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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인 듯 진짜 아닌 진짜 같은 너

등록 2015-11-25 20:49수정 2015-11-26 12:12

디자인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A href="mailto:mh@hani.co.kr">mh@hani.co.kr</A>
디자인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매거진 esc]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가상현실의 세계
우리 곁에 진짜 부쩍 다가온 가상현실(VR)의 세계 가상 체험기
페이스북, 구글, 삼성 등 글로벌 아이티(IT) 기업들이 잇따라 가상현실(Virtual Reality·VR) 관련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고 시장 선점을 위한 혈투에 돌입했다. 브이아르란 인간의 오감에 직접 작용해 현실이 아닌데도 현실 또는 현실 이상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기술이다. 아직은 시각적 체험 정도의 걸음마 단계이지만, 앞으로 청각, 촉각 등 오감을 재현시켜주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현실감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브이아르는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당장 유튜브 앱에서 ‘360 VR’란 검색어를 치면 여러 브이아르 영상들이 주르르 뜬다. 국내 걸그룹 밤비노는 ‘오빠오빠’ 뮤직비디오를 브이아르 영상으로 찍었다.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보면, 실제 춤을 추는 4명의 멤버 사이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시각적 구현은 거의 완성 단계라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VR 영상은 스마트폰 유튜브 앱이나 PC 구글 크롬 브라우저로 보세요.

산업적인 성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수준으로 평가된다. 지난 8월 한국인터넷진흥원이 낸 월간 보고서 <이슈와 트렌드>에 따르면, 영국 투자업체 ‘디지캐피털’은 가상현실 시장 규모가 2016년 2억달러에서 2020년 1500억달러로 750배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기업들한텐 미래의 먹거리나 다름없다. 최근 모바일에서 브이아르 영상 지원 서비스를 시작한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지난 13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북한에서 촬영한 브이아르 영상을 올리면서 “브이아르 영상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다. 기술 발달로 인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브이아르 영상을 공유할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적인 아이티 기업 최고경영자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마트폰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켰듯, 브이아르 또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 변화된 삶이 어떤 모습일지 살짝 들여다봤다. 다음은 가상으로 재구성한 글이지만, 언급된 기술들은 이미 개발됐거나 개발이 머지않은 것들이다.

머리에 쓴 HMD 버튼만으로
고시원이 펜트하우스로 변신
로그인만 하면 사무실 출근 모드
이성친구 데이트에 골프까지 체험
‘집에서 안 나간 지 며칠째더라?’

아침 6시. 커다란 금강앵무가 머리를 쪼았다. “일어나, 일어나.”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HMD·브이아르 영상을 시청하는 고글형 디스플레이)가 진동했다. 자기 전에 아침 알람을 앵무새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부리로 쪼는 강도가 너무 셌다. 내일부터는 강아지가 부드럽게 핥아주는 모드로 바꿔야겠다. 일어나 커튼을 열자 한강이 펼쳐졌다. 실제가 아니다. 실제 커튼 밖으론 건너편 건물 창문만이 보일 뿐이다.

대충 씻고 다시 에이치엠디를 뒤집어썼다. 좁아터진 고시원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로 변한다. 책상에 앉아 태블릿피시를 켰다. 몇년 전부터 회사는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브이아르 기술은 사무실과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줬다. 업무 지시와 수행이 모두 가상현실 공간 안에서 이뤄진다.

로그인을 하니 눈앞이 순식간에 사무실로 바뀐다. 옆을 보니 김 대리가 먼저 출근해 앉아 있다. “좋은 아침이야.” “말도 마. 어제 너무 달렸어.” “누구라도 만난 거야?” “어제 새로 여자친구 만들기 게임을 샀거든. 설정하기 귀찮아서 자동 매칭 시스템을 이용해 여자친구를 생성했는데, 세상에나, 완전 내 이상형인 거야. 밤새 놀았지 뭐. 하하.”

브이아르 기술이 발달한 뒤로 사람들은 실제 인간과의 교제에 흥미를 잃었다. 서로를 탐색하고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연애의 과정들은 불필요한 소모적 행동이 됐다. 이성 친구를 만들어주는 게임은 누구라도 몇번의 버튼 조작만으로 이상형을 만나게 해주었다. 이 게임이 나온 게 10년 전쯤인데, 상당수 남자들은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섹스 모드로 돌입했다. 진화된 포르노였던 셈이다.

