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김린용 작가 제공
[매거진 esc]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뇌가 아니라 몸으로 동시대에 반응하는 음악가이자 미술가 백현진
뇌가 아니라 몸으로 동시대에 반응하는 음악가이자 미술가 백현진
질서 의식하지 않고 그린다
“발전·수정·개선은 내 사전에 없어
대신 변화·변경은 믿어요” 백현진은 뮤지션이다. 음악감독 장영규와 함께 만든 어어부 프로젝트는 한국 대중음악 신에 상처를 남겼다. 1집 <손익분기점>은 1997년 3월에 세상에 나왔다. 나는 한국에서 음악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앨범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앨범은 주류 대중음악의 품격을 순식간에 떨어뜨렸다. 어어부 프로젝트는 난입한 강도처럼 칼을 휘둘렀다. 그 폭력의 미학이 나에겐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와 비등한 것으로 느껴진다. 마구 휘두른 칼은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자기 자신에게도. 백현진의 목소리는 칼에 찔린 짐승이 가까스로 끌어올린 음성같이 들린다. 그래서 이 앨범이 궁극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것은 치유와 회복이다. 백현진을 천재라고 평가한 사람이 꽤 많다. 그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사람도 있다. 나는 그가 천재라기보다는 온몸으로 온몸을 끌며 나아가는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보통은 둥둥 떠 있다. 백현진은 그림을 그리는 회화 작가이기도 하다. ‘이기도 하다’라고 적는 것은 무례하다. 그는 좋은 미술가다. 나는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깥의 먼 곳을 바라보는 미술가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는 당연히 자기 안의 세계에 집중한다. 울음이 담긴 자신의 내부를.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몇몇 힘있는 전시기획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뮤지션으로는 저를 좋아하니까, 제 전시에 와서 ‘현진씨 음악은 좋은데…, 사실 제가 회화는 어떻게 보는 건지 몰라요’라고 말한 적도 있었어요. 환장할 노릇이죠.” 힘있는 전시기획자니까 회화에 대해 물론 잘 알 거다. 그러니까 그 힘있는 기획자라는 사람이 어떤 의도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힘있는 기획자니까…. 나는 힘이 없어서 반박할 수가 없다. 그저 질서에 대해 생각한다. 질서를 의식하지 않는 그림, 질서를 의식하지 않는 음악. “발전, 수정, 개선이라는 낱말들이 제 사전에는 없어요. 없어진 지 오래돼요. 대신 변화, 변경은 믿어요.” 그는 더 잘 그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붓을 들고 앉는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실시간으로 계속 반응하는 거예요. 반응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설명을 드리면, 여기 이 그림 같은 경우 아랫부분을 파란색으로 칠했잖아요. 그다음에 무슨 색깔을 칠할지 저 진짜 몰라요. 아무 색깔이나 먼저 붓으로 찍어놓는 경우가 50~60퍼센트 넘어요. 또 어떨 때는 이 색을 칠했다가 저 색을 칠했다가, 놔두고 다른 부분을 칠했다가,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힘있는 분들은 고민해야 한다. 그 반응을 단순히 무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면 많은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백현진은 온전히 열린 창이다. 그 창으로 동시대가 오간다. 백현진은 뇌가 아니라 몸으로 시대에 반응한다. 백현진의 그림, 백현진의 음악을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한 질서 없는 예술가가 동시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나는 백현진이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음악은 좋은데…, 사실 제가 회화는 어떻게 보는 건지 몰라요”라고 말할 정도의 예술가는 아니라고 믿는다. 또한 그 힘있는 자가 백현진의 음악을 좋아한다면, 동일한 이유로 백현진의 회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음악과 미술이라는 매체로 표현됐을 뿐, 그것들은 온전히 백현진이라는 열린 창이기 때문이다. “메시지도 담지 않고 멍하니 붓질을 하고, 실없는 사람처럼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현대 미술가인데, 음악가인데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들 얘기하는 분이 있을 수는 있어요. 저도 친절하게 다시 얘기해볼 수는 있는데, 그 얘기를 차근차근 하기에는 지금 제 볼일이 바빠서, 그 시간에 그냥 내 작업 하자, 아직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모르죠, 더 나이를 먹어서 예순, 일흔에 가서 그런 것들을 내가 힘 안 들이고 설명할 수 있을 단계가, 그럴 시간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해요.” 나는 여기 적는다. 그것은 당신의 일이 아니다. 창문을 넘어 이마에 내리꽂히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붓질을 하고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는 게 당신의 일이다. 화분 속의 식물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동시대를 몸으로 기록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다, 라고. 나는 그의 ‘랜덤’한 작업실을 정리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위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혼란스러운 작업실에서 오래,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이것이 내 본심이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그림과 노래로 남은 삶을 기록하고 있다. 죽은 나무는 살아나지 않는다. 이것은 질서다.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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