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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주무르면 거기 시간이 스며들죠

등록 2015-09-02 20:34수정 2015-09-03 15:23

이혜미. 사진 박미향 기자 <A href="mailto:mh@hani.co.kr">mh@hani.co.kr</A>
이혜미.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매거진 esc]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직장생활 하며 1년에 2~3번 전시회 여는 젊은 도예가 이혜미씨…“빚는 것도 선 긋기도 우연”
“시간이 축적되는 느낌이 들어요.” 이혜미가 말했다. “시간이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찻잔 하나를 만드는 데 시간이 축적된다니. “손가락으로 흙을 주무르고 다듬을 때 정말 그런 느낌이 들어요. 시간이 스미는.”

그녀와 나는 계동 정독도서관 옆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였다. 밖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카페 안은 한가했다. 창가에 하얀 찻잔과 받침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잔과 받침을 들어 그녀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건 공장에서 기계로 만든 거죠?” 그녀가 대답했다. “네.” 나도 알았다. 그 잔과 받침은 안 예뻤다. 그리고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혜미를 처음 만났을 때 지인은 ‘도예가’라고 소개했다. 도예가? 아, 참, 고전적인 호칭이네, 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솜씨 좋은 도예가가 빚어놓은 것 같았다.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릴 때 잠깐 얼굴 전체가 보였는데 균형이 잡혀 있었고, 선도 간결했다. 예쁘다, 안 예쁘다, 이런 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형태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쩌면 분위기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아주 조금.

이혜미의 작품을 찾아봤다. 묘한 숨결이 느껴졌고, 아름다웠다. 예쁘다는 느낌과는 다르다. 예쁘다는 건 평면적인 수사다. 그녀의 작품은 뭔가 더 깊다. 그러나 무겁지 않고 어렵지도 않다. 예술 작품의 영역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실용 도자기 제품을 전혀 안 봤던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광주요나 정소영 식기장의 제품들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중 몇 개는 구입도 했다. 그런데 이혜미의 작품을 보았을 때의 떨림은 생소했다. 그 묘한 숨결 때문이었을까?

세상에 단 하나뿐이면서
실생활에 쓰이는 작품 만들고파
실제 사용할 수 있어야
두고 볼 때 더 아름다운 것
“도자기 의자·탁자도 해볼래요”

내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건 잔 받침? 작은 접시? 아마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되는 제품이었다. 둥근 테두리에서 대략 0.5㎜ 정도 안쪽에 금색으로 선을 그었다. 그게 마치 동그란 우주를 그릇 안에 넣어둔 것같이 보였다. 그녀는 말했다. “저는 금색을 좋아해요.” 그녀는 붓으로 직접 금색 선을 긋는다고 했다. “삐뚤삐뚤하죠. 옆으로 흘러내릴 때도 있어요. 저는 그 느낌 그대로 좋다고 생각해요. 똑같은 걸 다시 만들 수가 없어요. 하나뿐이죠. 손으로 빚는 것도 선을 긋는 것도 모두 우연적인 거니까.” 내가 느낀 숨결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 것 같았다. 시간이 축적된다는 말도 이해할 것 같았다. “금색은 가마를 세 번 때야 완성할 수 있어요. 보통 초벌, 재벌 이렇게 구워요. 금색을 입히려면 한 번 더 구워야 해요. 재벌할 때 1250도까지 열이 올라가는데, 금색 안료는 780도에서 녹거든요. 온도가 더 올라가면 완전히 사라져버려요.”

시라고 생각했다. 시적인 게 아니라 시. 은유 이면의 세계를 가진 것, 그 세계의 형체가 어렴풋이 낯설 때, 그것은 마땅히 시다. 특히 그녀가 만든 또 다른 잔 받침? 작은 접시? 중엔 하늘을 옮겨 둔 것이 있다. 파란색 안료로 칠했다. 나는 하늘의 형태를 본 적이 없지만, 하늘이 모양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 그녀가 그린 형태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였다.

그녀는 주로 접시, 그릇, 컵 등을 만든다. ‘세라믹 벨’(도자 종)도 만들었다.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했고, 졸업 후에 도예가 그룹 바다디자인아틀리에에 들어갔다. 이 그룹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작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현재 그녀는 한 도자기 회사의 디자인실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을 내서 자신의 작품을 만든다. 그 모든 작품엔 그녀의 손가락이 쌓은 시간이 담겨 있다. 그걸 보고 만지는 건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다.

“세라믹(도자)은 한 번 성형을 해 놓으면 고칠 수가 없어요. 물감을 덧칠해서 색을 지우거나, 조립해 놓은 걸 해체해서 다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본드로 붙였다가 뗄 수도 없고요.” 그녀는 웃으며,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아한 분위기였다.

“대량 생산하는 도자기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게, 제가 작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작품 역시 실용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용할 수 있어야, 두고 볼 때도 더 아름다운 거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사진을 보여주었다. “세라믹 샷 잔이에요. 이름은 좀 별로지만. 위스키 한 잔, 샴페인 한 잔, 소주 한 잔 정도의 양을 감안하고 만든 거예요. 사용하면서 아름다움을 즐겨야 의미가 있다고 믿어서 만든 거예요. 생활 속의 작은 아름다움 말이에요.”

그녀는 도자기의 아름다움이 박물관 유리벽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녀는 1985년생이다. 젊은 도예가다. 그녀는 ‘도예가’라는 단어가 왜 고전적으로 느껴지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kiln#goldrim#bowl#ceramic#ceramics#atelier gold로 변신직전✨#옹기종기 귀엽🙈🙈

@heami_님이 게시한 사진님,

“오브제의 특성을 지닌 그릇, 이것이 제가 원하는 거예요.” 오브제라는 말이 어렵다면, 작품이라고 바꿔 적어도 될 것 같다. “그릇이든, 잔 받침이든, 접시든 이런 것들이 지닌 원래의 목적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아까 말한 세라믹 샷 잔에 꽃을 담아둘 수도 있어요.” 그녀는 다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을 보여주었다. 잔에 꽃을 담아둔 사진이었다. 나는 그 잔 역시 꽃 같았다고, 본 그대로 적고 싶지만, 보지 않은 사람들이 왠지 호들갑 떠는 것처럼 느낄까봐, 두 번 정도 망설이고 적었다. 그녀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heami_’다. 보여주고 싶다.

이혜미의 작품은 (신사동 가로수길 챕터원, 이화여대 박물관 아트숍 등) 몇몇 편집 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다. 그녀는 한 해 2~3번 전시를 연다. 10월엔 논현동에 있는 윤현상재 갤러리에서 그룹전을 열 예정이다.

“그리고 훗날 기회가 된다면 테이블과 의자 같은 가구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물론 세라믹 제품으로요.” 그건 실용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것은 세라믹의 영역 자체도 아니다. 예술적 본능, 의지, 이런 것이겠지. 나는 그 욕망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데 창밖에 저기, 강아지 앉아 있는 거 아세요? 소리도 내지 않고, 한 시간 동안 저기 앉아 있었어요. 움직이지도 않고.” 밖을 내려다보니 정말 그랬다. 자고 있었을까? 아픈가? 눈은 건강해 보였다. 털 위로 햇살이 미끄러졌다. 생명을 지닌, 움직임을 내재한, 도자기 작품 같았다.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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