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개천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잖아. 그런데 왜 그딴 말로, 개천은 묻고 용만 부각되게 하는가! <무산일기>와 <산다>는 박정범이 모순된 세계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용’은 없다. ‘개천’이 있다. 5월21일에 개봉한다. “많은 사람이 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극장 입장에서도 상영시간이 긴 영화를 걸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보신 분들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남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면 좋겠습니다. 왜 행복은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는가, 저는 늘 궁금합니다.”

어떤 질문은 자체로 위대하다. 왜 행복은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을까? 나는 <무산일기>를 안 봤다. 영화를 안 보고 이 글을 써서, 박정범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액션 영화를 좋아한다. <무산일기>처럼 현실의 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걸 나는 못 본다. 등 돌리고 싶어서, 그것이 내가 처한 일이 아니어서. 재미도 없고. 그럼에도 내가 영화도 보지 않고 박정범에 대해 쓰는 건 잘못됐다. 비난을 받겠다. 그러나 나는 굳이 이렇게 변명하고 싶다. 어떤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무산일기>는 상을 17개나 받았지만 관객수는 1만1천명 정도였다. 언론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천만 관객 시대에.

<산다>가 곧 개봉하지만 극장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까? 상이라면 <산다>도 많이 받았다. 로카르노영화제 청년비평가상,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과 배급상, 싱가포르영화제 특별언급상, 피렌체한국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똑똑한 영화는 여러 액션 영화에 밀려서 금방 잊힐 것이다. 그래서 이 두 편의 영화를 알리는 것이 나의 알량한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 왜 행복이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는지, 이 시대는 처절히 통감하고 반성하고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더불어 나는 박정범의 미래를 본다. 그가 찍어 나갈 그 자신의 영화사를 본다. “어렸을 적 아버지 손을 잡고 대한극장에 갔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스필버그 감독님의 <구니스> <이티> <백 투 더 퓨쳐>를 보며 행복해했던 기억이 저한테는 중요합니다.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고, 그 과정이 가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더 많은 관객들과 제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영화의 화법에 배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박정범은 늑대만큼 커다란 개를 키운다. 일주일에 3일 정도는 운동을 하고, 한번 조깅을 시작하면 7~8㎞를 뛴다. 사랑하는 애인이 있다. 올해 마흔이 되었다. 서른처럼 보인다. 영화제 시상식에 초대받았지만, 한쪽 구석에서 샴페인을 홀짝이며 서 있는다. 동경했던 영화감독이 지나가면 “와, 와!” 놀란다. 가난하다. 촌스럽다. 정직하다.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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