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건프라의 세계
어릴 적 ‘조립식’깨나 만져본 뒤 30년간 손 놓은 서정민 기자 건프라 조립 도전하다
어릴 적 ‘조립식’깨나 만져본 뒤 30년간 손 놓은 서정민 기자 건프라 조립 도전하다
어릴 적 ‘조립식’깨나 만들었다. 지금은 ‘프라모델’이라 부르는 플라스틱 모형은 500원짜리 로봇부터 몇천원 하는 비행기, 탱크까지 다양했다. 동네 문방구에 가서 뭐가 새로 나왔나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다. 중학생이 되면서 조립식과 이별했다. 애들이나 만드는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생각을 바꾼 건 지난 2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한 ‘건프라 엑스포 2015’에 가서였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건프라(건담 플라스틱 모형)는 애들 장난감이 아니었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판매 코너에 갔다. 건프라 사이에 곰돌이 로봇이 은근슬쩍 껴 있었다. ‘웬 곰돌이?’ 알고 보니 곰돌이도 엄연한 건프라였다. 아이들이 건프라를 만들어 배틀을 벌인다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건담 빌드 파이터즈>에서 한 아이가 ‘앗가이’라는 건프라를 곰돌이 모양으로 개조해 ‘베앗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것저것 구경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에는 엑스포 한정판으로 나온 ‘트라이 버닝 건담’과 베앗가이 새끼곰 버전의 ‘프티가이’가 들려 있었다.
집에 돌아와 프티가이를 조립했다. 부품들이 붙어 있는 틀인 ‘러너’가 4개밖에 안 됐다. 건프라 등급 가운데 조립하기 쉽고 보편적인 에이치지(HG)였다. 뚝딱뚝딱 10여분 만에 조립을 마쳤다. 부품들이 접착제 없이 딱딱 잘 들어맞았다. 귀여운 곰돌이를 보며 “왕년의 솜씨가 어디 안 갔군” 하고 혼잣말을 했다. 완성품을 7살 딸에게 주니 무척 좋아했다.
그제야 내게도 오래된 건프라가 박스째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건프라 마니아인 친구가 5년 전 필리핀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에 선물로 준 것이었다. 책장 속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건프라 상자를 꺼냈다. 숙련자들이 만든다는 ‘구프 커스텀’ 엠지(MG) 등급이었다. 도전정신이 생겨났다. “만들어보자.”
접착제 없이 딱딱 들어맞는다
5시간반 동안 만들고 나니 울컥
완성품 사진 페이스북에 올리니
“이젠 도색의 세계로 오셔야지”
건프라의 세계는 끝이 없구나 휴일인 지난 23일 상자를 열었다. 러너가 4개였던 프티가이와 달리 러너가 16개나 됐다. 조립설명서가 거의 소책자 수준이었다. 플라스틱 전용 니퍼, 줄, 드라이버, 핀셋 등을 묶은 건프라 공구세트를 꺼냈다. 이것 또한 건프라 엑스포에서 사온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러너를 위에 적힌 알파벳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그래야 설명서를 보며 해당 부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설명서는 일본어로 돼 있었지만, 그림만 봐도 충분했다. 설명서대로 부품을 러너에서 떼어내 조립하기 시작했다. 니퍼로 자르고 때에 따라선 줄로 매끈하게 갈았다. 프티가이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한 부품들인데도 접착제 없이 딱딱 들어맞는 게 신기했다. 어릴 때 만들던 조립식은 아귀가 잘 안 맞아 이빨로 깨물어 끼워맞추곤 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만 나사를 조일 땐 좀 뻑뻑해서 힘깨나 썼다. 먼저 팔 한짝을 완성했다. 겉보기엔 그냥 팔이어도 안에 정교한 기계 모양 부품이 들어가 있다. 자동차 덮개를 열면 엔진과 복잡한 기계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립한 자만이 그 사실을 안다. 마치 내가 정밀한 기계를 만드는 엔지니어가 된 기분이다. 관절 부위에는 고무가 섞인 플라스틱 재질 부품이 쓰인다. 관절을 헐겁지 않게 연결하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두 팔을 만드는 데만 1시간30분이 걸렸다. 다리를 만들 땐 좀더 속도가 붙었다. 두 다리를 만들고 나니 1시간이 더 흘렀다. 이제는 몸통이다. 머리와 몸통에 매달린 관을 조립하는데, 가느다란 줄기에 모양이 각기 다른 작은 원통을 순서대로 수십개씩 끼워야 했다. 구슬꿰기보다 더 어려웠다. 