국가에선 불법으로 규제했지만, 성인용품과 동기화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기도 했다. 가뜩이나 정체된 출산율과 혼인율이 뚝 떨어진 것이다. 이혼율은 급증했다. 정부는 올해 초 이성친구 만들기 게임에서 연애 과정 없이 바로 섹스 모드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다. 허가되지 않은 성인용품과의 동기화 단속도 강화했다. 일부 보수 성향 국회의원들은 이성친구 만들기 게임의 전면 금지를 주장했으나, 게임업체 로비와 여론에 밀려 결국 이 정도에서 여야 합의가 이뤄졌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남자들이 아니다. 바로 섹스 모드로 돌입할 수 있는 온갖 치트키(게임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편법)가 인터넷상에서 돌아다녔다. 게임 형식을 갖추지 않고 바로 사이버 섹스만 즐길 수 있는 외국 프로그램들도 불법 공유됐다. 과거 ‘몰카’ 유통의 소굴이었던 ‘소라넷’은 이런 프로그램 공유의 중심이 됐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데이트 폭력, 몰카, 스토킹, 가정폭력 등에 시달린 여성들은 실제 남자들과의 데이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각종 여성 정보 사이트에는 게임 속 남자에 대한 후기가 넘쳐났다. 게임 속 남자를 칭송하는 ‘갓겜남’이란 용어도 생겨났다.

“안 되겠다. 너무 피곤해. 이만 조퇴해야겠어.” 김 대리가 로그아웃을 하자,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마 그는 오늘도 가상의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게 분명하다.

가상현실 속에서의 업무는 훨씬 능률적이다. 회의를 위해 출장을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떤 거래처 사람이든 당장 눈앞에 소환할 수 있다. 다만, 다들 에이치엠디를 쓰고 있어 눈을 볼 수 없다는 게 흠이다. 그래선지 언젠가부터 전자명함에 얼굴 사진을 넣는 게 일상화됐다. 그러지 않으면 실제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퇴근 시간이 되자 의자에서 한둘씩 사라졌다. 로그아웃 순간 바로 퇴근이다.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을 힘들게 했던 교통지옥도 이제 과거 일이 됐다.

잠시 에이치엠디를 벗었다. 깔끔한 펜트하우스는 사리지고 누렇게 바랜 벽지와 곰팡이 슨 천장이 보인다. ‘아차, 오늘 중요한 골프 약속이 있었지.’ 거래처 직원과의 접대 골프다. 예전엔 주말 새벽에 일어나 직접 골프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가상현실은 어디서든 골프장을 펼쳐주었다. 근육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 몇개만 팔다리에 부착하고 허공에 채를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채도 실제가 아니라 그립감만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전자 막대기다. 설정을 통해 브랜드별로 각각 다른 느낌을 구현할 수 있다. 실제 골프를 쳐본 선배들 말로는 90%까지 실제 느낌과 비슷하단다. 새벽 골프를 좋아하는 거래처 사람을 위해 골프장 세팅을 가을 새벽으로 맞춰놓았다. 안개도 살짝 끼게 했다. 실제 바닥을 걷는 느낌을 내기 위해 러닝머신과 연동시킨 제품도 있지만, 너무 비싸서 구매하진 못했다. 실제처럼 18홀을 4~5시간에 걸쳐 도는 설정도 있지만, 저녁 시간인 관계로 속성 게임을 했다. 어차피 접대인데….

이것도 운동이라고 피곤이 몰려왔다. 집을 하와이 해변으로 바꿨다. 에이치엠디와 연동된 에어컨이 온도와 습도를 자동으로 맞춰준다. 조용히 쉬고 싶어 설정을 ‘한적함’으로 맞췄다. 눈앞에 살랑이는 파도를 보니 금세 피곤이 풀렸다. ‘영화나 한편 볼까.’ 버튼 한번으로 내 주변은 영화관으로 바뀐다. 그래도 영화는 여럿이 보는 게 좋으니, 관객이 꽉 차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영화는 역시 아이맥스지.’ 추가로 돈을 결제하고 상영관을 아이맥스로 바꿨다. 실제 보는 아이맥스보다 더 꽉 찬 시야감을 제공한다. 영화를 보는데 옆에서 팝콘 먹는 소리, 웃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 등이 들린다. ‘관객 음 소거’ 버튼을 눌러 소리를 죽였다.

영화 한편 보고 나니 벌써 밤 12시다. 내일 출근을 위해 자야 한다. 오늘은 별을 보며 자고 싶다. 눈앞에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이 펼쳐진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서 직접 찍어 온 밤하늘이다. 운치 있게 귀뚜라미 소리도 추가했다. 눈이 슬슬 감긴다. ‘아, 알람은 개가 핥아주는 모드로.’ 개의 종류를 설정하라고 하기에 귀찮아서 ‘랜덤’을 눌렀다.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가만, 내가 집 밖으로 안 나간 게 며칠째더라?’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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