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인천 문학주경기장에서 열린 ‘좀비런‘ 행사. 사진 박미향 기자
허~억, 허~억.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지금 저 앞에 두 녀석이 막아섰다. 어쩌지? 왼쪽 구석으로 가는 척하다 갑자기 몸을 틀어 두 좀비 사이로 냅다 뛰었다. “우어어어~.” 좀비들이 흐느적흐느적 다가온다. 한 녀석이 팔을 주욱 뻗어온다. 안 돼! 손끝이 어깨에 스치려는 찰라, 죽을힘을 다해 두 좀비 사이를 뚫고 나갔다. 저 멀리 철문이 보인다. 제한시간 60초가 지나 닫히기 전에 닿아야 한다.
허~억, 허~억. 살았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냄새가 올라온다. 아, 내가 이렇게 운동부족이었던가. 좀비에 먹히기 전에 뛰다가 죽겠다. 생존자들이 속속 모여든다. 다들 무릎을 짚고 구부정하게 서서 당장 죽을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쉰다. 스무살 갓 넘긴 젊은 친구들도 다를 바 없군. 묘한 동료의식이 피어올랐다. 허나 안심하긴 이르다. 다음 코스가 기다린다. 27일 해가 막 넘어가 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인 저녁 8시, 여기는 인천문학경기장 주경기장이다.
한 시간 전 이곳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좀비런’에 참가하려고 줄 선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 몰랐다. 좀비런은 좀비를 피해 정해진 임무를 완수하는 일종의 게임. 2013년 연세대 축제에서 경영학과 재학생 원준호씨의 기획으로 시작돼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원씨는 이후 ‘커무브’라는 청년 벤처기업을 세우고 판을 키웠다. 지난해 8월 경남 합천 고스트파크, 핼러윈데이 때는 서울랜드에서 좀비런 행사를 열었다. 4회째를 맞은 이번 좀비런 참가자는 무려 4000명. 저녁 7시30분부터 30분 간격으로 7팀이 순차적으로 출발한다.
지난 27일 인천 문학주경기장에서 열린 ‘좀비런‘ 행사. 사진 박미향 기자
지난 27일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열린 ‘좀비런’에 서정민 기자가 참가했다. 사진 박미향 기자
좀비런 티셔츠를 입고 첫 출발팀 사이에 몸을 섞었다. 허리춤에는 생명띠 3개를 매달았다. 다 잃으면 게임 속 나는 죽는다. 출발 전 오리엔테이션을 한다. 이곳 문학경기장 대피소도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좀비들로 아수라장이 된 대피소를 탈출해 구조대가 보내준 트럭에 올라타야 한다. “좀비는 혼자 있는 사람을 노립니다. 일행과 떨어지지 마세요.” 친구나 연인끼리 온 참가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한다. 나는 혼자다. 나만 노리면 어쩌지? 어쨌거나 출발이다.
빈 경기장 복도가 으스스하다. 얼굴에 웃음기가 점차 사라지고, 연인들은 손을 꼭 붙잡는다. 통제선을 따라 불 꺼진 화장실을 관통한다. 아무도 없다. 갑자기 어느 칸 위로 뭔가 불쑥 솟아오른다. “우어어~.” 좀비다. 혼비백산해 뛰쳐나가니 밖은 좀비판이다. 여기저기 좀비들이 어슬렁거린다. 뛰기 시작하는데, 어두운 그림자가 재빠르게 다가온다. 으악! 생명띠 하나를 뜯겼다. 군인들이 좀비를 향해 총을 쏘아주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 믿을 건 나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좀비가 안 보이나 싶더니 철문이 앞을 막는다. “이 철문이 열리면 죽도록 뛰어야 해. 60초 뒤 반대편 철문이 닫히면 끝이야.” 교도관이 철문을 열었다. 맨 앞에 선 나는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60초 뒤, 나는 살았다.
빈 경기장 복도가 으스스하다
통제선을 따라
불꺼진 화장실을 관통한다
아무도 없다
갑자기 어느 칸 위로
뭔가 불쑥 솟아오른다 “우어어~”
이제 눈먼 자들의 감옥이다. 폭압적인 수감생활 중 강제로 시력을 잃은 죄수들이 좀비가 되어 어슬렁거린다. “절대 소리를 내지 말라”는 교도관 지시대로 숨소리를 죽이고 1m 옆 좀비를 지나쳐 살금살금 걸었다. “꺄악~!” 누군가 비명을 지르자 좀비들이 떼로 달려든다. 까치발로 걷던 나는 속도를 내어 빠져나갔다.
