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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부럽잖은 ‘나는야 시인’

등록 2016-09-08 11:05수정 2016-09-08 11:22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요즘 20~30대 가장 인기있는 청년작가 오은·황인찬·박준
오렌지색 종이꽃, 스키복, 도장, 팬. 시인 오은이 팬들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시인 황인찬은 세월을 껴안은 낙엽을 받았다. 시인 박준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최근 시가 가장 ‘핫한 문화 콘텐츠’로 20~30대에게 소비되고 있다. 시인은 스타 반열에 올랐다. ‘문학동네’의 시집 기획자 겸 편집자인 시인 김민정은 오은, 황인찬, 박준을 스타 시인으로 주저 없이 꼽는다. 동료 시인 이우성조차 고개를 끄덕인다. 이들은 어떤 매력이 있어서 팬덤까지 생겼을까?

시인 오은.
시인 오은.

오은: 경쾌하고 친근하게 세상의 아픔을 보듬다

2분, 4분. 까르륵! 6분, 8분! 까르륵! 시인 오은(34)을 만나고 10분이 채 안 돼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었다. 그는 유쾌하다.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자신의 부모보다 나이가 어린 세상 모든 남녀가 형이고 누나다. 스스럼없이 던지는 “누나”라는 호칭이 싫지가 않다. 그는 친화력이 높다. 세상과 자신을 나누는 경계선이 낮고 벽이 없다.

그가 쓰는 시는 경쾌하고 친근하다. ‘햇볕이 따갑다고 해도 좋다/ 햇볕이 뜨겁다고 해도 좋다/ 온몸으로 햇볕을 보았다’(‘오늘 치 기분’)는 식이다. 그는 말놀이의 귀재로 불린다. 혀에 감기는 말의 재미가 있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저글링하듯 가지고 논다. 그 발랄함이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꾸기는 힘들다. 그냥 편하게 읽고 자기 식으로 소화하면 그만”이라며 시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던지는 거창한 무게감도 내려놓는다.

그의 시가 마냥 발랄하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형식은 경쾌하나 속뜻은 되새김질할수록 시대의 아픔에 닿아 있다. “대학 시절, 비정규직과 에프티에이(FTA) 반대 학생운동을 했다. 광화문에서 시위도 많이 했는데 세상은 변한 게 없었다.” 세월호 참사, 청년실업 문제 등 세상의 아픔이 그의 내면에도 자리잡고 있다. 다만 표현하는 방식이 명랑할 뿐이다. “슬픈 것을 슬프게 말하는 것은 매력이 없”으니까.

그는 2002년, 20살에 등단했다. 등단이 뭔지도 몰랐던 대학교 1학년생은 형의 노력으로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과생이었던 형이 (내가) 끄적거린 글이 재미있다고 생각해 나 모르게 내 시를 이곳저곳에 투고했다”고 한다. 월간 <현대시>에 ‘엄마, 카페테리아에 가다’ 등이 실리며 주목받았지만, 정작 그는 2004년까지만 해도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없었다. 그의 ‘시인 디엔에이(DNA)’는 시인 김언이 끌어냈다. “김언이 시인인지도 몰랐다. 그가 연락을 해와 시 5편을 청탁했다.” 일주일 만에 그는 5편을 쓰고 “평생 이 일을 해야겠다”는 신의 계시 같은 확신을 얻었다.

지금 그는 빅데이터 회사인 ‘다음소프트’의 대리이기도 하다. 3년6개월을 다녔다. 곧 퇴사할 예정이다. “낮에는 직장인 오은, 밤에는 시인 오은”이 되겠다는 결심은 실천이 쉽지 않았다. 최근 세 번째 시집 <유에서 유>를 내면서 퇴사를 결심했다. “한 시기가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전업 시인으로 살 생각은 없다. “시와 먼, 되도록 먼 일을 할 생각”이라고 한다. 그 일은 아마도 평범한 우리들의 일일 것이고, 아마도 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시인 오은의 시집 <유에서 유>.
시인 오은의 시집 <유에서 유>.
풀쑥

몸을 열면 질병이
입을 열면 거짓말이

창문을 열면 도둑이, 도둑고양이가 튀어나온다

우편함을 열면 눈알이
내일을 열면 신기루가
방문을 열면 호랑이가, 종이호랑이가 튀어나온다

속이는 것은
속없는 겉이 하는 일

시인 황인찬.
시인 황인찬.

황인찬: 사실적인 문장으로 돌아보게 만들다

“나도 미스터리다. 제 시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정말 감사하다.” 시인 황인찬(28)은 겸손하다. 2012년, 그는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로 김수영문학상 최연소 수상자(31회)가 됐다. 문단 원로들이 그의 시를 화제에 올릴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시 낭독회는 예외 없이 만석이다. 그런 세간의 평가와 열광에 그는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한다. 겸양의 미덕을 이미 알아버린 28살 청년은 몸에 짙게 밴 겸손을 시 창작에 활용한다. “시집을 내면 강의를 많이 하는데, 사람들이 내 시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듣는다. ‘당대의 좋음’이 무엇인지 공유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바로 읽히는 것”을 시 창작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바로 읽힌다고 해서, 빨리 읽히고 빨리 소비되지는 않는다. “처음 읽을 때는 바로 읽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오래 생각하게 하는 시”를 쓴다. 접근하기는 쉬우나, 그 의미를 한마디로 단정짓기는 어렵게 만들어 시를 계속 되새김질하도록 했다. “쉽게 통과했지만 돌이켜보게 하고, 돌아보게 하는 것이 시인들의 아름다운 태도”라고 여긴다. 백과사전에 있는 문장도 자주 차용한다. “중립적이고 사실을 적은 문장이다. 정서나 의도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런 글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멍하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멍하면 멍’)도 쉽게 문장을 따라 읽지만 뭘 잘못한 것인지 계속 곱씹게 된다.

