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또다른 선택 2016
드라마·영화 속 캐릭터 가상 국회의원 선거
드라마·영화 속 캐릭터 가상 국회의원 선거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국회에 들어올 사람은 결정됐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어찌 됐든 4년 동안 ‘이 맛 저 맛’, ‘산전수전’ 다 겪었을 이들에게 위로의 박수를 보낸다. 짝짝. 새로(또는 다시) 국회로 들어오게 된 이들에겐 축하의 말보다는 엄중한 경고의 말을 던진다. “똑바로 하시오.”
총선에 즈음해 esc는 또 하나의 선거를 진행했다. 최근 인기를 끈 드라마나 영화 속 캐릭터를 대상으로 한 가상 국회의원 투표다. 후보는 영화 <베테랑>의 서도철 형사(황정민), 드라마 <시그널>의 이재한(조진웅)·차수현(김혜수) 형사, <육룡이 나르샤>의 태종 이방원(유아인),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 대위(송중기)와 강모연 의료봉사단 팀장(송혜교)이다. 국회의원으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뽑는 것과 동시에, 이들이 정치가로서 자질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도 평가했다.
신성한 선거를 두고 ‘장난 나랑 지금 하냐’(<개그콘서트>의 ‘이병원’ 말투)고? 결과를 보면 장난이 아니다. 가상 속 인물이지만, 어떤 인물이 국회로 가야 하는지 ‘민의’를 읽을 수 있다. 투표는 지난 7일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정치학연구방법론 수강생 61명을 대상으로 치러졌다. 학과 표기를 별도로 하지 않은 경우 정치외교학과 학생이다.
이재한 형사가 국회의원으로 ‘좋아요’
대학생들은 <시그널>의 이재한 형사를 국회의원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꼽았다. 유권자 61명 가운데 22명(36%)이 그에게 표를 던졌다. 다음으로 많은 득표를 한 후보는 <베테랑>의 서도철 형사(26%·16표)였다.
시청률 고공 행진중인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 대위는 3위(22%·13명)에 그쳤다. 지금 현재 가장 뜨거운 드라마이자 등장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의외의 결과다. 정도전 같은 정적과 자신의 친형제까지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태종 이방원(<육룡이 나르샤>)은 4위(8%·5표)였다. 요즘 같으면 국회가 아니라 감방에 가야 할 인물이지만, 강력한 카리스마가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 후보인 차수현 형사(<시그널>)와 강모연 팀장(<태양의 후예>)은 각각 5위와 6위에 머물렀다. 영화나 드라마 속 중심인물이 남성 위주인 탓으로 풀이된다.
서도철 국회의원 되면 “가오 살 거 같다”
국회의원 ‘영순위’로 뽑힌 이재한 형사는 <시그널>에서 한국 사회의 권력 부조리를 끝까지 파헤치다 극한의 궁지에 몰리는 인물이다. 그의 명대사 “끝까지 갑니다”가 회자될 만큼 강력한 추진력이 강점이다. 정현우(국어국문학과 4학년)씨는 “정의로운 일을 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사리사욕 때문에 좌고우면하지 않을 것 같다”고 지지 이유를 밝혔다. 노소영(4학년)씨도 “권력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피해자와 약자를 위해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국회에 가면 나라가 달라질 것 같다”고 투표 소감을 밝혔다.
2위로 뽑힌 서도철 형사도 이재한 형사처럼 영화 <베테랑>에서 권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을 밀어붙이는 인물이다. 서도철 형사의 부인이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얼굴을 뜻하는 일본어 ‘가오’에서 유래된 말로 체면을 뜻하는 속어)가 없냐”고 한 대사는 ‘시대의 금언’이 됐다.
학생들도 이런 올곧은 캐릭터를 향해 지지를 보냈다. 최우겸(4학년)씨는 “서도철은 바른 일이 무엇인지 안다. 그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지역구의 ‘가오’가 살 거 같다”고 했다. 좌충우돌하는 그의 추진력도 매력으로 꼽혔다. 박은서(2학년)씨는 “큰 건 하나 터뜨려서 국회가 시끌벅적 재밌어질 것 같다”고 기대를 나타냈다.
하지만 학생들은 서도철 형사처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인’이 현실에도 존재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박경건(3학년)씨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인물이라,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며 현실 정치를 에둘러 꼬집었다.
“유시진은 무소속, 나는 네 소속”
3위를 기록한 유시진 대위는 외모에서 풍기는 매력도 매력이지만, 이른바 군대정신이라 불리는 강한 추진력도 표심을 끌었다.
“여자친구가 좋아해요. 국회로 보내주시길”(박윤제·4학년)
같은 의견은 현재 여성들 사이에서의 그의 인기를 가늠하게 한다.
“유시진은 무소속, 나는 네 소속”(정지혜·3학년), “매력이 있어 외교나 정치를 할 때 플러스 요인이 된다”(우고은·3학년), “훤칠한 인상과 유머감각으로 젊은층과 중장년층까지 모두에게서 인기를 끌 수 있다”(양서은·3학년)는 외모적 호감도에 대한 의견이 많았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 정신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목적을 끈기있게 이룰 거 같다”(정나현·3학년)처럼 추진력 면에서 호감을 보인 의견도 있었다.
4위 태종 이방원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낸 ‘문제적 인물’이다. 지지율 8%로 높지는 않았으나, 그의 권력을 향한 ‘일관된’ 야망이 일부 학생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김형균(4학년)씨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한다. 불필요한 겉치레가 없다. 공식·비공식적 자리에서 동일한 가치관을 드러내는 게 장점”이라고 했다. “형제를 죽인 결단력으로 부패세력을 쓸어버릴 것 같다”(김창용·3학년)며 강한 추진력을 높이 산 의견도 있었다.
“차수현, 똑 부러지고 카리스마 있다”
여성 캐릭터인 차수현 형사와 강모연 팀장은 5위와 6위를 차지했다. 각각 지지율 5%, 3%로 높지는 않았으나, 차수현 형사의 경우 지지층 의견이 확고했다. 미제사건을 끈질기게 파헤치는 그의 모습을 두고 “냉철한 판단이 가능해 보인다. 자신의 신념이 보인다”(한승아·2학년)거나 “똑 부러진다. 카리스마가 있다”(송지현·4학년)는 평가가 나왔다.
강모연 팀장의 경우 배역을 맡은 송혜교가 과거 탈세 의혹에 시달렸던 것과 관련해 “탈세 의혹이 있어,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냉소적인 의견도 있었다. 탈세 정치인이 수두룩한 현실을 비꼰 것이다.
투표 결과를 두고 김준석 동국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가장 시청률이 높은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 대위보다 이재한 형사나 서도철 형사가 앞선 것은 민의의 대표자와 데이트 상대를 구분해 투표했기 때문”이라며 “여성 순위가 낮은 것은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가 남자 주인공의 연애 대상으로 축소됐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동안 한국에서 일부 여성 정치인이 보여준 한계가 투영된 결과로도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한겨레>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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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 거기도 그럽니까?”…2016년 학생들이 묻는다
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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