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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들의 소심하지만 통쾌한 화내기 비법
‘을’들의 소심하지만 통쾌한 화내기 비법
일러스트 이승기
앞에선 화낼 수 없는 처지콧노래·욕…나홀로 분출형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감정을 분출하는 경우다. 어디에 대놓고 화를 낼 수 없는 직장인들에게 가장 많은 유형이다. 지금은 서울의 한 은행 영업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조철민(37)씨는 한때 본점에서 근무했다. “본점 근무할 때 스트레스가 말도 못했어요. 매일 새벽에 출근해 보고와 회의를 준비했어요. 한 보고서를 20~30번씩 고친 적도 있었죠. 상사가 별것 아닌 걸로 트집 잡을 땐 다 때려치우고 싶더라고요.” 처음 조씨는 이럴 때마다 술로 풀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술은 한계가 있었다. 그때 터득한 것이 콧노래다. “진짜 열 받으면 콧노래를 불렀어요. 어떤 노래를 딱히 부르는 건 아니지만, 흥얼거리다 보면 일단 화가 가라앉아요. 화났다는 걸 들키지도 않고요.” 대형 아이티 기업 팀장인 심유정(40)씨는 욕으로 푼다. “윗선에서 실적 압박하고, 아래 부하 직원들이 대들면 그날은 답이 없어요. 대놓고 화는 못 내니까 집에 돌아와 샤워하면서 큰 소리로 욕을 해요. 평소에 하지 못했던 심한 욕도 해요. 그러면 좀 가라앉아요.” 샤워하고 나온 뒤 맥주나 와인이 이어진다. 가사와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전업주부들도 ‘나홀로 분출형’이 많다. 주부 홍유민(36)씨는 “아이와 집안일로 너무 지친다 싶으면, 일단 아이를 친정 등에 맡기고 혼자 순댓국집에 가서 순댓국에 소주를 마신 뒤 노래방에 간다. 그러면 좀 풀린다”고 했다. 남성 직장인이라면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가능한 일상이지만, 주부들에겐 이마저도 작은 탈출구가 되는 것이다. 참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하는 게 낫다. “일에는 일로”…되받아치기형 직장에서 받은 상처로 개인이 화를 내면 되레 ‘감정의 손해’일 수 있다. 이럴 때 일로써 복수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로 받은 상처를 일로 푸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고의로 업무 진행을 느리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상사를 골탕 먹이는 것이다. 통신회사 과장급인 이현민(34)씨는 얼마 전 팀장으로부터 “업무 처리에 허점이 많다. 머리가 나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죄송하다”며 그 자리를 피했지만, 가슴 한쪽에 못이 박힌 것처럼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이씨는 소심한 복수를 결심했다. 상사의 업무 지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꾸 되물으며 업무 처리를 지연한 것이다. 물론 “꼼꼼하게 확인하려고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팀장이 “업무처리가 왜 이렇게 느리냐”고 독촉하면 “타 부서에서 협조를 안 해준다”고 받아쳤다. 이미 타 부서 동기 직원에게 “자료를 늦게 취합해달라”며 ‘손’을 쓴 뒤였다. 결국 참지 못한 팀장이 먼저 버럭 화를 냈다. 이씨는 ‘이 기회다’ 싶어 “팀장님, 타 부서에서 협조를 안 해주는데 어떡하라는 겁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팀장은 물끄러미 보다가 “알았다”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씨는 “그때 정말 통쾌했다.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더라”고 했다. 최근엔 대부분의 업무 지시가 메신저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화내기’ 방법도 있었다. 대기업 회사원 양민수(39)씨는 “평소 짜증나게 하는 상사의 카톡 업무 지시를 계속 읽지 않은 적이 있었다. 물론 나중에 ‘애나 와이프가 아팠다’는 등의 핑계를 댄다. 어쩌겠는가”라고 말했다. “가족은 무슨”…마이 웨이형 간혹 직장에서 도를 넘는 지적이나 업무 지시가 내려올 때가 있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가족 같아서”다. 과거, 퇴근 뒤 상사와 소주 한잔 기울이며 감정을 풀었던 시절을 경험했던 직장인들이 갖고 있는 대표적인 착각 가운데 하나다. “가족은 무슨, 그냥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이죠.” 공기업 회사원 유명진(37)씨의 생각은 확고하다. 그도 처음엔 상사의 비위를 잘 맞췄다. 회식도 3~4차까지 따라다녔다. 술 취해 상사에게 “형님, 형님”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해 한해 갈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몇해 전부터는 경영 효율화랍시며 선배들이 퇴사 압력을 받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다르게 살자’고 마음을 굳혔다. “혼낼 때는 가족이라더니, 내쫓으려고 하니 나몰라라 하는 게 무슨 가족인가요.” 유씨는 현재 직장과 개인 생활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다. 마음먹고 행동하니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웬만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칼퇴해요. 그리고 워크숍을 빙자한 엠티도 집안일을 핑계로 거의 가지 않아요. 회식도 가능하면 빠지고, 가게 돼도 1차만 하고 집에 옵니다. 몸 축내며 술 마실 필요가 있나요.” 처음엔 단체생활 못한다며 핀잔도 들었는데, 최근에는 자기처럼 생활하는 동료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했다. “또 하나의 가족은 없어요. 직장은 직장일 뿐!” 유씨가 소주잔을 들이켜며 말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그래도 ‘복수’할 방법은 천지
카톡 씹고, 샤워하며 욕하고…
치사해보여도 속은 후련해
화 잘내 뜬 사람들 시도 때도 없이 ‘발끈’하는 사람, 솔직히 ‘밥맛’이다. 시쳇말로 “밥맛 떨어진다”. 그런데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인기가 없다는 것은 편견일 수 있다. 왜? 화를 잘 내서, 더 사랑받는 사람도 많으니까.
이경규
박명수. 문화방송 제공
김구라. SBS 제공
김용옥.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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