최근 그는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를 냈다. 청년답게 솔직하게, 제목에 숨겨진 비밀을 털어놨다. “이자혜 작가가 ‘레진코믹스’에 연재하는 <미지의 세계>란 만화 제목을 그대로 따오려고 했는데 착각을 해서 ‘미지’가 ‘희지’가 된 거다.” 출간 후 “희지가 누구냐?”, “한자냐?”란 질문에 “모른다”고 답했다. “‘희지’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폭이 넓어져서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래 시인이 꿈은 아니었다. 소설가가 되고자 문예창작학과를 입학했다. 하지만 소설쓰기의 긴 과정이 답답하고 지루했다. 시는 달랐다. 몇 줄을 안 써도 즐거움이 요동쳤다. 결국 그는 시인이 됐다. 그는 “이 시대에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게 바람이다. 그 바람은 혼자 궁리해서 힘들다. 동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연대의 중요성까지 일찍 알아버린, 철든 젊은 시인이다.

시인 황인찬의 시집 <희지의 세계>.
시인 황인찬의 시집 <희지의 세계>.
소실

해변에 가득한 여름과 거리에 가득한 여름과 현관에 가득한 여름과 숲속에 가득한 여름과 교정에 가득한 여름 물 위에 앉은 여름과 테이블 맞은편의 여름과 나무에 매달린 여름과 손 내밀어 잡히는 여름 잡히는 않는 여름

눈을 뜨니
여름이 다 지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선풍기는 돌아간다 등이 젖은 남자애들이 내 옆을 지나가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을 뽑는 이가 있다 창가에 걸어 놓은 교복은 빠르게 말라 가고

또 보다 많은 것들이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래도록 그것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이 손을 언제 놓아야할까
그 생각만 하면서

시인 박준.
시인 박준.

박준: 일상의 언어로 상처를 위로하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문병-남한강’) 시인 박준(33)이 4대강 정비 사업으로 망가진 남한강 일대를 여행하고 쓴 시다. 당일치기로 둘러볼 요량으로 간 그는 “아픈 마음이 스며들어서” 4~5일 더 머물렀다. 첫 시집이 6만권 이상 팔린 인기 시인은 절벽 위에 놓인 우리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용산 가는 길-청파동 1’도 용산참사의 현장을 살펴보고 쓴 시다.

그는 사회현실을 다루되 표현하는 방식이 직설적이지 않도록 자신만의 미학적 장치를 깔았다. “나의 미학은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시적인 정서로 끌어올리는 것”이란다. 그는 일상의 대화를 시의 재료로 쓴다. 건조한 단어에는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배어 있다. “일상의 현실에서 쓰이는 말들은 세상 어떤 명언보다 아름답다. 시가 구태여 고고해서 우리와는 먼 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세월호 참사만은 “미학이 끼어들 틈이 없는 현실”이었다. 지난 4월 경기도미술관이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연 ‘세월호 추념전’ 개막일에 그의 시 ‘숲’이 낭독되기도 했다. ‘숲’에는 가족을 잃은 이를 위로하는 따스한 마음이 담겨 있다.

2008년, 고작 25살. 문학계간지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을 때도 ‘광우병 촛불시위’ 현장에 있었다. “시를 쓰겠다고 간 게 아니다. 아무도 시민이 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상식적인 시민으로 가서 아픔이 느껴지면 시인으로서 (시를) ‘출력’하려고 했다.” 현실에 대한 이런 집요한 성찰은 과거 경험한 다채로운 ‘일상’과 연결되어 있다. 학비를 벌고자 대학 졸업 전부터 3년 동안 서울 오류동 한 마트에서 배달원으로 일했다. 자서전 대필 작가도 했고, 시청 공보실에서도 근무했다. 밥벌이가 바빴지만 시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다.

지금 그는 창비에서 시집 기획자 및 편집자로 일한다. “개를 좋아해서 수의사가 되려고 했지만 공부를 잘해야 된다는 것을 고3 때 알았다. 수의대에 갈 수 없다는 절망에 자학의 글을 썼다.” 그 글이 시의 출발점이다. 참혹한 현실이 시의 소재라고 해서 그의 성품마저도 무겁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스로를 애주가라 밝히는 그는 실없는 우스갯소리에도 박장대소하는 여느 청년과 다르지 않다. 두 번째 시집 <미인>(가제)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첫 시집보다 덜 팔렸으면 좋겠다”면서 웃는다.

시인 박준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시인 박준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지금은 우리가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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