몸통 안 조종석에 손톱만한 조종사를 앉혔다. 몸통을 다 만드니 2시간이 더 지났다. 몸통에 두 팔과 두 다리를 끼우는 순간,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거대 로봇이 완성되는 순간을 바라보는 박사의 심정이랄까. 아직 끝이 아니다. 무기가 남았다. 칼, 방패, 채찍, 기관총 등을 만들고 나니 다시 1시간이 훌쩍 지났다. 다 조립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5시간30분. 손가락이 얼얼하고, 바닥에 앉아 만든 탓에 무릎과 허리가 쑤셔왔다. 그래도 무기까지 장착한 구프 커스텀의 우아한 자태는 피로감을 단숨에 날려보냈다. 이런 멋진 건프라를 선물해준 친구가 새삼 고마웠다. 엑스포 한정판 건프라를 그에게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완성품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니 숨어 있던 건프라 마니아들이 속속 나타나 댓글을 단다. “스티커를 붙이고 무광 스프레이를 뿌려보세요.” “먹선을 그리면 더 근사해져요.” “이젠 도색의 세계로 오셔야지.” 아, 건프라의 세계는 끝이 없구나. 그래도 기꺼이 빠져들어볼까?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귀여운 곰돌이 건프라 ‘프티가이’. 사진 서정민 기자
구프 커스텀 엠지 조립 전 부품들. 사진 서정민 기자
완성한 ‘구프 커스텀’ 엠지(MG). 사진 서정민 기자
5시간반 동안 만들고 나니 울컥
완성품 사진 페이스북에 올리니
“이젠 도색의 세계로 오셔야지”
건프라의 세계는 끝이 없구나 휴일인 지난 23일 상자를 열었다. 러너가 4개였던 프티가이와 달리 러너가 16개나 됐다. 조립설명서가 거의 소책자 수준이었다. 플라스틱 전용 니퍼, 줄, 드라이버, 핀셋 등을 묶은 건프라 공구세트를 꺼냈다. 이것 또한 건프라 엑스포에서 사온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러너를 위에 적힌 알파벳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그래야 설명서를 보며 해당 부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설명서는 일본어로 돼 있었지만, 그림만 봐도 충분했다. 설명서대로 부품을 러너에서 떼어내 조립하기 시작했다. 니퍼로 자르고 때에 따라선 줄로 매끈하게 갈았다. 프티가이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한 부품들인데도 접착제 없이 딱딱 들어맞는 게 신기했다. 어릴 때 만들던 조립식은 아귀가 잘 안 맞아 이빨로 깨물어 끼워맞추곤 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만 나사를 조일 땐 좀 뻑뻑해서 힘깨나 썼다. 먼저 팔 한짝을 완성했다. 겉보기엔 그냥 팔이어도 안에 정교한 기계 모양 부품이 들어가 있다. 자동차 덮개를 열면 엔진과 복잡한 기계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립한 자만이 그 사실을 안다. 마치 내가 정밀한 기계를 만드는 엔지니어가 된 기분이다. 관절 부위에는 고무가 섞인 플라스틱 재질 부품이 쓰인다. 관절을 헐겁지 않게 연결하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두 팔을 만드는 데만 1시간30분이 걸렸다. 다리를 만들 땐 좀더 속도가 붙었다. 두 다리를 만들고 나니 1시간이 더 흘렀다. 이제는 몸통이다. 머리와 몸통에 매달린 관을 조립하는데, 가느다란 줄기에 모양이 각기 다른 작은 원통을 순서대로 수십개씩 끼워야 했다. 구슬꿰기보다 더 어려웠다. 몸통 안 조종석에 손톱만한 조종사를 앉혔다. 몸통을 다 만드니 2시간이 더 지났다. 몸통에 두 팔과 두 다리를 끼우는 순간,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거대 로봇이 완성되는 순간을 바라보는 박사의 심정이랄까. 아직 끝이 아니다. 무기가 남았다. 칼, 방패, 채찍, 기관총 등을 만들고 나니 다시 1시간이 훌쩍 지났다. 다 조립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5시간30분. 손가락이 얼얼하고, 바닥에 앉아 만든 탓에 무릎과 허리가 쑤셔왔다. 그래도 무기까지 장착한 구프 커스텀의 우아한 자태는 피로감을 단숨에 날려보냈다. 이런 멋진 건프라를 선물해준 친구가 새삼 고마웠다. 엑스포 한정판 건프라를 그에게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완성품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니 숨어 있던 건프라 마니아들이 속속 나타나 댓글을 단다. “스티커를 붙이고 무광 스프레이를 뿌려보세요.” “먹선을 그리면 더 근사해져요.” “이젠 도색의 세계로 오셔야지.” 아, 건프라의 세계는 끝이 없구나. 그래도 기꺼이 빠져들어볼까?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