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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부르는 노래, 막 그리는 그림

등록 2016-01-20 20:12수정 2016-01-21 16:25

 사진 김린용 작가 제공
사진 김린용 작가 제공
[매거진 esc]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뇌가 아니라 몸으로 동시대에 반응하는 음악가이자 미술가 백현진
백현진의 어떤 곡을 즐겨들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그 노래가 플레이리스트 안에 들어 있었다. 라이브 곡이었는지, 녹음실에서 녹음한 곡인지 모르겠다. 백현진은 그렇게 부른다. 어떻게 부르냐고? 막.

막, 이라고 하면 안 좋은 거 같은데, 딱히 그렇지는 않다. ‘막’은 내가 생각하기에, 몸의 이끌림을 온전히 표현하는 방식이다. 보통은 막 못 한다. 이 사회가 우리를 학습시켰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막 하는 것은 안 좋은 거야. 왜냐하면 질서가 무너지거든.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지. 이딴 못생긴 논리가 우리 시대의 윤리다.

아까 말한 어떤 곡을 백현진은 쇳소리를 내며 불렀다. 침 뱉는 소리도 들린다. 정말 침을 뱉은 걸까? 모르겠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저래도 괜찮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는 울듯이 부른다. 울음이 그의 내부에 쌓여 있다. 그는 그것을 꺼낸다. 막.

“저는 질서라는 것을 사람들을 끌고 가기 위한 소망, 신호, 권력 따위 같은 것이라고 봐요. 자연에 질서가 어딨어요. 보통은 되게 랜덤하죠.” 서울 연남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그림으로 꽉 차 있었다. 랜덤했다. 그와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 앉아 있었고, 죽은 화분이 하나 있었다. 내가 화분의 마른 잎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가 놀라며 말했다.

“큰일이네. 정말 죽은 걸까요? 아버지가 키우시던 걸 받아왔는데. 유산 같은 건데.” 그러면서 가위로 마른 가지의 중간을 잘랐다. “살아 있나? 여기 속은 약간 녹색이죠? 그러네? 살아 있네. 봄이 되면 다시 잎이 돋아날 수도 있겠어요.” 말하며 안도하는 듯하더니 이내 시무룩해졌다. “제 손에 묻어 있던 녹색 물감이 잘린 가지의 단면에 닿아서 녹색으로 보였나봐요.”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저러다가도 봄이 되면 극적으로 살아나기도 하더라고요. 작은 잎이 흙 위로 올라오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도 나도 알았다. 그럴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질서 의식하지 않고 노래하고
질서 의식하지 않고 그린다
“발전·수정·개선은 내 사전에 없어
대신 변화·변경은 믿어요”

백현진은 뮤지션이다. 음악감독 장영규와 함께 만든 어어부 프로젝트는 한국 대중음악 신에 상처를 남겼다. 1집 <손익분기점>은 1997년 3월에 세상에 나왔다. 나는 한국에서 음악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앨범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앨범은 주류 대중음악의 품격을 순식간에 떨어뜨렸다. 어어부 프로젝트는 난입한 강도처럼 칼을 휘둘렀다. 그 폭력의 미학이 나에겐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와 비등한 것으로 느껴진다. 마구 휘두른 칼은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자기 자신에게도. 백현진의 목소리는 칼에 찔린 짐승이 가까스로 끌어올린 음성같이 들린다. 그래서 이 앨범이 궁극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것은 치유와 회복이다. 백현진을 천재라고 평가한 사람이 꽤 많다. 그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사람도 있다. 나는 그가 천재라기보다는 온몸으로 온몸을 끌며 나아가는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보통은 둥둥 떠 있다.

백현진은 그림을 그리는 회화 작가이기도 하다. ‘이기도 하다’라고 적는 것은 무례하다. 그는 좋은 미술가다. 나는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깥의 먼 곳을 바라보는 미술가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는 당연히 자기 안의 세계에 집중한다. 울음이 담긴 자신의 내부를.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몇몇 힘있는 전시기획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뮤지션으로는 저를 좋아하니까, 제 전시에 와서 ‘현진씨 음악은 좋은데…, 사실 제가 회화는 어떻게 보는 건지 몰라요’라고 말한 적도 있었어요. 환장할 노릇이죠.” 힘있는 전시기획자니까 회화에 대해 물론 잘 알 거다. 그러니까 그 힘있는 기획자라는 사람이 어떤 의도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힘있는 기획자니까…. 나는 힘이 없어서 반박할 수가 없다.

그저 질서에 대해 생각한다. 질서를 의식하지 않는 그림, 질서를 의식하지 않는 음악. “발전, 수정, 개선이라는 낱말들이 제 사전에는 없어요. 없어진 지 오래돼요. 대신 변화, 변경은 믿어요.” 그는 더 잘 그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붓을 들고 앉는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실시간으로 계속 반응하는 거예요. 반응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설명을 드리면, 여기 이 그림 같은 경우 아랫부분을 파란색으로 칠했잖아요. 그다음에 무슨 색깔을 칠할지 저 진짜 몰라요. 아무 색깔이나 먼저 붓으로 찍어놓는 경우가 50~60퍼센트 넘어요. 또 어떨 때는 이 색을 칠했다가 저 색을 칠했다가, 놔두고 다른 부분을 칠했다가,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힘있는 분들은 고민해야 한다. 그 반응을 단순히 무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면 많은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백현진은 온전히 열린 창이다. 그 창으로 동시대가 오간다. 백현진은 뇌가 아니라 몸으로 시대에 반응한다. 백현진의 그림, 백현진의 음악을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한 질서 없는 예술가가 동시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나는 백현진이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음악은 좋은데…, 사실 제가 회화는 어떻게 보는 건지 몰라요”라고 말할 정도의 예술가는 아니라고 믿는다. 또한 그 힘있는 자가 백현진의 음악을 좋아한다면, 동일한 이유로 백현진의 회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음악과 미술이라는 매체로 표현됐을 뿐, 그것들은 온전히 백현진이라는 열린 창이기 때문이다.

“메시지도 담지 않고 멍하니 붓질을 하고, 실없는 사람처럼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현대 미술가인데, 음악가인데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들 얘기하는 분이 있을 수는 있어요. 저도 친절하게 다시 얘기해볼 수는 있는데, 그 얘기를 차근차근 하기에는 지금 제 볼일이 바빠서, 그 시간에 그냥 내 작업 하자, 아직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모르죠, 더 나이를 먹어서 예순, 일흔에 가서 그런 것들을 내가 힘 안 들이고 설명할 수 있을 단계가, 그럴 시간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해요.”

나는 여기 적는다. 그것은 당신의 일이 아니다. 창문을 넘어 이마에 내리꽂히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붓질을 하고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는 게 당신의 일이다. 화분 속의 식물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동시대를 몸으로 기록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다, 라고.

나는 그의 ‘랜덤’한 작업실을 정리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위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혼란스러운 작업실에서 오래,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이것이 내 본심이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그림과 노래로 남은 삶을 기록하고 있다. 죽은 나무는 살아나지 않는다. 이것은 질서다.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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