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다흠.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매거진 esc]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노벨라 시리즈’ 만들고 ‘악스트’ 창간한 편집자 백다흠…“책을 기획해서 물성을 지닌 것으로 만들어내는 맛을 알아버렸어”
‘노벨라 시리즈’ 만들고 ‘악스트’ 창간한 편집자 백다흠…“책을 기획해서 물성을 지닌 것으로 만들어내는 맛을 알아버렸어”
안 쓸 것 같다
‘나 지금 충분히 행복해’라는
고백이 읽힌다.
그것이 그의 행복일지는 모르나
나의 행복은 아니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고 싶다 “문학동네 나올 때? 시원섭섭했지. 오래 있었고 인간관계나 직장 선후배 등 사람을 쌓았던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일만 놓고 볼 때는 홀가분했어. 문학동네에서는 뭘 벌일 수가 없었어.” 왜 문학동네를 그만뒀어? 나가라고 했어? 스스로 나온 거야? 라고 물어봤어야 했을까? 나는 더 묻지는 않았다. “이륙 준비 중인 비행기에 탑승하는 기분이었다고 하면 문학동네 선배들이 뭐라고 할까?” 뭐라고 하겠지. 음, 아니다, 부러워하는 마음이 더 클 거야. 노벨라 시리즈를 만들고, <악스트>(Axt)를 창간했으니까. 둘 다 편집장 백다흠. 백다흠이 들어간 은행나무 출판사는, 이렇게 적으면 그 출판사에서 안 좋아하겠지만, 소설가들이 에세이를 내는 출판사로 유명했다. 당연히 소설을 출간하고 싶었겠지? 그런데 작가들은 안 움직인다. 문학 전문 출판사가 따로 있다. 에세이는 예외로 치더라도, 소설과 시는 이 출판사에서 내야 한다. 당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전통 때문이라고 할까? 그건 무시할 수 없는 거니까. 또 다른 예외의 영광을 은행나무, 즉 노벨라 시리즈가 차지했다. 소설의 외연을 넓혔다고 적으면 과대한 평가인가? 요즘 유행하는 말이 ‘문단권력’이던데, 그게 약간이라도 물렁해지는 계기가 됐다고 적는 건? 시간은 분명히 증명해줄 것이다. <악스트>는 소설 리뷰 잡지다. 물론 단편소설도 실려 있고, 장편소설도 연재한다. 그러나 <악스트>의 절반을 차지하는 건 소설 리뷰다. 영화 리뷰, 미술 리뷰처럼, 소설 리뷰가 나오는 잡지가 생긴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이었어? 그런 잡지가 없어서 몰랐다. 그런데 팔릴까? 출간 한달 만에 초판 5000부가 모두 팔렸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이렇게 팔린 문학잡지는 없다. 2015년 상반기 최고 히트 상품을 꼽는다면 요리 선생님 백종원이나 <냉장고를 부탁해>, <삼시세끼> 같은 프로그램 등이 거론될 것 같다. 나는 이 목록에 조용히 <악스트>를 끼워 넣고 싶다. 더불어 상반기 문학계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문학인을 꼽아 상을 준다면 주저하지 않고 백다흠을 추천할 것이다.(표절 논쟁을 불러일으킨 소설가 이응준을 2등으로 밀어냈다!) “오브제나 이미지, 커머셜한 부분들이 뒤섞인 문학잡지가 한번쯤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미술 잡지나, 패션 잡지처럼. 그것들이 뒤섞여 있다고 해서 문학의 가치를 훼손하는 건 아니니까.” <악스트>는 시각적으로 돋보이는 잡지다. 이를테면 사진이 많다. 백다흠이 찍었다. 그는 사진도 찍는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작가 사진을 가장 많이 찍은 사진가일 것이다. 집에 소설책이 있다면 표지를 넘겨서, 그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확인해보자. ‘백다흠’이라고 적혀 있을 확률이 높다. “책을 만든다는 게 쉽지 않아. 각 권마다 고통의 양이 정해져 있어. 대체로 비슷한데, 그 고통의 양을 넘어선 책이 특히 기억에 남지. 그 순위를 따지면 악스트가 단연 1위야. 기획부터 편집위원 인선, 콘셉트, 디자인, 마케팅, 유통 등 지금까지 편집하면서 느꼈던 고통량의 한계를 다 맛봤어.” 그는 웃었다. 그는 모를 것이다. 그가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문단엔 문학잡지라는 것이 있다. 아주 문학적인 것들을 위한 잡지다. 나는 그 전통을 폄훼할 생각이 없다. 나 자신 누구보다 그 전통의 수혜자다. 하지만 문학잡지가 작가들이 제멋대로 쓰려는 마음을, 그 나쁜 마음을 위축시키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문학적인 것과 문학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할 근거가 있다. 예를 들면 발상의 근원, 형상화의 진위 등을 파헤쳐서 그것을 구분한다. 하지만 문학적인 것이 주류가 되는 문학계에서 문학적이지 않은 것은 역설적으로 문학적인 것이 된다. 문학은 상상력과 동의어이며, 상상력은 낯설고 새로울 때 빛나기 때문이다. <악스트>를 나는 문학적이지 않은 것들이 문학이 되는 지점을 포착한 잡지라고 믿는다. 백다흠은 이곳의 지휘자다. 잡지는 편집자가 만드는 것이니까. 이렇게 소설의 공연장 안에 살고 있으니, 그도 다시 소설이 쓰고 싶어지지 않을까? “책을 기획해서 물성을 지닌 것으로 만들어내는 맛을 알아버렸어. 제조업의 달콤함이지. 그런데 좋은 원고를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그건 아주 소중한 거라고 생각해. 굳이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서 언젠가 끄적거릴 수도 있겠지.” 안 쓸 거 같다. 그의 말에서 나 지금 충분히 행복해, 라는 고백이 읽힌다. 그것이 그의 행복일지는 모르나, 나의 행복은 아니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고 싶다. 그는 많은 소설을 경험했다. 썼고, 읽었으며, 편집했고, 만들었고, 확장했다. 그런 그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 궁금한 건 당연하잖아. 자극하려고 여기 적는다. “형이 써봐, 내가 <악스트>에 리뷰를 쓸 테니.” 7년 전, 내가 시인으로 등단한 해에 문학동네 송년회에서 백다흠을 처음 봤다. 그는 잘생겼고 키도 컸고 옷도 잘 입었다. 나 못지않았으니까 굉장했다고 봐야지. 하지만 풋풋해 보였다. 그가 지금의 백다흠이 될 거라는 예측 할 수 없었다. 그의 미래에 대한 기대 역시 그런 것이다.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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