지난 27일 인천 문학주경기장에서 열린 ‘좀비런‘ 행사. 사진 박미향 기자
다음 코스에선 4명씩 팀을 이뤄야 한다. 교도관이 각자에게 관중석 구역을 지정해준다. 각 구역으로 흩어져 단서를 찾은 뒤 모이란다. 내 구역으로 가니, 이런, 좀비가 있다. 좀비를 피해 의자 사이사이 살펴보다 종이를 발견했다. ‘바이올린’. 각기 모은 단서는 이랬다. 바이올린, 바이러스, 승리, 목소리. 영어로 바꾸면 모두 브이(V)가 들어간다. 글자가 어지럽게 적힌 문서를 브이자 형태로 읽으니 “희생자 한 명을 정하라”가 된다. 교도관이 “4명 중 희생자 하나를 정하라”고 했다. 다들 눈치만 본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기사를 쓰기 위해 눈 딱 감고 손을 들었다. 얼떨결에 영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희생자는 저 문으로 가고, 나머지는 이리로. 희생자는 살아 돌아올 수 있으면 또 봅시다.” 교도관의 말에 ‘괜히 지원했나’ 하는 후회가 살짝 들었다. 어두침침한 곳으로 접어드니 탁자가 있고, 그 위에 항아리가 놓여 있다. “손을 넣어 백신 바이러스를 찾으세요.” 끈적거리고 물컹한 물체로 가득한 항아리에 손을 넣고 휘저어 동그란 알약을 건져 올렸다. 오른손이 피로 물든 것처럼 시뻘게졌다. 문으로 나가니 일행이 반겨준다.
관중석 계단을 따라 경기장 꼭대기로 올라갔다. 구석에 누워 있던 누군가가 일어나 주절거린다. “저도 데려가주세요.” 얼굴과 팔에 상처가 있다. 좀비인가? 부상자인가? 애타는 청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요즘 큰 인기를 누리는 좀비 소재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를 보면,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나 또한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도 궁금하다. 그때 그를 도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해가 완전히 졌다. 컴컴해진 복도를 가는데, 기둥을 지날 때마다 뒤에 좀비가 숨어 있지나 않을까, 심박수가 높아졌다. 또 철문이다. “죽음의 통로”라고 교도관이 주의를 준다. 역시나 좀비들이 있다. 좀비를 피해 벽쪽으로 달렸다. 첨벙! 빗물이 고인 배수로에 발이 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리고 또 달렸다. 내 앞으로 한 여자가 넘어졌다. 순간 지나쳤다가 되돌아갔다. “괜찮으세요?” 영화를 보면 이럴 때 일으켜서 손 잡고 같이 달리던데….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다. 여자는 “괜찮다”며 일어나 일행에게 달려갔다. 나도 다가오는 좀비를 피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몇 차례 위기를 넘기고 출구처럼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이제 끝인가. 마음이 살짝 놓였다. 순간 옆에 참가자처럼 보였던 누군가가 다가와 생명띠를 낚아챘다. 이런! 이제 생명띠가 하나밖에 안 남았다. 좀더 버텨야 하는데. 저 앞에 진짜 출구가 보인다. 나가면 어디지?
좀비런에 참가하려고 줄선 사람들. 사진 박미향 기자
문을 통과하니 빛이 쏟아진다. 주경기장 안 구조 트럭 탑승 장소다. “펑~! 펑~!” 거짓말처럼 밤하늘에 불꽃이 터진다. 설마 나를 반겨주는 건가? 불꽃은 바로 옆 야구장에서 경기 뒤 쏜 것이었다. 구조대 여성대원이 하이파이브를 하자며 손을 내민다. 핏빛이 된 오른손을 내밀려다 말고 왼손 주먹을 내밀었다. 그도 왼손 주먹을 내밀어 부딪혀주었다. 그곳에는 음료, 칵테일, 음식 등을 파는 부스들이 있었다. 차량을 개조한 디제이 부스에선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부터 파티다.
“좀비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보던 차에 이런 게 있다고 해서 와봤어요. 생각보다 훨씬 더 실감나고 좋네요.”(김성혁·24) “좀비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친구들이 재밌는 이벤트에 가자고 해서 왔어요. 놀이공원 귀신의 집보다 더 스릴 넘치고 재밌는데요?”(허인혜·22)
좀비는 가까운 사람 누구에게나 전이될 수 있는 존재다. 두려우면서도 낯익고 친숙한, 어쩌면 그래서 더 두려운 존재다. 좀비런에 참가한 젊은이들은 그런 일상의 공포를 놀이처럼, 게임처럼 즐기는 듯했다. 다음 좀비런 행사는 8월22일 부산아시아드경기장에서 열린다.
인천/글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