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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크 타고 제주에 왔다…이젠 덜 두렵다

등록 2016-04-06 19:04수정 2016-04-07 14:23

제주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다 마주한 일몰.
  MOLA 제공
제주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다 마주한 일몰. MOLA 제공
[매거진 esc] 그럼에도 바이크
파종을 기다리는 부드러운 질감의 검은 흙이 가지런히 갈려 있다. 돌담 옆엔 흰색과 보라색이 섞인 꽃이 아무렇게나 피어 앉았다. 삼나무 가로수가 쭉 뻗은 길을 통과하자 둥근 언덕과도 같은 지형이 드문드문 펼쳐진다. 따뜻해진 공기에 거름 냄새가 배어 있다. 그 뒤로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길을 몇 킬로미터 지나자, 이번엔 아찔한 꽃향기가 헬멧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노란 유채꽃이 저만치 보였다. 연분홍 벚꽃나무는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다. 여기는 제주, 제주에 왔다. 바이크를 타고 와버렸다.

바이크를 타면서 꼭 해내야겠다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제주로의 여행이었다. 이틀 동안 서울에서 완도까지 국도 470㎞, 완도에서 제주까지 뱃길 100㎞. 그렇게 혼자서 떠나왔다.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벚꽃잎이 비처럼 내리는 제주라니! 게다가 바이크를 타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냥 설레지만은 않았다. 꼭 같은 크기만큼 두려웠다.

수없이 곱씹어 생각했다. 수많은 돌발상황을 떠올렸다. 완주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그리고 바이크를 믿지 못해 드는 두려움이다. ‘할 수 있어!’라는 주문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4개월 동안 큰 사고 없이 지냈고, 바이크 상태는 나쁠 이유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자꾸 여행이 숙제처럼 다가왔다. 아니, 어쩌면 숙제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이겠다. 혼자서 수백 킬로미터 달려보기, 그 시간을 때로는 즐기고 때로는 견디면서 통과하기, 라는 숙제.

470㎞의 첫 구간인 서울~경기도 구간을 달리면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온 정신을 집중했다. 대형 트럭이 질주하는 도로 앞에는 길을 알려주는 친구도 없고, 뒤에는 있는 것만으로 든든한 친구도 없다. 설렘과 두려움? 떠올릴 새 없이 어느덧 충청도 구간에 진입했다. 그즈음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떠올랐다. 혼자서 바이크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가 무서웠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의 바이크 뒷자리에 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랬던 그가 아주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고향을 향해 바이크를 타고 달리던 길 위에서였다.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을 그도 지나지 않았을까? 오싹하기보다, 이상하리만치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달렸고 앞으로도 달릴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생겨나는 듯했다. 그가 내 모습을 봤더라면 분명 따뜻한 응원을 보내줬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없지만 친구들이 있었다. 잘 달리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 달릴 것이라고 끊임없이 응원을 해주는 친구들…. 그렇게 길 위에서의 두려움은 걷혀갔다.

제주에 도착하고 나서는 뿌듯한 마음에 이틀 동안의 라이딩 뒤에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니 다시 달릴 힘이 났다. 중산간 아래 벚꽃나무는 곳곳에서 꽃잎을 흩뿌리고 있었고, 동쪽 바다는 보고 있는데도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편애하는 오름이 모여 있는 중산간 지대를 지나면서는 벅차서 눈물이 조금 났다. 이전의 제주 여행과 다른 점은 멈춰서 있기가 아까웠다는 것. 바이크를 타고 온몸으로 느끼는 제주는 기분 좋은 꿈결이다. 거센 제주의 바람에 그 꿈에서 화들짝 깨기도 하지만.

지나온 길을 곱씹어보며 간간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살펴봤다. 그리고 숙제를 다시 생각해본다. 혼자서 수백 킬로미터를 달리는 시간 동안 즐기고 또 견뎠는지. 아산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욕이 나왔고, 김제평야에 드리운 석양에는 감탄이 나왔다. 청보리와 무논이 번갈아 나오는 풍경에는 가만히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운전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지나온 길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서울로 돌아갈 여정이 남은 지금, 숙제는 아직 반이나 남았다. 그래도 무사히 숙제를 끝마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두렵지 않다고는 못하겠다. 이제 조금 덜 두렵다. 다시 시작이다.

바이크에 빠진 M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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