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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크를 탔다, 안 보이던 그들이 보인다

등록 2015-12-23 20:18수정 2016-01-07 13:56

신호대기 중인 퀵서비스 기사. 바이크를 타니 길 위에 함께 있었으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신호대기 중인 퀵서비스 기사. 바이크를 타니 길 위에 함께 있었으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매거진 esc] 그럼에도 바이크
바이크를 타고 달린다. 거리에 사람들과 자동차, 버스, 택시가 한가득이다. 거기에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이들이 보인다. 바이크를 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바이크를 타기 전에도 분명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지만, 이제야 그들의 표정이, 움직임이 보인다. 택배를 실어나르는 라이더, 치킨이나 패스트푸드를 배달하는 라이더, 학교나 직장에 출근하는 것으로 보이는 라이더들이 길 위에 있다.

바이크를 타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길 위인 것처럼 느껴진다. 맨날 다니던 회사 앞 5거리 교차로는, 걸어 지날 때나 자동차를 타고 지날 때면 그저 내가 가려는 방향의 신호는 짧고 차가 막히기만 하는 길이었다. 바이크를 탄 지금의 나에겐 라이더들의 집합 장소 같은 느낌이다. 신호대기를 하려 늘어선 차 앞으로 나가면 거기엔 앞서 말한 다종다양한 라이더들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안면이 있는지 인사나 짧은 수다를 나누기도 한다. 모르는 사이여도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면 목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바이크를 타면 당연히 자동차를 탔을 때보다 훨씬 춥다. 아니 ‘훨씬’이라는 부사도 부족하다. ‘어마어마하게 춥다’ 정도의 표현이라면 족할까? 평소의 추위에는 별 존재감 없던, 그래서 크게 신경쓰지 않던 신체 부위들이 아우성이다. 요즘 같은 날씨에는 바이크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손과 발끝이 시려온다. 그 상태에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시렵다는 감각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뭔가 뭉뚝하고 무딘 느낌의 신체 일부가 있을 뿐이다. 엉덩이는 바이트 시트에 딱 붙이고 있으면 덜 시렵지만, 잠시 신호대기에 걸려서 한쪽 다리를 내리다 살짝 들썩이면 한기에 얇은 얼음막이 형성되는 느낌이다. 지방층이 가장 두꺼운 신체 부위 중 하나이지만, 영하 저 밑의 기온과 칼바람에는 무소용이다. 아무리 겹쳐 입어도(윗옷을 자그마치 여섯 겹으로 껴입은 적도 있다) 한겨울의 추위란 결코 녹록지 않다.

그런 추위가 느껴지다가도 바이크를 타는 다른 사람들이 시선에 들어올 때면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그 추위를 잊는다.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삶은 어떤 삶일지를 신호대기 중 상상하게 된다. 핸들 근처에 내비게이션을 큼지막하게 단 택배기사로 보이는 라이더는 하루에 몇 군데나 배달을 가야 할까?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신호가 바뀌자마자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중국집 배달원 소년은 정말 춥지 않은 걸까? 이 추위는 어쩌면 삶이 너무 고단한 그에게 큰 상관이 없는 걸까? 백팩에 노트북과 책을 가득 싣고 학교나 학원으로 향하는 듯한 저 학생은 이번 겨울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한겨울 추위보다 더욱 매서운 취업 시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까?

이렇게 보이지 않던 이들이 보이니, 생각하지 않던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 또 상상에 빠져 있던 나에게 한 라이더가 말을 건넸다. “이거 어디서 나온 바이크요? 오호, 멋진데?”라고 칭찬을 건넨다. 나는 그의 칭찬에 “감사합니다. 타고 계신 스쿠터도 정말 멋진데요?”라고 웃으며 답한다. 마치 친구를 잠시 만난 느낌이다. 순간 그 차가운 길 위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바이크를 타니 보이지 않던 라이더들이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송곳 같은 추위가 점점 시야에 들어오고 느껴진다. 내가 아는 세상을 원으로 비유한다면, 그 반지름이 조금씩 느는 느낌이다. ‘길 위’라는 세상의 끝에서 바이크 타는 라이더가 돼보고 나니, 이제야 그들이 보이고 느껴진다. 모든 것을 경험해볼 수는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경험이라면 그 도전을 마다하고 싶지는 않다. 조금 더 넓어진 시야로 세상을, 길 위를 새롭게 바라본다. 신호대기 중, 다른 라이더들과 나란히 선다. 매섭게 칼바람 부는 도심 도로 위에서 이유 모를 온기가 전해지는 느낌이다. 따뜻한 자동차 안에서는 분명히 느끼지 못할 온기다.

바이크에 빠진 M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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